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좌충우돌 채플린 이야기(13)…소야 소야, 제발 움직이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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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숙 목사(하나님의 성회 시카고교회 부목사)

 

시골 외할머니 댁에서 살던 시절 6살 때의 이야기다. 어느 날 외삼촌과 함께 들에 갔는데, 거기에는 어미 소가 한 마리가 있었다. 소의 코를 뚫은 코뚜레에 긴 줄인 고삐가 연결되어 삼촌은 그것을 느슨하게 붙잡았고, 소는 자유롭게 나아가며 풀을 뜯어 먹었다. 한참 후 삼촌이 급한 일이 생겨 잠깐 다녀오겠다며, 소의 고삐를 나에게 넘겨주면서 말하셨다. “소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잘 지켜야 해, 고삐만 꼭 잡고 있으면 괜찮을꺼야, 할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어요.”어디서 이런 용기가 생겼을까? 소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있어 주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의 간절한 바램과 달리 풀을 뜯기 위해 소가 움직였다. 나는 소가 움직이다가 도망갈까 불안해 고삐를 꼭 붙잡고 소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바둥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몰랐다. 내가 고삐를 당기면 당길수록 소는 더 앞으로 나가려고 기를 썼고, 나는 더욱 고삐를 힘껏 움켜쥐었다. 상상이 가는가? 어미 소와 6살 꼬마의 기 싸움. 결론은 소의 승리로 끝났다. 소는 의기양양하게 전진하며 풀을 맛있게 뜯어 먹었지만, 나는 패잔병처럼 넘어져 무릎이 까져 피가 났고 그걸 보자 울음보가 터졌다. 그러면서도 소가 도망갈까 무서웠다. 아파서 울었는지, 소가 도망갈까 울었는지 잘 모르겠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삼촌이 돌아와 울고 있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의 눈물과 상관없이 소는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내가 좀 더 지혜로웠거나 소 다루는 법을 잘 알았더라면 소와 함께 즐거운 추억을 만들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이제 ‘이야기 신학’으로 풀어보자. 이야기를 듣고 어떤 느낌이 드는가? 생각 표현과 느낌 표현은 다르다. 동료들은 “슬픔’, “어린 조카를 홀로 남겨두고 떠난 삼촌에 대한 분노”, “안타까움” 등을 표현했다. 나도 그 아이가 가여워서 슬픔을 느꼈다. 떠오르는 이미지는 ‘시골 농가에 홀로 남겨진 아이의 힘겨움과 눈물’이었다. 이야기의 의미는 “잘못된 선택이 오해와 상처를 만들 수 있다. 구속이 아닌 존중과 자유가 서로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교훈을 얻었다.

성경에선‘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 찬양 하자 옥문이 열렸고, 감옥을 지키던 간수는 그들이 도망갔다고 생각해 죄수를 놓친 책임추궁이 두려워 자살을 하려다 도망가지 않은 바울의 소리에 간수는 뛸 듯이 기뻐 그들을 집에 초대해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현존은 소와 내가 씨름 하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셨고, 넘어져 우는 나의 눈물에 함께 눈물을 흘리셨고, 삼촌이 다시 돌아오도록 준비시키셨다. 소가 멀리 도망가지 않도록 붙드셨다. 이야기가 내 삶에 끼친 영향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 ‘위로해 주시고 늘 함께 해주시는 분’, ‘그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깨닫기 원하시는 분이심’을 발견했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셨다.

꺼내어 치유 받아야 할 상처가 있는가? 그 시절로 돌아가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의 끝을 다시 써보면 어떨까? 눈물을 그친 아이는 소에게 다가가 귀속 말로 속삭인다. ‘너를 오해해서 미안해. 그리고 멀리 도망가지 않아서 정말 고마워.” 소는 아이의 말을 이해한 듯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여전히 풀을 되새김질하면서 살짝 미소를 띄운다. 삼촌은 조카를 어깨에 무등을 태우고 아이는 그 위에서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행복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뒷모습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