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소녀상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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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봉완 박사(워싱톤 정신대 대책위원회 이사/고문 시카고 소녀상 건립 대책 위원회 회원)

 

미국의 3대 도시 시카고, 진보적인 일리노이주의 최대도시인 시카고에서는 아직도 소녀상 건립이 안되고 있다. 3년 반전 제 31대 시카고 한인회 회장단이 시작하여, 5만여불의 모금을 하고, 소녀상을 구입하였건만, 아직 아무 진전이 없이 소녀상은 어느 곳에 보관되어 햇빛을 못보고 있다. 왜, 소녀상 건립이 이렇게 힘들까 생각해 본다. 만일 위안부 기념을 소녀상이 아닌 평범한 기념비로 했으면 더 쉬웠을까하는 생각도 해 본다. 소녀상이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키게 하나, 가해자 사람들에 죄책감을 일으키나, 동정감을 솟아내게 하나, 생각도 해본다. 이에 답을 위하여 조각가들의 취지는 무엇이었으며, 이 조각 건립후 일반인들의 반응이 어떠하였는가 하는데 대하여 몇자 써본다.

필자는 7월 3-12 일 9일간 인도를 다녀왔다. 처음의 3일은 아세아 학회 5차 하기 학회가 아쇼카 대학 주최로 뉴델리에서 1000 명 가까이의 학자들이 140여국에서 모인 회의 였다.  필자는 “위안부와 국내 정치” 라는 제목의 패널을 조직, 최어 역활, 1 편 논문의 토론자로서 참석했다. 이 패널에는 미국에서 4명 한국에서 2명의 학자가 모여, 논문 4편을 발표하고 분석하였다. 위안부의 존재가 폭로되고,  생존자들이 나타나면서, 그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인권 복귀 운동이 시작된지 26년이 지났으나, 이문제가 관련된 나라의 국내 정치에 끼친 상황에 대하여서는 학술적으로 분석한 예가 많지 않다. 그 공간을 채우려, 이 제목을 제안하여, 위안부 문제와 국내정치에 대하여 연구 하고 발표할 기회를 만들어, 국제 학회에 등장하여 4개국(중국, 일본, 한국 필입핀) 의 국내 정치에 대한 논문을 4 학자가 발표했다. 참석한 학자들은 중국태생 1명, 일본 태생1명, 필립핀 태생 1명, 본인을 포함한 한국태생 3명이었다.

그중에 서울 소재 중앙대학교 사회학과의 이나영 교수는 “민주주의 운동과 분열: 미래지향적 책임계승으로서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운동”이라는 제목하에 논문을 발표했다. 회의 직전에 이 교수는 13 페이지의 한글 로 쓰인 논문을 패널 조직자인 나에게 보내왔다. 이중에서 제 3부의 “평화의 소녀상”에 대하여 감동적인 논문을 집필했는데 그것의 부분을 줄여서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소녀상(평화상)은 2011년 12월 14일 1000차 위안부 수요시위를 기념해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졌는데 이것은 오랜 기간의 염원과 계획의 성과였다. 이 계획은 민주화운동에 침가하고, 꾸준히 평화와 인권 문제에 관한 작품을 발표해 오던 조각가 김서경, 김운선 부부의 자발적인 참가로 이루어졌다. 이나영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어떻게 하여 소녀상이 궁극적 형태를 이루게 되었는 가에 대하여 김 조각가 부부의 회상을 적었다. 애당초 비석 형태로 제작하려 했으나, 할머니들의 생활과 내용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느껴 조각으로 형성하게 되었다며, 부부 조각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할머니들의 고통의 역사까지 담고 싶었어요. 이고통의 시간을 통해서 여성 운동가, 평화 운동가 가 되었는데, 오래전 고통당했던 시절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보는 사람들이) “아, 끌려가서 이런 수모를 당했구나,” 하고 역사를 상상 할수 있도록 “고리” 를 만든 것이죠.

사람들과 의사 소통이 가능한 모양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나였다면, 만약 나의 언니나 동생이였다면, 내딸이였다면…”하는 상상을 일으키는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완성된 소녀상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소녀상의 자세에 대하여, CNN을 포함한 여러 미디아에서 자세히 보도 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 교수의 언어를 추려 쓴다.] 처음에 얌전하게 펴있던 손을 단호하게 주먹을 쥐게 한 것은 제작 중 일본 정부가 소녀상 설치를 불편해 한다는 보도가 나왔기 때문이다. 당기머리를 허틀어진 단발머리로 바꾼 것은 가족과 고향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어깨위의 새는 평화의 자유, 맨발은 험한 생활을 상징하고 땅에 닫지못한 헐은 발뒤꿈치는 사회의 편견과 정부의 무관으로 귀향후에도 정착못했음을 의미한다. 밑의 글림자는 소녀가 아니라 할머니다. 할머니 가슴에 품은 나비는 소녀의 원망과 한이 겹겹이 싸인 세월의 그림자를 형상화한 것이자, 흩어진 이들의 상처와 희망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다. 소녀는 비록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만, 먼저 세상을 등진 친구들의 희망/나비/를 오래 오래 간직해 온 피해자들이 할머니가 되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 현실을 방증하기도 한다.

소녀상 옆의 빈의자는 돌아가신 피해자들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 모두 당사자가 될 것을 초대하는 의미도 있다. 그리하여, 소녀상은 피해자들의 분노, 슬픔, 고통, 희망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거작이다. 피해자들을 ‘느끼고’ 싶은 시민들이 그녀들에게 접촉하는 ‘매개’물이자 ‘창문’ 이 되고있는 것이다. 소녀상과 접촉함으로서, 식민지시대의 고통과 수모를 느끼며, 비슷한 일이 다시는 되풀이 안돼야 한다는 결심을 다시한번 해본다. 한국의 십대 여학생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충을 너무나 잘안다. 매 수요일 정오에 열리는 시위에서 참가하여, 슬로간을 외침으로서 속깊이 숨겨든 감정을 털어 놓는다. 그들의 성폭행 고롱스런 경험과 연결된다. ‘난 한번의 경험이 이렇게도 힘든데, 할머니들은 하루에도 수십번, 수년을 수난당했으니…’  생각하며 남모르게 혼자 운다.

이런 심기의 한국의 소녀들은 소녀상이 상징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어릴적 시절과 너무나 identify하고 동정한다. 겨울이 되면, 소녀상에 털모자를 씨워주고, 목도리를 둘러 주고, 장갑을 끼어주고, 양말과 덧신을 신켜 준다. 옆의 빈의자에는 끊임없이 생화가 놓여 있다.

이상이 중앙대 이나영 교수의 논문을 요약한 것이다.

결론으로 들어가 말하자면… 위안부 기념 소녀상은 그들의 기념상 이자 평화상이지만, 보통 동상이 아니다. 잘 관찰하는 사람에게서 여러가지 감정을 솟아나게 한다. 피해자에게서는 분노, 슬픔, 고통, 희망을 돋구는가하면, 가해자에게는 죄책감과 수치감 을 일으키는 동시에, 할 수 있으면, 과거를 잊고 완전히 지워 버려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은 것이다. 일본 정부가 500,000 불을 써가며, 위안부 소녀상 건립을 막으려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잔인한 전쟁 범죄, 인류를 해친 죄를 저지르고도, 끝끝내 부정하는 일본 정부에게는, 순진한 소녀의 동상이 무서운 것이다.

소녀/평화 동상. 현재 시카고 지방에 보관.
GI Korea, April 5,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