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하늘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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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선 목사(시카고)

 

이상기온 속에서 조국은 새로운 변화의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는 5월을 맞았다. 이 계절에 5월의 꽃을 생각하면 당연히 어머니의 사랑을 상징하는 카네이션을 떠올리게 되나, 한국적 배경으로 살펴보면 어린이들을 생각하게 된다.

일찍이 한국의 어린이날을 제정한 소파(小派)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 신문에 실은 시의 첫줄에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입니다” 라는 시 구절이 있다. 오늘날 한국 어린이날의 정신에는 선생이 주장한 아동 존중 사상을 계승하고 널리 기념하는 뜻이 담겨있다 할 것이다.

성서에 비쳐진 어린이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보면, 아이들의 접근을 막는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 이니라”(마.19:14)고 하시면서 어린 아이들을 귀하게 보시며 복을 빌어주신 당신의 성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린아이야 말로 ‘하늘의 꽃’이라 예찬하고 싶다. 꽃은 어떤 종류의 꽃이든 아름답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꽃은 계절과 질서에 순응하고 자신이 있는 곳에서 아름다움을 꽃피운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어른들은 자연을 거스르고 파괴하여 땅을 저주받게 하지 않았던가?

거친 세상에 천진한 하늘 꽃이 피어나도 어른들이 잘 가꾸지 못하고 짓밟고 꺾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 이민1세들도 2세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지만, 어린아이들은 미래를 살아갈 것이기에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우리 어른들도 잃어버린 어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순진성과, 아름다움과, 그리고 순종하는 성품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보셨던 어린이의 모습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독립적인 인격을 강조하심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은 ‘누가 크냐?’ 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2)고 겸손을 가르쳐주심 같이 겸손이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겸손이 없기에 사람들은 남을 속이고 속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며 교만에 빠지게 될 뿐이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가장 크게 오염되어 있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이 욕심 때문에 개인에게서부터 민족과 국가 간에 이르기 까지 온갖 분쟁과 전쟁과 파멸을 자초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어린 아이들에게는 욕심이 없다. 배가 고프면 울지언정 남의 것을 빼앗지는 않는다. 바울께서는 이 욕심이 바로 죄요, 사망이라 규정하고, 이 욕심이 탐심이요,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고 정의하고 있지 않는가?

원산지가 맥시코인 국화과에 속하는 백일홍의 꽃말은 꽃이 피는 기간이 길어 100일 동안 핀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게의 꽃은 길게 피지 못하고 지듯, 하늘 꽃인 어린아이의 꽃도 인생살이에서 보면 짧게 피었다 진다하겠다. 그러므로 그 아름다운 본성을 회복하며 간직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뿐이다. 이 5월에는 하늘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영안(靈眼)이 주 안에서 밝아져 창조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mymilal@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