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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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프란시스 킨슬러(Francis Kinsler)

장로교 군목창설 선교사이며, 성경 구락부 활동을 통한 청소년 선교를 개척했던 프란시스 킨슬러(Francis Kinsler)는 190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태어났으며, 메리빌대학(Maryville College)과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28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 왔으며, 1929년부터 평양 숭실학교 교사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킨슬러 선교사는 신학교 시절에 만난 아내 도로시와 1930년 평양에서 결혼했다.

킨슬러 선교사는 숭실학교 교사로 활동하는 한편 1929년부터 평양 광명서관 2층에서 가난한 청소년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는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한편 복음까지 전하기 위한 사회선교 운동이었는데, 훗날 이 모임이 대한청소년성경 구락부로 발전했다. 194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 일제 식민지 하에서 가족이 몰락해 평양 길거리를 배회하는 고아들을 모아 야학을 운영하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의 일생은 한국에서 청소년 교육 사업에 전념했다.

성경구락부는 어린이 6명과 가진 모임에서 시작하여 3단계로 발전하였다. 1단계는 일제 강점기다. 킨슬러는 당시 공교육을 받지 못하던 어린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성경 구락부를 설립하였다. 교사들은 대부분 평양 신학교와 숭실대학 학생들이었다. 킨슬러와 교사들의 헌신으로 계속 성장하던 성경구락부는 신사참배를 요구하는 일제와 갈등을 빚고 1938년 폐쇄 되었다. 2단계는 해방 시기다. 해방후 북장로교 선교부는 1948년 6월 킨슬러를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파송 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 초 그는 32명의 신학생들 교육시킨뒤, 월남 기독교인들을 위해 세운 교회로 보내 성경 구락부를 세웠다.  3단계는 6·25전쟁과 혼란기다. 성경 구락부가 서울을 중심으로 재건되는 과정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킨슬러는 부산에서 전재민들을 위한 구제활동에 전념 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성경 구락부 재건에 힘을 기울었으며, 또한 군목제도를 창설하여 운영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6·25전쟁 이후 교육 대상자들에 월남 기독교인 자녀만 아니라 피난민과 전재민 자녀들을 포함시켰다. 1950년대 후반부터 초등 과정이 의무 교육으로 정착되자, 성경구락부는 중·고등과정을 신설하거나 확장하여 해당 학생들을 대부분 수용했다. 이 학교들 중에 적지 않은수가 정규학교로 전환되었다. 성경 구락부는 일정 기간 공교육을 대신 한것만 아니라 사회통합과 발전에 기여했다. 청소년들의 자율성과 독립심을 키워주었고, 사회성과 리더십을 고양시켰다. 그러면서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교회 성장에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다. 성경구락부 운동은 해방 후에도 계속 이어져 1954년 말에는 전국에 17개 지부와 7만여 명의 청소년이 참여하는 대형 모임으로 발전했다. 그는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와 장로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신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헌신 하다가 1970년에 선교사에서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한인 이민교회를 도우며 지내다가 1992년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01년 9월 아내의 유해와 함께 양화진으로 옮겨졌다. 킨슬러 선교사의 한국 사랑은 후대로 이어져 장남 아서 킨슬러(권오덕) 부부와 딸 헬렌 킨슬러 역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아더 W. 킨슬러 목사의 고향은 평양으로 유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것을 추억하며 북한 선교에 관심이 많았다. 아더 킨슬러 목사는 “평양은 선친을 비롯해 많은 선교사들의 피와 땀이 얼룩져 있는 땅이라며, 언젠가 그곳에도 기독교가 다시 회복되는 날이 올 것이라” 기대했다. 프란시스 킨슬러의 (권세열) 기도와 헌신과 그의 가르침은 한국교회 안에 지금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참고자료: 한국실천신학회, 양화진의 선교사의 삶, 내한선교사 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