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유효한 부르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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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논문심사위원)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사탄의 자녀인 전 인류 중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로 일부를 영원한 현재에서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때가되면 그들을 부르신다. 마귀의 왕국에서 불러서 하나님 왕국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 왕국의 백성은 지정의 모든 면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지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게 된다. 정적인 면에서 진리에 대하여 돌같이 굳은 마음이 없어지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생겨난다. 행위적인 면에서 선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다. 이 유효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 없고 특별한 은혜로만 된다. 아르미니우스 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미래를 미리 보고 그를 선택하고 부른다고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런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있는 어떤 긍정적인 면이 하나님 부르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성령으로 인해 소생하고 새롭게 된 후에는 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고, 이 부르심을 통하여 전달된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를테면, 회개하고 믿고 성화 되는 은혜를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하는 성령에 사역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부분을 신학적으로는 중생이라고 하는데, 중생은 첫째, 성령의 단독적 역사이다. 중생은 인간에게 있는 어떤 공로가 아닌,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성취된다.

둘째, 신비한 역사이다. 중생은 관찰할 수 있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오순절 계통의 신학은 중생을 방언과 밀접하게 연관한다. 즉 성령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면 방언이 나오게 되고 이것은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세대주의 계통의 신학은 중생을 구원의 확신에 대한 유무로 관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은 중생을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본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1-8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중생하는 것을 바람에 비유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 3:8).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중생은 인간 인식론 밖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중생은 발생하나 중생 그 자체는 인식하지 못한다. 중생은 간접적으로 인식한다. 낙엽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중생은 회심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죄악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중생 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런데 회심은 신학적으로 볼 때 한순간을 가리킨다. 순간이란 원과 선이 만나는 접점과 같은 것으로서, 그 값이 0 이기 때문에, 역시 인간은 인식할 수 없다. 그래서 회심을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성화이다. 죄와 끊임없이 싸우고, 자신을 낮추고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이며, 지정의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몸소 행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몸부림이 성화이다. 이런 것이 자신에게서 발견되면, 회심했다는 것이 증명되며, 회심이 증명되면 중생이 증명된다.

셋째, 중생은 대개 복음 전파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죄인이 중생하도록 하기 전에 대개 말씀을 먼저 듣게 한다. 그렇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중생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일 수 있으나 거듭나는 것은 복음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고 복음을 통하여 활동하기를 기뻐하는 성령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중생은 대개 복음 전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죽은 아이나, 복음을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지적 장애인의 경우는, 언어를 통한 복음을 듣는 과정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만 중생한다.

이 중생으로 말미암아 전 인격에 (이성, 감정, 행동)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거듭난 사람은 거듭난 즉시,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끼며, 다르게 뜻을 정한다. 이렇게 된 까닭에, 복음의 값없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