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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May 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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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12. 허정자 전 재미시카고한인간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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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자 전 재미시카고한인간호사협회장.

▶돌봄으로 길을 내고, 글로 마음을 어루만지다
▶‘제트기 간호사’로 불린 1세대 한인 여성 전문인
▶소아과 병동에서 30여 년… 의료봉사와 후배 연대에 앞장
▶문학·예술로 한인사회 문화의 결을 더하다

[편집자주] 본지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틀을 다진 1세대 한인들의 삶을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열두 번째 인물로는 간호사로 미국 의료 현장에 뿌리내린 뒤, 재미시카고한인간호사협회장과 시카고문인협회장, 한국무용단 후원회장 등을 맡으며 한인사회 봉사와 문학·예술 활동을 이어온 허정자 회장의 여정을 따라가 본다.

미국 의료 현장에 뿌리내리며 ‘제트기 간호사’로 불린 1세대 한인 여성 전문인 허정자 회장.

허정자 회장의 삶을 지탱해 온 가장 큰 축은 일찍부터 자리 잡은 신앙이었다. 유교와 불교적 가풍이 강했던 집안에서 온 식구가 절에 다녔지만, 허 회장은 유치원 시절부터 홀로 집 근처 교회를 찾아갔다. 허 회장은 “할머니의 꾸중을 피해 책가방을 뒤주 밑에 숨겨놓고 몰래 교회에 가곤 했다”며 “교회가 재미있었고, 마음이 편해 몰래 예배당을 찾았다”고 회상했다. 조용한 소녀의 내면에는 한 번 마음이 향한 것은 끝까지 지켜내는 단단한 중심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1941년 서울,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난 허 회장의 유년기는 한국전쟁의 상흔과 깊이 맞닿아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가족과 함께 일산으로, 다시 1·4 후퇴 때는 충청도 친적집을 향해 피란길에 올랐다. 그는 “중공군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기도 했다“며 “그 어린 나이엔 그저 무섭다는 생각뿐이었다”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휴전 후 돌아온 서울 하늘 아래 가족을 기다리는 것은 불타버린 집터뿐이었다. 가족들은 을지로와 효자동 친척집으로 옮기며 무너진 삶의 터전을 다시 일궈야 했다.

전쟁은 배움의 현장마저 앗아갔다. 미군이 학교 건물을 주둔지로 사용하면서 다른 학교의 건물을 빌려 수업받는 ‘더부살이 교육’이 이어졌고, 피난과 복귀가 반복되는 혼란 속에서 학년과 교우 관계는 엇갈렸다. 어린 소녀에게 전쟁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바닥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가혹한 현실이었다.

◇ 무용과 글, 마음에 남은 씨앗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허 회장은 자신만의 재능과 감수성을 꽃피웠다. 유치원 때부터 배워온 발레는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이어졌고, 무용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해 방송국 무대에 오르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그는 “집집마다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에 처음으로 방송국 구경을 가봤다”며 “몸이 약해 등굣길에 쓰러진 적도 있었지만, 무용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중학교 3학년 무렵 이대 경연대회 발레 부문에 참가했을 당시의 기념사진.

글쓰기와의 인연도 운명처럼 찾아왔다. 그는 “이전까지 글을 써본 적이 없었는데,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석용원 시인)이 글을 써오라는 숙제를 꾸준히 내주셨다”며 “그때 뿌린 작은 씨앗이 훗날 수필가라는 결실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학창 시절은 이사와 전학이 겹치며 다소 외로운 시간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유치원 시절 친구와 재회하고,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이 생기면서 학교생활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부터는 학교 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늘 바쁘게 지냈고,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고 전했다. 늦게까지 활동한 그를 교장 선생님이 직접 차로 귀가시켜 줄 정도였으니, 말수 적던 소녀는 어느새 주변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학생으로 성장해 있었다.

1963년 적십자간호대학(현 중앙대학교 적십자간호대학) 졸업식 기념사진. 사진 왼쪽 두 번째 줄 세 번째가 허정자 회장이다.

고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결정할 때, 허 회장은 자신의 미래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은 가정과 진학을 권유했지만, 그의 시선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있었다. 허 회장은 “당시 미국으로 연수를 가는 계획을 세웠고, 가장 확실한 길이 간호 분야에 있었다”며 “영어가 서툰 상태에서 일반 유학을 떠나는 것보다 간호를 전공해 전문직으로서 미국에 가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입학한 곳이 적십자간호대학(현 중앙대학교 적십자간호대)이었다. 실습과 이론을 병행하며 그는 간호가 자신의 적성에 깊이 부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63년 대학 졸업 후 한국 병원에서 실무 경험을 쌓으면서도 미국행을 향한 준비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우던 시대가 아니었기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며 “코리아헤럴드 어학원을 다니며 치열하게 영어를 공부했다”고 말했다.

◇ 미국행, 스스로 증명한 시간

1967년 그는 마침내 미국으로 향했다. 한국 병원에서 이미 신경외과 헤드널스로 일하며 학생 실습을 지도한 경험이 있었지만, 미국 병원은 또 다른 세계였다. 언어는 낯설었고, 동양인 간호사를 대하는 시선도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필리핀계 간호사들이 중심이던 병동에서 그는 단순 업무 위주로 배정받는 일을 겪었다.

허 회장은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미국에 발전된 것을 배워서 한국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인데, 널스에이드도 할 수 있는 일만 시키더라”며 “그래서 결국 간호원장에게 직접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불합리한 상황 앞에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온 사람인지, 왜 이곳에 왔는지를 또렷하게 말했고, 결국 실력으로 인정받았다.

2018년 시카고에서 열린 중앙대학교 총동창회 행사에 참석해 동문들과 함께했다.

2년의 연수를 마친 그는 196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귀국을 선택했다. 허 회장은 “연수 끝나는 날 한국에 갔고, 그다음 달에 결혼했다”고 말했다. 귀국 후 그는 약혼자였던 허영무 씨와 결혼했고, 이듬해 첫아이를 품에 안았다. 이제 그의 삶은 가정 안에서 자리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남편이 미국 유학을 결심하면서, 허 회장도 다시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그는 “첫 아이가 11개월쯤 됐을 때 다시 미국으로 왔다”며 “남편은 공부를 해야 했고,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하니 내가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1971년 그가 다시 발을 디딘 곳은 일리노이주의 작은 농촌 마을 ‘몬머스(Monmouth)’였다. 외국인이 거의 없는 병원이었고, 동양인 간호사는 더욱 낯선 존재였다. 하지만 허 회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이가 어려 처음으로 밤근무를 택했고, 낯선 환경에서도 누구보다 빨리 움직이며 병동을 익혀갔다. 그는 “밤 타임 근무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린 자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그냥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일했다”고 말했다.

◇ 낯선 땅에서 인정받은 ‘제트기 간호사’

몬머스의 작은 병원은 허 회장에게 또 하나의 시험대였다. 한국에서 신경외과 수간호사로 일했고 미국 연수 경험까지 갖춘 베테랑이었지만, 농촌 지역 병원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동양인 간호사가 드물던 시절, 그는 언어와 문화, 낯선 시선의 장벽을 동시에 넘어야 했다. 그러나 허 회장은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집중하며 그저 정신없이 뛰어다녔다”며 “어린 아기를 돌보기 위해 선택한 밤근무였기에 피곤함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고 회상했다.

일을 워낙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한 덕분에 병원에서는 그에게 특별한 별명을 붙여주었다. 바로 ‘제트기 간호사’였다. 작은 체구의 한국인 간호사가 병동 구석구석을 빠르게 오가며 환자들에게 필요한 조치를 놓치지 않자 동료들이 붙여준 이름이었다. 허 회장은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움직였던 모양이다”라며 환하게 웃었지만, 그 별명 뒤에는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이민 1세대 전문직 여성의 시간이 서려 있었다. 정확한 손길로 환자의 안위를 살피며, 그는 미국 의료 현장 한복판에 자신의 자리를 단단히 뿌리내렸다.

1987년 콜럼버스 병원 소아과 병동에서 근무하던 시절. 허 회장은 30여 년간 어린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돌봤다.

남편의 학업이 마무리될 무렵 가족은 시카고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1973년 시카고에 정착한 허 회장은 이듬해 콜럼버스 병원에 입사하며 소아과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아이들이 워낙 예뻐서 소아과 근무가 즐거웠다”며 “어린 환자들을 돌보다 보면 힘든 줄도 모르고 시간이 갔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소아과 간호사로서의 길은 30년이 넘는 세월로 이어졌다. 병실에는 늘 아이들의 웃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병마와 싸우는 아이, 부모와 떨어져 불안해하는 아이, 끝내 작별을 고해야 했던 어린 생명들도 있었다. 허 회장은 “아픈 아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지는지 곁에서 누구보다 절실히 느꼈다”며 “간호사는 그들의 무너진 마음까지 함께 어루만져야 하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그는 부모 없이 홀로 입원한 아이들에게 기꺼이 말벗이 되어주고, 놀이를 통해 두려움을 잊게 해주는 따뜻한 수호천사였다.

병원에서는 강인한 간호사였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두 아들을 키우는 헌신적인 어머니였다. 허 회장이 수십 년간 밤근무를 고수한 이유는 오직 아이들 때문이었다. 그는 “밤새 병동을 지키고 아침에 돌아오면 잠에서 깬 아이들이 현관까지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며 “겨우 3~4시간 쪽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아이들을 챙겨야 했지만, 그 시간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이었다”고 회상했다.

수면시간을 줄여가며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는 아이들의 학교 행사나 필드트립(현장 학습)만큼은 빠지지 않으려 애썼다. 허 회장은 “아이들이 선생님께 ‘우리 엄마도 올 수 있어요’라고 말하면 차마 안 갈 수가 없었다”며 “몸은 천근만근 졸음이 쏟아져도 아이들과 함께 학교 버스를 타고 체험 학습을 가던 시간이 지금 돌아보니 더없이 귀하고 소중하다”고 덧붙였다.

이민 1세대 여성에게 일과 가정은 늘 팽팽한 줄타기 같은 숙제였다. 병원에서는 전문직 간호사로서 책임을 다하고, 집에서는 엄마로서 두 아들의 성장을 지켜야 했던 그는 어느 것 하나 쉽게 놓지 않았다. 밤에는 환자의 생명을 지키고 낮에는 아이들의 곁을 지켰던 그의 삶은, 성실한 책임감으로 채워진 시간이었다.

2006년 재미시카고한인간호사협회 회장 취임식 당시 모습.

◇ 가장 어두운 시간, 신앙으로 일어서다

가정과 일터를 지키며 낯선 땅에 뿌리를 내려가던 허 회장에게도 인생의 큰 시련이 찾아왔다. 1989년, 곁을 지키던 남편 허영무 씨가 세상을 떠났다. 두 아들을 키우며 병원 일을 이어가던 그에게 남편과의 사별은 삶의 중심이 흔들리는 고통이었다. 허 회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며 “앞으로 아이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고 말했다.

그 시간을 지나며 허 회장은 다시 신앙을 깊이 붙들었다. 유치원 시절부터 가족 중 홀로 교회를 찾아가던 믿음은, 인생의 가장 어려운 순간 다시 그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됐다. 그는 남편을 떠나보낸 뒤 자신의 힘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웠던 날들을 신앙 안에서 하루하루 버텨낼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믿음은 이민 생활의 고단함 속에서도, 사별의 아픔 속에서도 그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준 버팀목이었다.

재미시카고한인간호사협회 회장 재임 당시 미국·일리노이간호사협회 임원진들과 함께한 사진. 사진 왼쪽 두 번째가 허 회장.

남편의 빈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않았지만, 허 회장은 그 상실 앞에 멈춰 서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의 몫까지 자신이 더 성실히 감당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는 “남편이 못다 한 일까지 내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아이들을 위해서도, 내게 주어진 삶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편과의 사별은 허 회장의 삶을 멈추게 한 사건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더 깊고 성실하게 살아가게 한 전환점이 됐다.

2018년 글렌뷰에서 열린 코윈 행사에서 참석자들과 함께했다. 그는 코윈 활동을 통해 한인 여성 리더들의 교류와 연대에도 힘을 보탰다.

◇ 2,000명 선교사를 품은 리더십과 나눔

자녀들이 자라고 삶이 안정되면서 허 회장의 돌봄은 병원과 가정을 넘어 한인사회로 넓어졌다. 2000년대 중반 그는 재미시카고한인간호사협회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허 회장은 “아이들도 다 컸고, 이제는 내가 쌓아온 경험을 사회에 돌려줄 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부회장과 회장, 이사장으로 이어지는 협회 활동 속에서 그는 한인 간호사들의 연대와 봉사에 힘을 보탰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재미시카고한인간호사협회장으로 활동하던 2006년, 시카고 열린 세계선교대회 의료봉사였다. 의사협회와 함께 약 2천 명에 이르는 선교사와 가족들을 대상으로 건강검진과 의료 상담을 진행했다. 허 회장은 “멀리서 온 선교사와 가족들의 건강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며 “의사, 간호사들이 함께 움직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한인사회 행사에 꾸준히 참석하며 지역 한인들과 교류해 온 리처드 데일리 전 시카고 시장과 함께했다.

허 회장의 활동은 간호계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코윈(KOWIN·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활동에도 참여하며 한인 여성 리더들의 교류와 연대에도 힘을 보탰다. 이민사회에서 여성들이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다음 세대가 더 넓은 길을 볼 수 있도록 돕는 일 역시 그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봉사였다. 허 회장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함께하면 길이 열린다”며 “서로 돕고 연결되는 것이 한인사회에는 참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 좌) 2016년 LA에서 열린 서울문예창작상 시상식에서 ‘나의 수의’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사진 우) 2025년 하와이에서 열린 한미문단 지식공감 문학상 시상식에서 수상의 기쁨을 나눴다.

◇ 문학과 예술로 이어진 또 다른 치유

그는 간호사의 삶을 넘어 문학을 통해 또 다른 길을 열었다.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고(故) 명계웅 선생의 문학창작교실이었다. 허 회장은 그곳에서 글의 기본을 배우고, 자신의 삶과 마음을 문장으로 풀어내는 법을 익히며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글쓰기를 다시 붙들었다.

시카고문인협회 단체사진. 허 회장은 제28대 시카고문인협회장을 역임하며 지역 문학 활동에 기여했다.

2004년 수필 전문지 ‘수필시대’를 통해 등단한 그는 2016년 ‘나의 수의’로 서울문예창작상 우수상을 받았다. 이어 2025년 한미문단 지식공감 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문인으로서의 역량을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 허 회장은 “고교 시절 국어 선생님의 격려가 제 안에 남아 문학의 불씨로 되살아났다”며 “간호가 타인의 몸을 돌보는 일이라면, 글쓰기는 마음을 돌보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시카고 한국무용단 공연 당시의 모습. 허정자 회장은 한국무용단 후원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전통예술을 지역사회에 알리는 데 힘을 보탰다.

예술에 대한 열정도 멈추지 않았다.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무용은 그의 몸과 마음에 오래 남았고, 미국 이민 생활 속에서는 한국 전통무용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이어졌다. 특히 한과 슬픔을 승화시키는 한국무용에 매료된 그는 시카고 한국무용단 후원회장을 맡아 한국의 미를 현지에 알리는 데 힘을 보탰다.

허 회장은 “무용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 마음과 마음을 잇는 힘이 있다”며 “이민사회에서 전통예술을 지켜나가는 것은 곧 우리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간호와 글, 그리고 무용은 언뜻 달라 보이지만, 허 회장에게는 모두 사람을 살피고 위로하는 하나의 흐름이었다.

시카고 한국무용단 단체사진. 허정자 회장은 후원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전통예술을 알리는 데 힘을 보탰다.

긴 세월을 지나 허 회장이 가장 감사하게 여기는 이름은 가족이다. 큰아들 제이 씨는 노스웨스턴 병원에서 통증의학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으며, 둘째 아들 리처드 씨는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허 회장은 “아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주는 것이 가장 감사하다”며 “여섯 명의 손주들을 볼 때마다 내가 여기까지 잘 버텨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가족들과 함께한 허정자 회장. 두 아들과 며느리, 여섯 명의 손주는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힘이다.

허정자 회장의 삶을 하나의 이름으로만 부르기는 어렵다. 그는 간호사였고, 어머니였고, 수필가였으며, 문화예술 후원자였고, 한인사회 봉사자였다. 그러나 그 모든 이름을 관통하는 말은 결국 ‘돌봄’이다.

허 회장은 “지금까지 무탈하게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며 “돌아보면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해야 할 일’은 결코 작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아이들의 생명을 돌봤고, 가정에서는 두 아들의 곁을 지켰으며, 한인사회에서는 다양한 협회 활동과 의료봉사, 문학과 예술 후원을 통해 사람들을 이어주었다. 한 사람의 성실한 삶이 오래 쌓이면 그것은 곧 한 공동체의 역사가 된다.
허정자 회장이 걸어온 길은 시카고 한인사회가 지나온 시간의 한 조각이자, 다음 세대에게 이어질 돌봄과 나눔의 발자취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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