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윌리암 얼 쇼(William Earl Shaw/서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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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나눔교회 담임)

선교는 사랑의 실천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삶을 통하여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선교적 삶이라고 볼수있다. 이런 삶을 살았던 분이 시카고에서 태어나서 한국에 선교사로  찾아온 사람이 윌리암 얼 쇼이다. 그는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에 자원 입대하여 한국 전쟁에도 참여하며 군목제도를 처음 도입한 분이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헌신하였다. 또한 대전 목원대의 전신, 감리교 신학원이 설립될 때 창립 이사로 참여하며, 신학 교수로 재직하여 한국의 신학 교육발전에 큰 기여를 해 왔다.  윌리암 얼 쇼( William Earl Shaw)는 한국을 너무 사랑하였기에 서위렴 이름을 가지고 백성들을 섬겼다.  그는 1890년 8월22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나서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와  보스턴 신학대학원,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특히 웨슬리언 대학교 재학중에는 YMCA에 활동하며, 후에  미육군에 입대하여 군목으로 임명받고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1년  그의 아내 아델린 쇼와  딸 메리 제인과 함께 중국 우편 운반선을 타고 내한하여 평양에 거주 하면서 선교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때 외아들  헤밀턴 쇼가 출생하게 된다. 윌리엄 쇼 선교사는  1926년까지 광성 고등 보통 학교에서 사역 하다가 미일 관계 악화로 서울주재 미 영사관으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고 잠시 철수를 하고 1947년 다시 내한하였다. 그때에는 6.25 전쟁으로 인하여  미 육군 군목 신분으로 참여 하게된다. 그는 군종 제도의 창설을 처음으로 정부에 건의 하였고 각교단 대표들 중심으로 군종제도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1951년 2월  한국 정부로부터 군종 제도를 승인받게 되었다.
6.25전쟁이후에는 감리교 대전 신학교 이사 및 신약학 교수로 봉직하며  목회자 재교육 기관 이었던 목자관을 건립하여 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부인 아델린 쇼는 대전에서 모자관 시설이었던 성화장을 건립하여 전쟁 미망인을 위한 사역을 해왔다. 그의 사역은 자신들 세대에 멈춘것이 아니고 아들 해밀턴 쇼가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선교사를 꿈꾸며 하버드 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하는중에 한국 전쟁이 반발하자 학교를 중단하며 아내와 두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해군 대위로 다시 입대하여 한국내전에 참여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만 28세 나이로 전사하게 된다. 그후에 해밀턴의 아들 로빈슨 쇼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뒤를 이어  한국에서 장학사업과  법률연구센타등 한국 대학생들을 위한 많은 교류 활동에 이바지 했다.  윌리엄 얼쇼 선교사 가정은 3대에 걸쳐,  한국을 자기 민족처럼 진정으로  사랑하며 헌신했던 가문이다.(참고문헌: 한국 감리교를 섬기는 사람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윌리엄 해밀턴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