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은혜, 감사 그리고 교만의 방정식

1974

이준 목사/두란노침례교회 담임

히스기야 왕이 불치병에서 기적처럼 회복되었을 때 바벨론은 축하 사절단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들이 궁금해하던 이적에 대해 묻습니다. 파죽지세로 쳐들어온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괴멸시킬 수 있었는지가 첫번째 궁금증이었을 겁니다. 다른 이적은 히스기야가 치유되던 날 발생한 신비한 자연현상-태양이 10도나 거꾸로 간 기이한 현상-이었을 겁니다.

히스기야의 대답은 뻔해보입니다. 이적을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엉뚱한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보물로 생각하는 것들-은 금, 향료, 보배로운 기름, 무기들-을 보여준 겁니다. 히스기야의 보물 리스트에서 하나님이 빠져 있는 겁니다. 유대 왕들 중에서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자가 없다는 평가를 들은 왕입니다. 그런 히스기야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교만해졌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형통함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감사는 떠나고 그 자리를 교만이 차지하고 만겁니다.  

비엔나의 카푸친 수도원 지하에는 합스부르크가의 황제들을 위한 납골당이 있습니다. 1916년 합스부르크가의 황제 프란츠 조셉이 죽었을 때도 거대한 장례 행렬이 카푸친 수도원 정문에 도착했습니다. 장례 의전관이 문을 두드리자 수도원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분은 누구요?” 그러자 의전관이 대답합니다. “나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왕인 프란츠 조셉이오.” 그러자 수도원장이 다시 묻습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오. 당신이 누군지 다시 말해 보시오.” 의전관은 더 자세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 보헤미아, 갈리시아, 로도메리아, 달마시아의 왕이며, 트란실바니아의 대공작이자, 모라비아의 후작이며, 스티리아와 코린티아의 공작인 프란츠 조셉이오.” “우리는 아직도 당신을 모르겠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수도원장의 서늘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옵니다. 그제서야 의전관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비를 겸손히 구하는 불쌍한 죄인 프란츠 조셉입니다.” “아 그대구려. 어서 들어오시오.” 수도원장의 목소리와 함께 수도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합스부르크가의 장례 예식은 그 자체가 교만을 주제로 한 강력한 설교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7에서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금방 답이 나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겁니다.

안토닌 드보르작은 신세계 고향곡을 쓴 아주 유명한 작곡가 입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새로운 곡을 쓰기 전에는 첫 페이지에 “하나님과 함께”라고 쓰고, 작곡이 끝나면 맨 끝머리에 “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라고 적었습니다. 자신이 작곡하는 곡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모습이 참 감동적입니다.

하나님 은혜를 잊지 않는 성도들은 감사가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청지기 정신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는 동안만 맡겨주신 귀한 것들을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며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생각하고 노력하는 겁니다. 이런 삶엔 교만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습니다.

은혜와 감사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