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1세대 여성, 세계 간호계의 이정표가 되다
1966년 도미, 간호사에서 생리학 박사·UIC 교수로…
UIC 간호대 학장·연구담당 부총장 겸 대학원장으로 연구 역량 이끌어
국제한인간호재단 설립, 후배 간호학자 양성과 국제 리더십 개발
르완다 조이센터로 이어진 신앙과 섬김의 제2막
[편집자주]
시카고 한인사회는 낯선 땅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각자의 자리에서 길을 낸 1세대 이민자들의 도전과 헌신 위에 세워졌다. 한국일보와 WINTV는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연재를 통해 한인사회의 기반을 다진 인물들의 생애와 발자취를 기록한다. 이번 인물은 UIC 간호대학장과 연구담당 부총장 겸 대학원장을 지낸 김미자 박사다. 현장 간호사에서 연구자, 교육자, 대학 행정가, 국제 간호 리더로 걸어온 그의 삶을 따라가 본다.
김미자 박사의 이름 앞에는 미국간호 아카데미가 선정한 ‘살아있는 전설(Living Legend Award)’, UIC 연구담당 부총장 겸 대학원장 등 수많은 직함과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이러한 이력으로 먼저 설명하지 않는다. 김 박사는 “내 모든 길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간호하며 돌보는 마음이었다”고 말한다.
1940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과 함께 격동의 유년기를 보냈다. 당시 대구 사과 등을 중국에 수출하는 무역업을 하던 부모님이 업무차 서울에 머무는 동안 38선이 그어지며 생이별을 겪었다. 어린 나이에 이모 등에 업혀 피란길에 올랐고, 서울에 도착 후 기적적으로 부모님과 상봉했지만, 6·25 전쟁은 가족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김 박사는 “전쟁 이후 무너진 가정의 기반을 지켜보며 일찍 철이 들었다”며 “그때 배운 책임감이 평생을 버티게 한 힘이 됐다”고 말했다.
서울 효제국민학교와 대구 피란중학교를 거쳐 이화여중·고에 진학한 것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공부는 물론 탁구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할 정도로 다재다능했던 그는 특히 과학과 외국어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이 세운 이화여중·고에서 원어민 교사들에게 배운 실용 영어는 훗날 세계 무대를 누빌 든든한 자산이 됐다.
◇ “환자 곁에 가장 가까운 사람”
김 박사의 집안은 본래 불교와 무속적 색채가 짙었으나, 이화여중 시절 접한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김 박사는 “미국 선교사의 인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신앙을 통해 삶의 목적이 ‘나’에서 ‘남’을 돕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간호사의 길을 택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고교 시절 병상에 누운 아버지와 삼촌을 돌보던 간호사들의 모습에서 그는 ‘천사’를 보았다. 당시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법대나 의대 진학도 충분했지만, 환자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고 싶어 간호대를 택했다. 기숙사와 식사가 제공되는 연세대 간호대학을 선택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으나, 그 선택은 곧 평생의 소명이 됐다.
대학 시절부터 리더십은 독보적이었다. 전국 간호학생회 회장을 지냈고, 1961년에는 한국 학생 대표로 호주 멜버른 국제간호협의회(ICN) 회의에 참가했다. 김 박사는 “국제무대에서 간호 리더십의 무한한 가능성을 처음으로 목격한 소중한 계기였다”고 회상했다.
1962년 연세대 간호대학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한 그는 간호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일임을 배웠다. 이후 주한미국대사관과 USOM(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헬스 유닛에서 근무하며 미국인 직원과 가족들의 건강을 돌봤다. 당시 귀했던 항생제와 다양한 의약품을 다룬 이 경험은 그에게 국제 보건의 감각을 익히게 한 준비의 시간이었다. 김 박사는 “현장에서 간호의 본질을 깨달았고, 대사관 근무를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낯선 땅에서 다시 시작한 간호사의 길
1964년 김 박사는 기독교 청년 모임에서 만난 고(故) 김흥수 목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듬해 첫아이를 얻은 부부는 1966년 남편의 학업과 목회 소명을 따라 미국 일리노이주 트리니티 신학교로 향했다.
미국 정착은 곧바로 현실이 됐다. 주한미국대사관 시절의 인연으로 초기 거처를 마련한 그는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레이크포레스트 병원으로 출근했다.
한국에서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문화, 시스템의 장벽은 높았다. 환자를 대하는 방식부터 전문직 간 역할 분담, 상세한 기록 업무까지 모든 것을 새로 익혀야 했다. 김 박사는 “당시에는 전문간호사 제도도 지금처럼 뚜렷하지 않았다”며 “일반 병동의 스태프 간호사로 일하며 미국 의료 현장을 몸으로 배웠다”고 설명했다. 이후 하이랜드파크 병원 등을 거치며 미국 의료 현장에 적응해 나갔다.
일터 밖의 일상 역시 모든 것이 새로웠다. 김 박사는 “1960년대 한국 가정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냉장고와 전화, 텔레비전까지 일상의 물건 하나하나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냉장고 사용법을 몰라서 남편이 아이스크림을 엉뚱한 칸에 넣었다가 몽땅 녹여버린 일도 있었다”며 소박했던 옛 기억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첫 차에 대한 기억 역시 생생하다. 중고차를 마련한 첫날, 부부는 행여 누가 훔쳐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밤새 창밖을 살피며 차의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운전이 미숙했던 탓에 고속도로에 잘못 진입했다가 경찰의 안내를 받아 위기를 넘긴 아찔한 순간도 기억으로 남았다.
특히 1967년 시카고 대폭설 당시의 일화는 잊지 못할 감동이다. 모든 차량이 길가에 고립된 상황에서, 한 여성이 말을 타고 나타나 김 박사를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준 것이다. 김 박사는 “모든 것이 생경하고 놀라운 나날이었지만, 타향에서 만난 이들의 따뜻한 호의는 우리 가족이 미국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한 가장 큰 동력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이민자의 현실 속에서 다시 배우고, 적응하고, 자신의 길을 넓혀갔다.
◇ 간호사에서 생리학 박사로
미국 병원 현장에서 근무하며 김 박사는 학문적 깊이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남편 김흥수 목사가 미국 최초의 이중언어 교회인 펠로십교회를 개척한 뒤, 아내에게 “이제 당신도 공부를 시작하라”고 권유한 것이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됐다.
애초 석사과정을 계획했으나 일리노이대 면접관은 그의 임상 경험을 높이 평가해 박사과정 직행을 권했다. 전공은 간호학 대신 생리학을 택했다. 환자의 신체와 질병을 과학적으로 완벽히 이해해야 수준 높은 간호 연구와 교육이 가능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1971년, 연방정부 장학금을 받으며 시작한 공부는 혹독했다. 250여 명의 의대생과 경쟁하며 생화학 등을 수강해야 했고, 첫 학기에는 일생 처음으로 C학점을 받아 좌절하기도 했다. 김 박사는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지도교수의 격려가 나를 붙들었다”고 회상했다.
연구자의 길은 험난했다. 졸업을 위해 생소한 동물실험과 수술 방법론을 새로 익혀야 했다. 고군분투 끝에 4년 만에 학위를 마치자, 지도교수는 의사 면허(MD) 취득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김 박사는 “의사가 되기보다 간호학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다”며 “환자 곁을 지키는 간호사로서의 철학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UIC 강단에 선 한인 여성 학자
1975년 UIC 간호대학 교수로 임용된 김미자 박사에게 강의는 일종의 시험대였다. 그는 어려운 생리학 개념을 간호 현장과 연결해 명쾌하게 풀어냈고, 이는 학생들의 뜨거운 호응과 훗날 ‘우수 교수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미국 주류 학계의 벽은 높았다. 이민자 여성을 향한 차별과 편견이 존재했지만, 그는 실력으로 승부했다. 김 박사는 “낯선 이름과 언어의 장벽이 있었지만, 학생을 잘 가르치고 연구 성과로 증명하면 결국 인정받을 것이라 믿었다”라며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로 임했다”고 말했다.
연구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성과를 냈다. 만성폐쇄성폐질환(COPD) 환자의 호흡근 연구에 매진한 그는 독창적인 연구 방법론을 개발했다. 하버드와 클리블랜드 의대 교수들이 기술을 배우러 올 정도였고, 국립보건원(NIH)으로부터 거액의 연구비를 유치하며 간호학의 과학적 토대를 증명했다. 김 박사는 170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1,200만 달러 이상의 연구기금을 유치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일리노이대 동문연합으로부터 ‘평생 공로상(Alumni Achievement Award)’을 수상했다.
교육자로서 그는 늘 ‘기본’을 강조했다. “기본을 마스터하는 훈련, 목적을 향해 끝까지 달려가는 태도가 결국 비상을 위한 날개가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 간호대 학장에서 UIC 연구담당 부총장까지
김 박사의 리더십은 강의실과 연구실을 넘어 대학 행정으로 확장됐다. 그는 1989년부터 1995년까지 UIC 간호대학장을 지냈고, 1995년부터 1999년까지 UIC 연구담당 부총장 겸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두 직책 모두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한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친 자리였다. 김 박사는 “주변의 권유와 동료 학장들의 신뢰가 나를 그 자리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간호학 출신 여성이 대규모 연구 중심 대학의 부총장직에 오른 것은 당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의과대학을 비롯한 일부의 견제와 반대도 있었지만, 그는 실질적인 성과로 입지를 다졌다. 부총장 부임 후 총장에게 특별 연구지원금을 이끌어냈고, 공정한 심사 구조를 도입해 학문 간 공동연구를 활성화했다.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UIC를 미국 연구중심대학 순위 72위권에서 50위권 내로 진입시키는 것이었다. 김 박사는 “4년 뒤 실제로 그 목표가 달성됐을 때, 대학 행정가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대학원장으로서 14개 단과대학 교수들의 승진과 정년보장(테뉴어) 심사를 총괄하며 그는 공정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도 힘썼다. 이는 단순한 행정이 아니라 연구자의 미래와 대학의 방향을 결정하는 막중한 책임이었다. 김 박사는 “리더십의 핵심은 신뢰이며, 구성원들이 리더의 판단을 믿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활동은 대학 울타리에만 머물지 않았다. 클린턴 정부 시절 국가건강정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국립간호연구원 국가자문위원 등을 지내며 보건 정책과 간호 전문직의 위상을 높이는 데 헌신했다. 김 박사는 “간호학자가 정책의 현장에서 목소리를 내야 환자 돌봄의 질과 제도가 바뀔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간호계의 살아있는 전설
김 박사는 한인 간호사 후배들이 미국 땅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일에도 큰 힘을 보탰다. 1970년대 중반, 박사과정의 바쁜 일과 중에도 저녁마다 애슐랜드의 한 성당을 찾아 한인 간호사들을 위한 ‘RN 면허 준비반’을 자원봉사로 운영했다.
김 박사는 “낮에는 연구하고 밤에는 후배들을 가르치는 강행군이었지만, 고생하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훗날 식료품점에서 만난 간호사들이 건넨 감사 인사는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이 됐다.
이러한 후배 사랑은 2003년 국제한인간호재단(GKNF) 설립으로 이어졌다. 해외 간호 이민 50주년 행사에서 그는 미국 내 한인 간호학 교수들과 연구자들에게 후배들의 유학과 연구를 돕자고 제안했다. 현장에서 30여 명이 각각 1천 달러를 내며 시드머니가 마련됐고, 이는 GKNF(gknfusa.org) 창립의 밑거름이 됐다. 이후 김 박사는 본인 이름으로 매년 1만 달러의 연구지원금을 지난 8년 동안 기탁하며 후배들의 학문적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2005년부터는 미국 간호사 면허시험(NCLEX-RN)의 한국 유치를 위해 힘을 보탰고, 한국에서도 시험을 볼 수 있는 길을 여는 데 기여했다. 그는 “우리 세대는 미국에 와서 병원에서 일하면서 어렵게 공부했지만, 후배들에게까지 그런 고통을 안겨줄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재단 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의 멘토십은 간호계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2007년 8월에는 시카고 한인여성회의 초청으로 ‘청소년 지도자 훈련 교실’ 강사로 나선 그는 션 코비(Sean Covey)의 저서 ‘성공하는 10대들의 7가지 습관’을 바탕으로 한인 청소년들에게 리더십과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전했다.
김 박사의 영향력은 한국과 미국을 넘어 세계 무대로 확장됐다. 그는 UIC에서 국제 간호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을 이끌며 한국, 중국, 르완다 등 여러 나라의 간호교육과 보건 리더십 향상에 기여했다. 세계보건기구(WHO) 간호·조산 협력센터 글로벌 네트워크 활동에도 참여하며 국제 간호 리더십을 넓혔다. 2001년 풀브라이트 교환교수로 모국을 찾았을 때는 수십 차례 강연을 통해 한국 간호의 전문직화와 정책 참여를 강조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미국간호학술원의 ‘살아있는 전설(Living Legend Award)’에 선정됐고, 영국 왕립간호대학 명예 펠로우로 추대됐다. 또한 시카고 트리뷴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연세대는 그를 ‘연세를 빛낸 동문’으로 기렸다. 일리노이대 동문연합이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졸업생 공로상(Alumni Achievement Award)’에도 그의 이름이 더해졌다. 그에게 수많은 수상은 개인의 영예가 아니라, 한국 간호사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후배들을 위한 더 넓은 길을 닦아온 자취였다.
◇ 르완다에서 이어진 제2의 섬김
김 박사에게 은퇴는 멈춤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르완다와의 인연은 클린턴 헬스 액세스 이니셔티브(Clinton Health Access Initiative, CHAI)와의 협력으로 시작됐다. 김 박사는 2014년부터 1년간 르완다 의과대학 교수진의 교육과 연구 역량 강화를 지원하고, 연구실 설립을 맡았다.
그 인연은 이후 남편 고 김흥수 목사와 함께한 선교와 교육 사역으로 확장됐다. 부부는 르완다에서 교육과 선교, 직업훈련을 통한 자립 지원 사역을 시작했고, 2014년 조이미션스 인터내셔널(www.joymissions.org)을 설립했다. 이어 르완다 키갈리 인근에 조이센터(JOY Center)를 세우며 현지 주민들과 아이들을 위한 사역의 기반을 마련했다.
조이센터에서는 장학 지원을 비롯해 컴퓨터, 용접, 목공 등 기술교육과 영양실조 아동 급식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현지인들의 자립을 돕고 있다. 김 박사는 “교육과 기술을 통해 스스로 설 수 있게 돕는 일은 평생 실천해온 섬김의 연장선”이라고 설명했다.
몇 해 전 평생의 동반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지만, 부부가 함께 품었던 꿈은 멈추지 않았다. 현재는 뉴욕의 대형 로펌 파트너 변호사인 딸 윤희 씨와 글로벌 기업 임원인 아들 준석 씨가 부모의 뜻을 이어 사역에 함께하고 있다. 김 박사는 “남편은 떠났지만 자녀들과 함께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며 “가족은 내가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가장 큰 버팀목”이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 시대를 앞서간 개척자, 후배들을 위해 남긴 길
김 박사의 명함에는 PhD, RN, FRCN, FAAN 등 최고 권위의 학위와 직함이 빼곡히 붙는다. 그러나 그는 다양한 이력보다 ‘삶의 방향과 지향점’을 강조한다. 김 박사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돕는다는 마음이 간호와 연구, 그리고 제자 양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쉽게 성공하는 지름길을 권하지 않는다. 대신 기본을 익히고 실력을 길러 누구에게나 신뢰받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한다. 김 박사는 “빠르게 올라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배운 것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배움을 다시 남에게 나누는 일”이라며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태도가 결국 비상할 수 있는 날개가 되어줄 것”이라고 조언했다.
세계 간호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김미자 박사. 낯선 땅의 작은 씨앗에서 시카고의 거목으로 성장하기까지, 그의 삶은 이민 1세대 한인 여성이 신앙과 섬김으로 미국 주류사회와 세계 간호계에 세운 거대한 이정표였다. 그가 닦아온 이 길은 이제 시카고 한인사를 넘어, 후배들의 앞길을 비추는 영원한 등불로 새겨지고 있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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