[칼럼] 루틴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1959

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자전거 타는 법 잊어버리기>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영상을 보았다. 흔히 자전거 타는 법은 한번 배우고 나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상에서 특수 제작한 자전거를 타는 모두에게 혼란이 찾아온다. 핸들을 왼쪽으로 돌리면 바퀴가 오른쪽으로 가고,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바퀴가 왼쪽으로 돌아가게 만든 자전거다. 언뜻 생각할 때는 간단해 보인다. 반대로 돌리기만 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놀랍다. 어느 누구도 타지 못한다. 머리 속으로는 아는데 몸이 따라와주지 않는다. 그래서 실험자는 깨닫는다. “지식은 이해와 동일하지 않다”(Knowledge is not understanding).

이 영상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제자도’ 그리고 ‘제자훈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제자훈련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운동이다. 1960년대 네비게이토 선교단체를 필두로 해서 1980년대 사랑의 교회가 <평신도를 깨운다>는 기치 하에 제자훈련 운동을 펼쳐 나갔고, 그 이후로 제자훈련은 한국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되었다. 교회마다 제자 훈련 안 하는 교회가 없었고, 제자훈련 한번 안 받아 본 교인이 없을 정도다.

제자훈련이 한국교회에 끼친 긍정적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을 볼 때 제자훈련이 과연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성하는 일을 제대로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제자훈련을 받았다는 기독교인들의 이중성은 어디서 온 것일까? 사회에서는 여전히 출세와 성공을 추구하면서 교회에서는 제자훈련 과정을 꼬박 이수하는 이 아이러니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제자훈련이 지나치게 지식 전달 위주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다. 제자훈련 하면 곧바로 ‘성경공부’가 떠오른다. 한국 기독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기독교 세계관 운동] 역시 지식인 위주의 운동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문재 시인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 필요한 건 세계관이 아니라 세계감”이라고 말한다. 공감 능력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다.

신영복 선생은 그의 책 <담론>에서 우리가 일생동안 하는 여행 중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먼 여행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고 한다. 지식이 감정의 차원을 넘어 실천의 차원까지 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몰라서 안 하는 것 아니다. 자전거 조작법을 몰라서 못 타는 것 아니다. 몸이 머릿속 지식을 따라가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영상 속 실험자 데스틴은 마침내 그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다. 매일 5분씩 8개월의 연습 끝에 일이었다. 그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만든 힘은 그가 가진 지식이 아니라 연습이고 습관이었다. 기독교 철학자 제임스 스미스는 ‘사랑은 습관이고, 제자도는 그 습관을 바로 잡는 것’이며, ‘교회는 그 습관을 재형성하는 장’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교회는 “예수라는 심장을 이식 받은 이들이 새로운 심장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훈련하는 재활치료센터”이다.

치매 걸린 노인들이 아무 것도 기억 못 하면서 놀랍게도 찬송가를 부르고 주기도를 한다. 수천 수만 번 부르고 기도한 것들을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탁월한 지식이나 순간의 열정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작은 습관과 매일의 연습이 우리를 지켜준다. 루틴이 우리를 구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