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칼럼] “계약이 끝났는데 세입자가 안나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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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겸 변호사/법무법인 시선 대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는 한국의 ‘정’ 이란 개념에 대하여 참 오묘하고 독특해서 불어 사전을 찾아봐도 번역할 길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만큼 한국의 ‘정’ 문화에는 짧은 몇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성이 녹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굳이 간단히 정의하자면,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초코파이의 광고 문구인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가 가장 적합한 문장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한국인을 타국민과 구별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이 ‘정’ 문화가 때로는 의도치 않은 분쟁의 주요 쟁점이 되기도 한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의 개념을 통해 쉽게 한 울타리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좋은게 좋은거지” 식의 계약을 맺을 때 특히 그렇다. 흔히 접할 수 있는 법적 분쟁으로는 임대차 계약이 끝났을 때 정식으로 계약을 갱신하지 않고 묵시적 갱신을 통해 임대를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만약 정기 임대차 계약을 맺은 세입자가 그 임대 기간이 종료된 이후에도 임대인의 허가 없이 계속 해당 건물을 점유한다면 잔류 임차인으로 간주된다. 법적인 권리가 없는 잔류 임차인은 엄밀히 말해서 강제 퇴거의 대상이다. 따라서, 임대인은 별도의 계약해지 통지 없이도 세입자를 퇴거 조치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임대인이 세입자를 퇴거 조치하지 않고 그대로 세입자의 대우를 해준다면, 이는 ‘임대차 묵시적 갱신’에 해당하며 세입자는 기존 임대차 계약과 동일한 조건과 기간으로 계약을 갱신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다만 최초 정기 임대차 계약이 1년 이상일 경우, 묵시적 갱신에 의해 형성되는 임대차는 1년까지밖에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존 계약이 5년짜리였다 하더라도 새로 형성되는 계약기간은 1년인 셈이다. 만약 세입자가 임대 계약 종료 이후에 고의적 혹은 악의적으로 잔류할 경우, 임대인은 세입자로부터 기존 임대료의 두배를 받을 권리가 있다.

임대인이 불법 잔류한 세입자를 세입자로 계속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임대차가 묵시적으로 갱신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만약 매월 임대료를 수령했다면, 이는 월단위 기간제 임대차가 형성된 것으로 간주된다. 일단 월단위 기간제 임대차가 형성되면, 임대인의 30일의 계약해지 통보가 있을 때까지 무제한으로 임대 기간이 지속된다. 만약 최초 임대 계약서에 별도의 조항이 없다면, 불법 잔류 임차인이 기존의 정기 임대차 계약을 다시 묵시적으로 갱신받느냐 아니면 월단위 기간제 계약을 새롭게 받느냐에 대한 판단이 쉽지 않다. 이럴 경우 법원은 임차인의 행위보다는 임대인의 의도나 행위를 더 중시 여긴다. 따라서, ‘정’ 문화가 깊히 뿌리박혀있는 한국에서는 “좋은게 좋은거지” 식의 불명확한 계약이 자주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법적 분쟁이 발생했을 때 오히려 이를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어찌보면 한국에 비해 ‘정’이 부족한(?) 미국은, 이런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임대인의 의도가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임대계약서를 늘 사용한다. 즉, 대부분의 임대 계약서를 보면, 계약 만료 후 잔류 임차인이 발생할 경우, 임대차 묵시적 갱신을 통한 정기 임대차가 형성되지 아니하고 월단위 기간제 임대차가 자동으로 형성된다고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