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두려움이 두려움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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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 시카고 이민자보호교회 TF 위원장)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던 나폴레옹에 관한 의외의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나폴레옹의 보좌관이 나폴레옹의 침실 옆을 지나가는데, 안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며 엄청난 소란이 일어난 듯 보였다. 다급히 뛰어 들어가 보니, 나폴레옹이 땀이 범벅이 되어서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며 칼로 커튼을 휘갈기고 있었다. 무엇이 이 용맹한 전사를 이렇게 두렵게 만들었을까? 커튼 뒤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심리학자들은 나폴레옹이 오늘날 ‘아일루로 포비아’라고 불리는 고양이 공포증이 있었던 것 같다고 분석한다. 말 그대로 고양이에 대한 심한 공포증이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사라 라타의 <포비아>라는 책을 보면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50가지의 포비아(공포증)를 소개하고 그 원인을 분석한다. 여기서 말하는 ‘포비아’는 예상치 못한 특정한 상황이나 활동, 혹은 어떤 대상에 대해 느끼는 극도의 공포심을 말한다. 고소 공포증, 광장 공포증, 무대 공포증, 고양이 공포증, 물 공포증, 거미 공포증, 무질서 공포증, 치과 의사 공포증, 휴대전화없음 공포증, 어둠 공포증, 사회 공포증, 거울 공포증, 발표 공포증… 이 외에도 수백, 수천 가지 공포증이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두려움과 공포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에 언급한 공포증들처럼 약물 치료나 전문가의 상담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크고 작은 두려움을 느끼며 산다. 대중 앞에 서는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수술이 잘못 될까 하는 두려움, 사고에 대한 두려움, 직장에서 해고될 것 같은 상황에서 느끼는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질까 두려운 마음,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들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수1:9)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고 두려움이 즉시 사라지지는 않는다. 한 아이가 지은 <용기>라는 시가 잘 보여준다.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용기를 내야 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못해요.”

인간의 삶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있다. 어쩌면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생존을 이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려움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차가 달려오는데 두려움이 없다면? ‘난 코로나 바이러스 따위 두렵지 않아’라고 하며 다들 마스크 안 쓰고 다니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까? 두려움은 위험을 알려주는 일종의 경고등이다. 위험을 피하라고 싸인을 보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움 그 자체는 문제도 아니고 죄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두려워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이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4-5)

코로나19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팬데믹 상황에서 찾아오는 각종 두려움들은 이제 ‘뉴노멀’이 되었다. 두려움을 한번에 물리치는 해법 같은 건 없다. 다만 큰 두려움이 작은 두려움들을 이겨낸다. 임박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가 오늘 마감인 카드 빚이 두렵지는 않은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두려움이 아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두려움이 없다는 그것이 문제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