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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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봉(시카고한미상록회장)

 

나는 몇 시간, 아니 간밤을 온전히 용서란 화두에 마음이 빠져 숨 가쁘게 헐떡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라면 하나하나 사건의 대상을 찾아 화해하고 용서를 빌면 용서를 받든 받지 못하든 해결이 되겠지만 대게가 ‘용서’란 합리화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함정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찍이 사람(나)의 보편적 한계를 고백한일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죄를 범하게 마련이지만 아담처럼 핑계로 자신이 저질은 잘못을 합리화하면 죽고 잘못을 일깨움 받았을 때 인정할 것을 인정하지 못해 용서받을 때를 놓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주어지는 때(시간 혹은 기회)는 일생에 단 한번 뿐이란 진리를 성서를 통해 배웠기 때문에 배운 것을 순종하는 나의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이 “용서”란 반드시 상대적 결과란 사실을 잊어버리고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한, 일방적인 ‘용서’란 행위는 불의에 침묵하는 비 성서적 행위임을 지적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심 좋은 사람은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라고 하느님을 엄청 잘 섬기는 것처럼 자아장착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죄를 범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그 첫째는 불의를 하느님 핑계로 침묵하는 죄입니다. 그 두 번째는 이웃을 선도하여 하느님의 징벌을 면책 받을 기회를 방조함입니다. 이러한 모순을 시시각각 부딪치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는 시간이란 거대한 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시간은 공평을 저울질 할 때만은 기회일 수도 있지만 매몰차게 수탈(收奪) 당한 자취들만 남겨 줍니다. 무속과 같은 신앙은 예외 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宗敎)의 명분을 앞세워 정의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계시된 본질 안에서는 윤통성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음식을 편식하듯 주어진 사명이나 감당해야 할 책임까지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합니다. 기복에 빠져 그렇게 사는 삶의 외면을 보고 종교생활을 평가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종교를 전도한 나라는 망합니다. 평화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피를 흘린 대가가 평화입니다. 그래서 불의에 침묵하는 행위는 죄악입니다. 풍요로움도 땀을 요구받고 진실을 요구받은 다음 누림에서 매겨지는 가치입니다.

이 말도 나의 편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편견에 집착을 더하면 확신 범을 만드는 모태가 됨으로 아주 위험한 범죄를 유도함을 가끔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 내가 편견이 아니기를 바라는 편견, ‘용서’란 화두에 빠져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종교 안에서는 가르치는 사람(목사)의 사역이 꽃입니다. 꽃이 건강하게 피어날 때 건강한 씨앗이 결실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런 꽃을 만나 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꽃이 꽃을 평가하진 못합니다. 그러나 꽃을 가꾸는 화훼원예를 경영하는 농부는 꽃의 향기가 없으면 향기가 없음도 꿀이 없다면 꿀이 없는 그 결함도 진단합니다. 이와 같이, 가르치는 사람이 그가 가르치는 모델(정의)에서 일탈(逸脫)하면 모델이 되어주신 이도 알고 분별의 지혜를 가진 제자도 압니다. 허나 요즈음은 가르치는 사람이 무리지어 가르치고 싶은 것만 가르치자고 하고 있으니 이렇게 변질 된 세상은 망해가는 지름길에 들어섰다고 하는 편견을 벗지 못합니다. 과거에 조선이 망할 때도 그랬으니까! 우려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 시대의 언론이 부패하고 종교에서까지 가르치는 사람부터 잘못 가르치면 그 세상을 이미 망한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