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기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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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서상규 목사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다가 여호와의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을 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게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구약 성경에 여호와의 이름을 나타내는 문자는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읽는 지는 잊어 버렸습니다. 토라에 하나님의 이름이 문자로만 적혀있지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 문자의 소리를 읽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것은 히브리 문자를 조금 살펴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문자에는 모음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제 이름이 ‘서상규’인데 히브리식으로 쓴다면 ‘ㅅㅅㅇㄱ’ 이렇게 자음만을 기록합니다. ‘ㅓ ㅏ ㅠ’ 모음이 문자로 표기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음만 표기되기 때문에 히브리 문자를 읽으려면 그 부모로부터 전승되어져야 합니다(현대 히브리어는 모음이 표기됨). 그런데 오랜 세월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하여 소리를 내어 읽지 않다 보니 여호와의 이름을 표기한 문자의 음가를 잊어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이름이 나오면 다른 말로 표현했는데 그것이 ‘아도나이’ 곧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읽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6세기경 히브리 글자를 읽을 수 있도록 발음 기호를 만들면서 ‘아도나이’의 모음을 하나님의 이름을 표기한 자음에 붙여 읽은 것이 야훼(여호와)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정확히 어떻게 부르는지는 지금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대인들이 율법적으로 예식적으로는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그들의 삶에서는 여호와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문의 의미는 단순히 칭호에 대한 경건의 표현을 넘어서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출 34:5-7)으 십니다. 이러한 분을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며 그 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기를 원한다면 그 거룩함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실천이 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당신의 자녀로 인정해 주셨고 우리 또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이 되었으니 우리들의 모습이 사람들 앞에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아버지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으므로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든 삶이 누구의 자식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의 고향은 전체 가구가 60호 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행동을 어떻게 하는지 동네 사람들이 다 압니다. “서씨네 큰 아들….” 우리는 누구의 아들, 딸 입니까? 하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며 사는 삶이란, 우리의 삶에서 거룩한 아버지의 아들, 딸, 곧 자녀 됨의 모습이 드러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살면서 기도할 때만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그 기도는 유대인들의 가식적이고 이중적이며 다른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한 기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처럼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시는 기도를 드리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이 아버지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