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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May 2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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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15] 1만 건 수술, 의료소송 0… ‘신의 손’ 김성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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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의료 인생을 걸어온 김성원 박사. 시카고 한인로타리클럽 초대 회장과 시카고한인회 이사·부이사장으로 활동하며 봉사와 선교의 길을 이어왔다. <사진 윤연주 기자>

45년 외과의 길… 의술을 사명으로 품다
대를 이은 기독교 신앙으로 빚은 ‘인술(仁術)’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라”
로타리·선교·한인사회 봉사 이어가

[편집자주] 시카고 한인사회는 낯선 땅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각자의 자리에서 길을 낸 1세대 이민자들의 도전과 헌신 위에 세워졌다. 한국일보와 WINTV는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연재를 통해 한인사회의 기반을 다진 인물들의 생애와 발자취를 기록한다. 이번 인물은 45년 동안 시카고 의료 현장을 지켜온 일반외과 전문의 김성원 박사다. 수술실에서 생명을 마주하고, 은퇴 후 선교와 봉사로 공동체를 섬겨온 그의 삶을 따라가 본다.

사진 왼쪽: 198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외과학회 회원(FACS) 자격을 취득했다. 오른쪽: 미국 병원 근무 초기, 회복실에서 환자 차트를 작성하던 모습.

김성원 박사의 의료 인생에는 수많은 수술 환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췌장암 환자의 수술은 그에게 의술의 한계와 신앙의 의미를 동시에 깨닫게 한 결정적 순간으로 남아 있다.

일반외과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췌장암 수술이었다. 췌장과 담도, 장기를 절제하고 다시 이어 붙여야 하는 수술은 보통 5~6시간이 걸렸다. 김 박사는 “그날 수술은 예상보다 순조로웠고, 잘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며칠 뒤 환자에게 생각지 못한 합병증이 찾아왔다. 장기를 연결한 부위가 새기 시작하면서 췌장 효소가 흘러나왔고, 환자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됐다. 다시 배를 열었지만, 의사의 손으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순간 김 박사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이제는 없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그는 “그때 의사로서의 자신감이 완전히 무너지고, 인간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환자는 회복했다. 한 달 뒤, 사선을 넘나들던 환자는 제 발로 걸어서 퇴원했다. 그 경험은 김 박사의 의료 인생을 바꿔 놓았다.

“수술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45년 의료 인생 동안 그가 붙든 의술의 중심에는 늘 이 고백이 있었다.

◇ 5대째 이어진 믿음의 집안

김 박사의 집안은 대대로 기독교 신앙을 이어온 가정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에 온 라이언 선교사를 통해 1923년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초창기 기독교인이었다. 김 박사는 “할아버지는 예수를 믿은 뒤 평생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으셨던 분”이라며 “친가와 외가 모두 장로와 목회자가 많이 나온 믿음의 집안이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1941년 경북 영일군 기계면에서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농기구 제작·판매업과 과수원, 농사를 함께 일구며 지역에서 신망을 얻은 마을의 유지였다. 아버지 역시 사업을 해 한때 집안은 넉넉했다.

포항중학교 재학 당시 모습.

그러나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의 혼란은 가족의 삶을 크게 흔들었다. 1949년 무렵 산에 있던 좌익 세력이 마을로 내려와 주민들을 위협했고, 김 박사의 아버지는 마을 경비를 서다 큰 공격을 당했다. 이 사건 이후 가족은 고향을 떠나 포항으로 이주했다. 새로 잡은 터전은 포항제일교회 바로 길 건너편이었다.

어린 김성원에게 교회는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삶의 일부였다.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 주일예배, 늘 목회자와 장로들이 드나들던 집안 분위기 속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았다.

◇ 개구쟁이에서 전교 1등이 되다

포항에서 보낸 어린 시절, 김성원 박사의 삶은 교회와 맞닿아 있었다. 그곳에서 훗날 대통령이 된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이어졌다. 두 사람은 유년 시절 주일학교를 통해 가까워졌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친분을 이어갔다. 김 박사는 그 시절을 “신앙 공동체 안에서 맺어진 오래된 인연”으로 말했다.

1990년대 후반, 오랜 우정을 이어온 이명박 전 대통령 내외와 김성원 박사 부부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어린 시절의 김 박사는 처음부터 모범생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뛰어놀기를 좋아하는 개구쟁이에 가까웠다. 공부에 눈을 뜬 것은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이었다. 형에게 알파벳을 배우며 기초를 닦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부에 몰두했다. 이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장난기 많던 소년이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가족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었다. 대가족의 중심에는 어머니의 헌신이 있었다. 김 박사는 “어머니는 10남매를 포함해 매 끼니 20여 명의 밥상을 차리면서도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으셨던 분”이라며 “항상 정결하시고 지혜로운 신앙의 어머니였다”고 말했다.

큰형의 희생도 김 박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성균관대 약학과를 졸업한 큰형은 포항에서 ‘고바우 약국’을 운영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동생들의 학업을 뒷받침했다.

김 박사는 “큰형님이 약국을 열 무렵 홍콩 플루가 유행했는데, 형님이 직접 제조한 약이 잘 듣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줄을 지었고, 약국이 크게 번성했다”고 말했다. 이어 “큰형님 덕분에 우리 형제들이 모두 대학 공부를 할 수 있었다”며 “형님이 먼저 동생들을 공부시켰고, 나도 의사가 된 뒤에는 남은 동생들의 학비를 도우며 형제자매가 서로를 붙들고 살았다”고 덧붙였다.

김 박사의 큰형이 포항에서 운영했던 ‘고바우 약국’의 1977년 당시 전경. <사진=포항시 제공>

◇ “진짜 의사의 손길이 필요한 곳”

김 박사가 의학, 그중에서도 외과를 선택한 배경에는 당시 한국의 척박한 의료 현실이 있었다. 병원 문턱이 높던 시절, 서민들은 아프면 먼저 동네 약국을 찾았다. 약국이 사실상 1차 진료소 역할을 하던 때였다. 그러나 약으로 해결할 수 없는 중증 질환, 사람의 몸을 열어 병근을 도려내야 하는 병은 외과의 영역이었다.

그는 “약사가 할 수 없는 것이 외과였다”며 “진짜 의사의 손길이 필요한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주변 선배들이 힘든 외과 대신 다른 전공을 권하기도 했지만 뜻을 꺾지 않았다.

경북의대를 졸업한 뒤 그는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미국행을 준비했다. 목적은 큰 성공이 아니었다. 더 넓은 곳에서 선진 의술을 배우고,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와 그 배움을 나누고 어려운 환자들을 돕겠다는 계획이었다.

1970년 미국 이민을 떠나기 전, 부산 해운대에서 부인 김윤자 여사, 딸과 함께.

◇ 미국 도착 다음 날, 낯선 병원 당직

1970년 10월 27일, 청년 김성원은 일본과 시애틀을 거쳐 24시간의 비행 끝에 시카고 땅을 밟았다. 이국땅의 감상에 젖을 여유도 없이 도착 다음 날 아침,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첫날 인사를 하려고 닥터 오피스에 들어서자마자 “너가 오늘 당직(On-call) 근무를 서야 한다”는 뜻밖의 지시가 떨어졌다. 미국에 도착한 지 단 하루 만에 맞닥뜨린 현실이었다.

미국 병원 시스템은 낯설었고, 영어는 마음처럼 들리지 않았다. 병동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렸고, 빠른 미국식 영어와 필리핀계 간호사들의 억양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는 어느 병동에 응급 상황이 터졌는지 파악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틈도 없이 병원 계단을 층마다 뛰어다니며 환자들을 직접 확인했다.

김 박사는 “선진 의학을 공부하러 왔는데 처음에는 이방인에게 궂은일만 시킨다는 서러움이 컸다”며 “배우러 온 의사에게 가르쳐주지 않고 노동만 시킨다는 생각에 병원 책임자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서툰 영어 편지였지만 그의 진심과 열정이 통한 덕분에, 이후 더 좋은 수련 환경을 갖춘 레이븐스우드 병원(Ravenswood Hospital Medical Center)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외과 수련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비는 계속됐다. 베트남 전쟁 종전 여파로 미국 전역의 외과 프로그램이 축소되면서 수련 과정이 중단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때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한 성형외과 의사의 추천으로 다른 병원의 외과 자리가 극적으로 연결됐다. 김 박사는 “낙심하지 않고 묵묵히 걸을 때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두신 길을 열어주셨다”며 “지나온 그 순간들을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딸이 20대였을 당시 함께 촬영한 사진.

당시 언어의 장벽은 높았지만, 성실함은 통했다. 매일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해 환자 상태를 살폈고, 주임 의사의 회진에 맞춰 정확한 보고를 하기 위해 밤을 새워 공부했다. 미국인 동료와 상사들은 유창한 영어 실력보다 그의 책임감과 환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았다. 그것이 한국인 의사가 미국 주류 의료계의 벽을 넘어 뿌리내릴 수 있었던 힘이었다.

◇ 1만 건 수술과 ‘소송 전무’의 기적

1978년 일반외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김성원 박사는 1979년부터 시카고 서부 교외 멜로즈 파크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건 ‘김성원 외과’를 개원했다. 그는 2006년까지 ‘솔로 프랙티스(Solo General Surgery Practice)’ 형태로 일반외과 진료와 수술을 이어갔으며, 가틀립 메모리얼 병원(Gottlieb Memorial Hospital)과 웨스트레이크 메디컬 센터(Westlake Medical Center) 등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그를 찾는 환자 대다수는 이탈리아계, 독일계, 히스패닉 등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미국 현지인들이었다. 텃세가 심한 미국 주류 사회에서 한국인 의사로서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그는 자신을 더욱 엄격하게 다잡았다. 1982년에는 외과의사로서 최고의 명예인 미국외과학회 회원(FACS) 자격을 취득하며 전문성을 공고히 인정받았다.

가틀립 메모리얼 병원(Gottlieb Memorial Hospital)에서 25년 장기 근속 기념패를 받은 후 동료들과 함께한 김성원 박사.

2006년 일반외과 수술 메스를 내려놓은 뒤에도 로욜라 상처치료센터에서 환자 돌봄을 이어갔으며, 2016년 최종 은퇴하기까지 약 45년간 의료 현장을 지켰다. 그가 집도한 크고 작은 수술은 1만 건에 달한다. 미국 의료계에서 외과는 의료소송 위험이 높은 분야로 꼽히지만, 그는 평생 단 한 번의 의료소송도 겪지 않았다.

그는 “내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매번 환자의 몸을 열 때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이 손을 붙잡아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라며 “환자는 단순히 고쳐야 할 질병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생명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기에 더 조심하고 겸손할 수밖에 없었다”라며 “환자의 작은 신음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고 덧붙였다.

◇ 한국행을 접고 시카고에 남다

김 박사의 원래 계획은 미국에서 수련한 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포항 가족들을 통해 고향에서 병원으로 쓸 건물까지 준비해 둔 상태였고, 1980년대 초까지도 한국행에 대한 마음은 강했다. 미군 군의관으로 자원해 한국 근무를 신청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추진했고,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장교 계급 제안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가족이었다. 미국에서 자란 자녀들은 이미 미국 생활에 익숙했고, 한국행을 힘들어했다. 밤낮없이 병원 일에 매달리느라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미안함도 가슴 한구석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그는 아내 김윤자 여사와 상의 끝에 오랜 꿈이었던 귀국 계획을 내려놓고 시카고에 남기로 결심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아내 김윤자 여사와 함께한 모습.

그는 “지나고 보니 그 선택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며 “시카고에 남으며 더 많은 환자를 만나고, 더 넓은 봉사의 길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민 의사의 긴 시간을 묵묵히 지탱해 준 버팀목은 아내 김윤자 여사였다. 신앙 안에서 만난 두 사람은 결혼 후 미국 이민과 수련, 개업과 병원 생활의 험난한 시간을 함께 지나왔다.

부부의 눈물 어린 기도로 자란 1남 2녀의 자녀들은 의료계와 금융계 등에서 훌륭하게 장성했다. 큰딸 제니퍼 씨는 산부인과 의사로 활동 중이며, 사위 역시 마취과 의사다. 둘째 딸 세라 씨는 약사로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지역에서 연방 식품의약국(FDA)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둘째 사위는 심장전문의로 일하고 있다. 하버드대를 거쳐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을 졸업한 막내아들 데이빗 씨는 의사 대신 금융·펀드 관련 사업가의 길을 택해 큰 성과를 거두고 조기 은퇴했다.

김 박사에게 가족은 자랑의 목록이 아니라 기도의 제목이다. 그는 “자녀와 손주들이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이웃을 섬기는 정직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며 “신앙은 말보다 부모가 살아가는 뒷모습으로 전해진다”고 말했다.

1923년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할아버지 대부터 시작해 손주 세대까지 5대째 굳건하게 이어져 온 기독교 신앙의 유산은 김 박사 가정을 지탱하는 가장 큰 뿌리이자 축복의 통로다.

◇ 섬김의 손길은 멈추지 않는다

김성원 박사의 삶은 병원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외과의사로 일하는 동안 시카고한인의사회 활동에도 참여하며 한인 의료인들과 교류했고, 지역사회 속에서 의료인이 감당해야 할 역할을 고민해왔다.

한인사회 봉사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008년 시카고 한인로타리클럽 창립 때였다. 당시 국제로타리 회장이던 이동건 회장과의 인연으로 창립 모임에 참석한 그는 현장에서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김 박사는 당시를 떠올리며 “그 자리에서 회장직을 덮어쓴 셈”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한번 책임을 맡자, 그의 추진력과 책임감이 발동했다. 56명의 발기인으로 시작된 초기 모임은 매주 월요일 이른 아침마다 노스브룩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호텔 모임 특성상 참석 인원이 적으면 재정적 부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 박사는 매주 회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참석을 독려하며 모임의 기틀이 흔들리지 않도록 힘썼다.

김성원 박사가 2008~2009년 시카고랜드 한인로타리클럽 회장으로 활동하며 받은 기념패.

그는 “사람을 이끌 때는 남의 결점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리더가 먼저 희생하고 지갑을 열지 않으면 단체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시카고에서 시작된 봉사는 국제봉사로도 이어졌다. 김 박사는 로타리를 통해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의 홍역 퇴치 캠페인에 참여했고, 남미 지역의 오염된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수 필터 공급 사업에도 함께했다. 그에게 의료봉사와 구호, 선교는 모두 하나님께 받은 재능과 자원을 이웃에게 돌려주는 하나의 섬김이었다.

신앙을 바탕으로 한 후원도 계속됐다. 병원 근무 시절 밥퍼나눔운동본부 최일도 목사와 인연을 맺은 김 박사는 서울 청량리의 천사병원을 찾은 뒤 후원을 약속했고, 지금까지 꾸준히 재정적 지원을 이어오고 있다. 은퇴 후에는 도미니카공화국 선교를 다녀온 뒤 자녀들과 함께 선교헌금을 모아 현지 교회 두 곳을 마련하는 데 힘을 보탰고, 터키 선교에도 참여했다.

나이가 들면서 먼 선교지를 직접 방문하기는 어려워졌지만, 그의 섬김은 멈추지 않는다. 김 박사는 기도와 물질적 후원 역시 현장을 지키는 선교만큼 소중한 사명이라며, 지금도 조용히 후원을 이어가고 있다.

2010년경 청와대를 방문해 오랜 친구인 이명박 대통령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 머무는 자리에서 정직·성실하라

은퇴 후에도 김성원 박사의 발걸음은 한인사회 안에 머물러 있다. 그는 시카고한인회 이사와 부이사장으로 활동하며, 한인 커뮤니티가 다음 세대를 위해 더 건강하게 뿌리내려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지난 2월 열린 ‘2026 아시안 음력 설 갈라’에서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AACC 커뮤니티 서비스 어워드를 수상했다. 미국 주류 의료계에서 한인 의사로 위상을 세우고, 선교와 한인사회 봉사로 섬김을 이어온 삶에 대한 헌사였다.

김 박사가 차세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분명하다. 먼저 뿌리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한인 2세, 3세들이 미국 사회 안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되, 자신이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뿌리는 혈통이나 언어만을 뜻하지 않는다. 부모와 조부모 세대가 어떤 어려움 속에서 이민의 길을 걸었고, 어떤 희생으로 오늘을 만들었는지를 기억하는 일이다. 그리고 믿음의 유산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의 손주 세대까지 5대째 믿음을 이어온 그의 집안 뿌리는 곧 신앙이기도 했다.

그가 강조하는 또 다른 가치는 정직과 성실이다. 김 박사는 미국 의료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특별한 지름길을 찾지 않았다. 영어가 부족했던 이민 초창기에는 남들보다 더 일찍 병원으로 향했고 더 철저히 준비하며 부딪쳤다.

2025년 11월 1일자 『주간한국』에 소개된 김성원 박사.

그는 후배와 다음 세대들을 향해 “지름길을 찾지 말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라”고 조언했다. 묵묵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결국에는 진심을 인정받게 된다는, 먼저 길을 걸어간 개척자 의사의 묵직한 당부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그는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지 않았다. 김 박사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계획하기보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고 싶다”며 ”몸이 허락하는 한 선교지로 향하고, 직접 가지 못하더라도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45년 동안 수술실을 지킨 손은 이제 메스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김성원 박사에게 의술은 직업이기 전에 부르심이었고, 봉사는 믿음의 열매였다. 환자의 생명을 살리던 그의 사명은 이제 한인사회와 선교지, 그리고 다음 세대를 향한 조용한 섬김으로 이어지고 있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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