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어네스트 A. 킬보론(Ernest A. Kilbou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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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앨버트 킬보론은 한국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설립자이자 3대에 걸쳐 한국선교에 이바지한 가족들이다. 킬보론은 1865년 3월13일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태어났고 감리교회에서 신앙교육을 받았다.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 14세에 전신 기술자가 되어 독립 생활을 하게 되었다. 21세에 미국 네바다 주 버지니아에 이주하여 가톨릭 신자였던 줄리아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결혼후에 시카고로 직장을 옮기면서 회사동료 찰스 카우만을 만나 잃어버렸던 신앙을 회복하고 전도의 열정을 품게 된다. 1894년 무디교회에서 개최한 선교대회에서 큰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강사였던 기독교 연합선교회 창설자인 심프슨 박사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로 서원하게 된다. 1899년 무디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1902년 만국 성결 연맹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과거 직장 동료였던 카우만 부부는 일본에 가서 동양선교회 (Oriental Missionary Society· OMS)를 만들어 킬보론을 초청하여 함께 선교사역을 하게 된다. 동양선교회는 동양 여러 나라에 순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일반 성도들 중심으로 조직 된것이다. 특히 선교회는 사중복음(중생,성결,신유,재림) 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킬보른은 1907년5월에 한국에 입국하여 성서학원을 세우고 불타는 신앙의 열심으로 직장, 거리, 공원 등지에서 전도와 기도하며 영혼구원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한국 최초의 성결교의 역사책을 저술한 이명직 목사는 킬보론에 대하여 이렇게 서술했다. “킬보론은 한국의 영혼을 위하여 쉬지않고 기도하는 생애를 보냈다. 밤새도록 잠을 못 주무셔서 두눈이 핏발이 가득 하였다. 그는 우리 조선의 모든 영혼을 위하여 육체의 피곤함을 불구하고 불면불휴하고 기도했다.”

그는 기도 운동을 통하여 복음이 활화산처럼 타오도록 힘쓰고 헌신된 인물이었다. 교회 부흥을 위해 끊임없는 기도운동을 펼쳤다. 1921년에는 킬보론은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를 정식으로 조직 하였다. 조선 감독의 임무를 겸직하고 “활천” 이라는 기관지를 창간하고 후에 교단지 명칭으로 규정하여 교단 창간호를 출간하게 되었다.

활천 간행물도 잠시 일본의 탄압으로 폐간 되었다가 영적 양식을 공급을 위해 더 활발하게 복음적 작품을 발행하게 된다. 전도자 모리슨은 “성경 다음으로 내 영혼을 감동시켰던 책은 킬보론 선교사의 작품 외에는 없었다”라고 술회 하였다. 킬보론의 글은 일하시는 하나님이 교역자들과 함께 동역자임을 강조 하면서 소명 의식을 불러 일으키고 진정한 교역자는 청지기적 사명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봉사자로서 삶을 이 땅위에서 실천해야 함을 역설 하였다. 1924년 초대 OMS (Oriental Missionary Society·OMS) 총재였던 카우만의 소천으로 킬보른 선교사는 2대 총재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선교 단체는 일본, 한국,중국에 성서학원을 설립하여 일본에는 200교회, 중국에는 3,000 교회가 설립되고 조선에는 전도대를 곳곳에 조직하여 한국 성결교회를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28년 4월13일 미국 LA에서 64세로 별세 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한국 선교를 위해 계속 이어졌다. 길보른 2세인 버드 길보른은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성서학원 교수이자 고문, 이사로 지내며 현지 목회자를 양성하는 데 주력 했으며 길보른 3세인 에드윈 길보른과, 어니, 엘머 길보른도 한·중·일을 오가며 선교사역을 지속했다. 특히 장남인 에드윈은 OMS 한국 대표와 서울신학대학 제2대 학장을 거치며 24년간 한국 선교를 펼쳤다. 할아버지로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한국 백성을 사랑하며 선교적 삶을 살아왔던 그들의 흔적을 기억해야 될것이다.(참고문헌: 동양선교회 선교사들과 한국사역, 한국 성결교회사, 양화진 선교사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