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5 F
Chicago
Thursday, July 2, 2026
Home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21.이문규 전 민주평통 시카고협의회장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21.이문규 전 민주평통 시카고협의회장

72
이문규 전 민주평통 시카고협의회장이 본보와 인터뷰를 갖고 이민 여정과 동포사회 활동을 돌아봤다. <사진 윤연주 기자>

“사람다운 인성이 먼저” 조용한 실천으로 남긴 발자취
썬택시 설립, 한인 기사들의 언어·행정 장벽 도와
9·11·우버·코로나 위기 넘어 2세 경영으로 이어져
장학사업·보훈활동·탈북민 지원까지 20년 동포사회 봉사
”내가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인성의 가치 남겨

[편집자주] 시카고 한국일보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틀을 다진 1세대 한인들의 삶을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스물한 번째 인물은 썬택시 창업주이자 재향군인회 미중서부지회장, 한미장학재단 중서부지회장, 제17기 민주평통 시카고협의회장 등을 지낸 이문규 전 회장이다. 낯선 땅에서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책임을 다했던 그의 삶을 따라가 본다.

2015년 8월 5일 열린 제17기 민주평통 시카고협의회장 취임행사.

◇ 한인 택시 기사들의 안전망이 되다

시카고 거리 위를 달리던 택시 안에는 작은 무전기가 있었다. 어느 길이 막히는지, 위험한 상황은 없는지 기사들은 그 무전기를 통해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영어가 서툴고 미국 시스템이 낯설었던 한인 기사들에게 그 목소리는 때로 길 안내였고, 때로는 안전망이었다.

그 무전기 뒤에는 썬택시를 세운 이문규 회장이 있었다. 1983년 택시 운전자로 시작한 그는 10여 년 동안 시카고 택시업계를 몸으로 익혔다. 그리고 1996년, 한인 기사들이 보험과 서류, 사고 처리 문제 앞에서 혼자 서지 않도록 회원제 택시회사 ‘썬택시(Sun Taxi Association Inc)’를 설립했다.

이 회장은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되는 한인 기사들을 위해 회사에서 많은 부분을 도왔다”며 “그분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틀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썬택시는 기사들이 시카고시 서류를 처리해야 할 때, 사고가 났을 때, 보험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나섰다. 승객이 예약 전화를 하면 기사와 연결해 주는 업무도 담당했다. 썬택시는 한인 기사들에게 낯선 미국 생활에서 기대어 설 수 있는 울타리였다.

사진 왼쪽: 영등포고 재학 시절의 이문규 회장. 사진 오른쪽: 1965년 고교 졸업 후 누나 이유선 씨(앞줄 오른쪽), 형 이성규 씨(뒷줄 왼쪽)와 함께한 이문규 회장.

◇ “삐뚤어진 길은 가지 않았다”

이 회장이 남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데에는 그의 삶에 오래 남아 있던 기준이 있었다. 그의 집안은 광명 지역에 대대로 뿌리를 두고 살아온 가문으로, 조선 중기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표상으로 알려진 오리 이원익 대감의 후손이다. 이 회장은 “훌륭한 조상을 모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자부심이었다”며 “그 정신이 우리에게까지 내려온 것 같다”고 말했다.

1946년 경기도 광명에서 태어난 그는 8남매 중 막내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그는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셨고, 어린 시절 크게 풍족하진 않았지만 부족함 없이 자랐다”고 기억했다.

이 회장은 “어린시절 친구들과 즐겁게 노는 것을 좋아했고, 스스로를 엄격하게 붙잡는 편은 아니었다”며 “참 철없이 컸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 선은 분명히 지켰다고 했다. 그는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삐뚤어진 길은 요만큼도 안 갔다”며 “그건 부모님께 받은 가정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등포고를 졸업한 이 회장은 건국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한때 언론인의 꿈도 있었지만, 군 입대가 그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1967년 장교 복무 시절

◇ 월남전에서 배운 삶의 무게

대학 2학년 무렵, 이 회장은 장교 시험에 지원했다. 1967년 육군보병학교에 들어간 그는 1년간 훈련받은 뒤 소위로 임관했고, 강원도 전방에서 근무했다.

군 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책임감을 갖게 했다. 그리고 1970년 초부터 약 1년 5개월 동안 참전한 월남전은 그의 인생을 바꾼 큰 전환점이 됐다.

이 회장은 “월남전에 가서 내가 처음으로 변했다”며 “전우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사는 길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쟁터에서 그는 삶과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보았고, 살아남은 사람에게 주어진 책임도 알게 됐다.

귀국 후 그는 장기복무를 생각했지만, 부상과 건강 문제로 1972년 대위로 전역했다. 계획했던 길이 막히자 한동안 방황도 했다. 그러나 그 시간 그의 곁에는 오래 이어진 인연이 있었기에 견뎌낼 수 있었다. 훗날 아내가 된 이신애 여사였다.

두 사람은 1969년, 이 회장이 월남 파병을 앞두고 있던 시기에 우연히 만났다. 안양행 버스를 기다리던 중 같은 방향으로 가던 한 여학생과 대화를 나눈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월남전 기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연을 이어갔다. 두 사람은 약 5년간의 교제 끝에 1974년 결혼했다.

1967년 장교 시절, 아내 이신애 여사와 함께한 이문규 회장.

◇ 시카고에서 잡은 운전대

결혼 후 이 회장은 부모님께 받은 유산으로 안양에서 상가 건물과 소형 아파트 등을 짓는 건축 사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경험 부족과 분양 실패로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는 “경험이 없는 사람이 무리한 일을 한 것”이라며 당시를 담담하게 돌아봤다.

그런 가운데 1979년, 시카고에 먼저 정착해 있던 형 이성규 씨가 미국 초청장을 보내왔다. 몇 년의 고민 끝에 1982년 8월 아내와 어린 자녀들의 손을 잡고 시카고에 도착했다.

하지만 처음 마주한 시카고는 막막했다. 그는 “막상 왔는데 내가 설 자리가 아무 데도 없었다”며 “아홉 달을 고민만 하고 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그 시간 가족을 붙든 사람은 아내 이신애 여사였다. 이 여사는 지인의 소개로 바느질 공장 일을 하며 가정을 지탱했다. 이 회장은 “가장으로서 더는 머뭇거릴 수 없었다”며 “운전대를 잡고 택시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1983년 그는 시카고 택시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시카고에는 한인 택시기사들이 100명 이상 있었다. 영어가 서툴고 미국 사회에 막 들어온 이민자들에게 택시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중요한 생업이었다. 하지만 한인이 운영하는 정식 택시회사는 없었다. 기사들은 미국 회사에 차를 빌려 운행했고, 사고나 보험, 서류 문제가 생기면 혼자 해결해야 했다. 이 회장은 그 현실을 길 위에서 직접 보았다. 훗날 썬택시가 태어난 출발점도 바로 그 길 위였다.

썬택시(Sun Taxi Association Inc) 웹사이트.

◇ 힘을 모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10년 가까이 택시를 몰며 이 회장은 업계를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됐다. 1990년대 초중반, 시카고 택시업계에는 변화가 일고 있었다. 당시 흑인 기사들이 60%였는데, 중동계 기사들이 많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회장은 그 흐름 속에서 한인 기사들도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한인 기사들이 함께 투자해 회사를 만들자는 구상도 했지만, 뜻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혼자 추진하기로 마음먹고 1995년 사업 신청을 했다. 이후 1996년 정식 허가를 받았고, 그해 12월 썬택시가 문을 열었다.

이 회장은 “큰 자본으로 택시 영업권을 한꺼번에 사들이는 방식은 불가능했기에 회원제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기사들이 회사에 가입해 썬택시 로고를 달고 일정 회비를 내면, 회사가 보험 가입, 시청 행정 업무, 교통사고 처리 등을 지원하는 구조였다.

초기에는 한인 기사 50명가량을 포함해 70~80명 정도가 뜻을 함께했다. 사무실은 브린마와 플라스키 길 부근 옛 포스터뱅크 건물 3층에 마련했다.

이후 썬택시는 빠르게 성장했다. 출범 2년 만에 가입 회원이 약 300명으로 늘었고, 한창때는 400명 규모까지 커졌다. 썬택시 로고를 단 차량 수로는 시카고에서 여섯 번째 규모의 택시회사로 성장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차량 관리와 정비도 중요한 과제가 됐다. 이 회장은 기사들이 더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차량 정비 공장(Sun Auto Werks)도 마련했다. 썬택시는 운행과 사고 처리, 차량 관리까지 함께 책임지는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Sun Auto Werks

◇ 세 번의 위기, 다음 세대로 이어진 경영

썬택시의 길이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회사가 성장한 뒤에도 시대의 큰 파도는 여러 차례 찾아왔다.

첫 번째 위기는 2001년 9·11 사태였다. 항공 교통과 공항 이용이 크게 줄면서 택시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수입은 끊겼지만 보험료와 운영비는 계속 쌓였다.

이 회장은 “차는 서 있는데 한 대당 500불씩 하는 보험료가 계속 나갔다”며 “석 달 만에 60만 불 가까운 빚이 쌓여 파산 직전까지 갔다”고 말했다.

그때 회사를 살린 것은 그동안 쌓아온 신용이었다. 보험회사는 이 회장의 신용을 믿고 밀린 보험료를 유예해줬다. 이 회장은 “그 조치 덕분에 숨통이 트였고, 공항 운행도 회복되면서 밀린 대금을 1년 만에 상환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시카고 다운타운 일본영사관 앞에서 열린 독도 시위에 재향군인회와 시카고 한인들이 함께 참여했다.

두 번째 위기는 2009~2010년 무렵 등장한 우버와 리프트였다. 스마트폰 앱 기반 차량 서비스가 확산되면서 전통 택시업계는 크게 흔들렸다. 택시 영업권 가격은 급락했고, 손님도 줄었다.

이 회장은 “세상이 그렇게 빨리 변할 줄은 몰랐지만, 변화 앞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주류 택시업계 관계자들과 함께 시청을 찾아가 생존권을 호소하고 로비와 시위에도 참여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한 사람의 힘으로 막기에는 쉽지 않았다.

경영난과 스트레스는 건강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2년 그는 심장 수술을 받으며 생사의 고비를 넘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큰아들 종빈 씨가 썬택시 회사 운영을, 작은아들 종명 씨가 정비공장 운영을 맡으며 본격적인 2세 경영의 닻을 올렸다.

민주평통 시카고협의회가 주관한 5km 달리기 기금 마련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함께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사업을 넘긴 뒤에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놨다. 우버와 리프트의 등장 이후 택시업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예전처럼 비전이 큰 업종을 물려준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 번째 위기였던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두 아들은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줬다. 2020년 도시가 멈추자 택시와 정비공장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미국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자녀들의 주류사회 시스템 활용 능력이 빛을 발했다. 두 아들은 연방정부의 코로나 비즈니스 지원금과 PPP 등 구제 프로그램을 활용해 위기를 넘겼고, 회사와 정비공장을 지켜냈다. 이를 통해 직원들의 급여도 최대한 유지했다.

한국전 참전 기념 박물관 건립 구상 당시 함께한 미국 한국전참전용사협회(KWVA) 셀소로티 사무총장과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이차희 사무총장.

이 회장은 “아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회사를 잘 이끌고 있다”며 “업종이 예전 같지 않아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넘기고 지금도 회사를 잘 이끌어가는 아들들의 모습에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덧붙였다.

현재 썬택시는 약 400여 명의 다민족 기사가 함께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한인 이민 1세대가 운전대를 잡고 시작한 길은 이제 미국에서 자란 2세대들의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재향군인회 활동 시절, 보훈병원을 찾아 한국전 참전 상이용사들을 위문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 장학금은 성적순이 아닙니다

이 회장의 관심은 사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택시업을 통해 이민자들의 어려움을 가까이에서 본 그는, 이후 한인사회 곳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나섰다.

이 회장의 한인 사회 봉사는 1997년 이국진 한인회장 시절 시카고한인회 이사로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1997년부터 2017년까지 20년 동안 동포사회 활동을 했다”며 “내가 할 수 있는 자리에서 게으름 부리지 않고 일했다”고 돌아봤다.

(사진 왼쪽부터) 백선엽 장군, 이문규 회장, 박세직 전 88올림픽조직위원장이 함께한 자리.

이후 그의 발걸음은 안보와 보훈 단체로 이어졌다. 1998년 민주평통 자문위원을 시작으로 2000년대에는 재향군인회 이사와 부회장을 지냈다. 2004년에는 베트남참전유공자회 회장, 2006년에는 재향군인회 미중서부지회장에 당선됐다. 임기 동안 그는 메모리얼데이 행진, 보훈병원 위문, 북핵 반대 서명운동, 한국전 참전 기념 박물관 건립 프로젝트, 다운타운 일본영사관 앞 독도 시위 등을 주도하며 안보 의식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다양한 단체를 이끌었던 그가 특히 가슴 깊이 기억하는 활동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맡았던 한미장학재단 중서부지회장이다. 이 회장은 “한미장학재단은 우리 이민 2세, 3세 청소년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단체라 참 뜻깊게 생각했다”며 “공부만 잘하는 학생보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도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중후반, 일리노이 주도 스프링필드에 세워진 한국전쟁 종전기념비 행사에서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렸다.

당시 시카고 지회의 예산이 부족하자 그는 직접 발로 뛰며 장학기금 마련 골프대회를 열었다. 매년 자체적으로 기금을 추가 마련해 더 많은 한인 학생에게 혜택을 주고자 했다.

그의 차세대 사랑은 스포츠 무대로도 이어져 2015년에는 워싱턴 미주체전 시카고 선수단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한인 2세와 3세가 체육을 통해 정체성과 화합을 경험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두었다”고 덧붙였다.

2010년 한울종합복지관에서 열린 한미장학재단 미중서부지회 제18회 장학금 수여식에서 이문규 회장이 축사를 전했다.

◇ 탈북민의 외로움을 지나치지 않았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제17기 민주평통 시카고협의회장을 지낸 이 회장이 특히 마음을 쓴 대상은 지역에 정착한 탈북민들이었다.

그 관심의 시작에는 시카고 난민 수용소에 도착했던 한 탈북 청년과의 인연이 있었다. 이 회장은 의지할 곳 없던 그를 양아들로 삼아 자동차와 거처를 마련해 주며 미국 정착을 도왔다. 이 과정에는 이 회장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군 장교 출신 모임인 ‘황금오리’ 친구들의 정성이 큰 힘이 됐다. 황정융, 김진규, 오국정, 이완수 씨 등은 각자의 성씨를 따 모임을 만들고 수십 년간 형제처럼 지내온 사이였다.

오랜 친구 모임 ‘황금오리’ 멤버들. 사진 왼쪽부터 이문규 회장, 황정융 회장, 김진규 회장, 오국정 행장.

이 회장은 “그 탈북 청년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황금오리였다”며 “오랜 이민생활 속에서 친구들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여기에 영어와 행정 절차가 낯선 탈북 청년을 위해 통역과 관련 절차를 도맡아 준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이차희 사무총장의 헌신적인 실무 도움이 더해지며 정착은 무사히 이뤄졌다. 이 회장과 가족처럼 가까워진 그 청년은 지금도 이 회장 부부를 “아버님, 어머님”이라 부르며 꾸준히 연락하고 있다.

이 회장은 탈북민 양아들 김복철 씨가 미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김 씨가 트럭을 구입한 날, 신부님이 차량과 비즈니스를 위해 축사하고 있다.

이 회장은 “탈북 동포들은 가족 없이 혼자 온 사람들이 많다”며 “고향 생각, 가족 생각이 얼마나 나겠느냐”고 말했다. 평통 회장 시절 그는 탈북민들과 명절을 함께 보내고 설날에는 따뜻한 떡국을 나눴으며, 탈북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지원하며 희망을 전했다.

하지만 아쉬운 일도 남았다. 이 회장은 “탈북 청소년들에게 한인사회 지도자들을 맺어주는 양부모 운동을 하고 싶었는데, 그 일을 끝내 이루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2015년 민주평통 초청으로 시카고에서 열린 탈북여성 통일강연회. 이소연, 최수향, 이순실 씨가 북한 실상에 대해 발표했다.

2016년 세계여성 컨퍼런스 같은 큰 주류 사회 행사도 성공적으로 치러냈던 그였다. 하지만 이 회장은 “많은 행사를 치렀지만, 가장 깊이 기억에 남고 마음이 가는 일은 외로운 탈북민들과 함께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던 시간이었다”고 나지막이 말했다.

◇ 기소불욕 물시어인

이 회장의 긴 이민 여정 뒤에는 가족이 있었다. 특히 아내 이신애 여사는 이민생활과 사업, 봉사의 길을 묵묵히 지켜준 동반자였다. 그는 아내에 대해 “참 착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며 “여태껏 내 곁에서 나를 믿고 지켜준 그 모든 세월과 마음들이 그저 고마울 뿐”이라고 마음을 전했다.

최근 맞은 결혼 50주년 금혼식에서도 이 회장 부부의 나눔은 이어졌다. 자녀들은 부모를 위해 호텔 잔치와 해외 기념여행을 준비하려 했지만, 이 회장 부부는 그 마음만 받기로 했다.

아내 이신애 여사는 이 회장의 이민생활과 사업, 봉사의 길을 묵묵히 함께한 평생의 동반자다.

대신 그 비용은 물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한 우물 파주기 구호 기금으로 기부했다. 이 회장은 “우리만 즐기는 것보다 필요한 곳에 쓰이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두 아들 종빈 씨와 종명 씨는 이제 아버지가 일군 썬택시와 정비공장을 잘 이끌어가고 있고, 손주들은 그의 노년에 찾아온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요즘 그는 집 마당 텃밭에 상추와 오이를 심고 가꾸며, 이웃과 나누는 소박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어느덧 함께 골프를 칠 만큼 성장한 손주의 중학교 졸업식에서 가족의 기쁨을 나눴다.

그렇게 가족과 이웃 곁에서 삶을 돌아보는 지금, 이 회장이 후세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화려한 성공 전략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사람의 기본이 되는 ‘인성’을 먼저 강조했다. 그의 좌우명은 논어에 나오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다. 내가 하기 싫고 내가 당해서 아픈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회장은 “전문 지식과 기술도 꼭 필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사람다운 인성을 먼저 갖춰야 한다”며 “남을 이용하지 않고 정직하게 중심을 지키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문규 회장이 남긴 개척의 길은 분명하다. 누군가 혼자 버티고 있을 때 곁에서 함께 서주는 것. 그 묵묵한 헌신의 발자취는 세대를 넘어 시카고 한인 사회가 기억해야 할 이정표로 남았다.

<윤연주 기자>

[시카고 한인사회 선도언론 시카고 한국일보]
1038 S Milwaukee Ave Wheeling, IL 60090
제보: 847.290.8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