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비극영화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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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삼(전 주립병원 정신과의사/시카고)

시카고 한국일보사 세미나실에서 ‘흘러간 명화(?)를 감상하는 모임이 있었다. 그날의 영화제목은 ‘애수(Waterloo Bridge)’. 1940년  명장 마빈 르로이(Mervyn LeRoy)의 작품. 비비안 리, 로버트 테일러, 잘생긴 미남미녀 두분이 우리들의 눈물주머니를 짜내는 멜로드라마였다. 영화 관람객은 얼핏 칠십줄에서 팔십을 넘긴듯 연세들으신 분들이다.

사랑하는 군인 약혼자의 전사소식을 듣고 슬픔으로 앞이 캄캄한 비비안 리는 어려운 시기에 생존을 위해 매춘행위에 까지 미끄러지는 불운을 당한다.  그러나 사망자명단 발표의 실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로버트를 향한 비비안의 변함없는 애정과 존경의 눈빛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로버트 테일러는 비비안의 사랑스러움을 재확인하며 기쁨과 행복속에 비비안과 인생을 출발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1920년대의 사회 도덕적 규범(moral atmosphere )은 비비안 리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처지로 몰아세운다. 어랍쇼! 칠십중반을 지나며 요즈음 세상을 살고있는 나는 도저히 못 마땅한 것이다. 비비안 리가 로버트 테일러를 향한 애절하도록 깊은 애정을 품은 채 안개자욱한 워털루 교량 위에서 달리는 군용 트럭으로 뛰어들어 투신자살을 하다니?!

달콤한 슬품(sweet sorrow)은 또 견줄데 없이 강열한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불러온다고도 하지! 나는 피할 수없는 상황에서 비비안 리가 저지른 얼룩진 과거를 묻어주며 진정한 애정으로 그 여인을 가슴속으로 포옹하는 로버트 테일러를 조금도 주저없이 그리고 있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떠나 살은지도 어느틈에  오십년도 지나 버렸다. 나의 도덕성 비전(vision)에 뚜렷한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인가? 육십년 전, 조조할인 서울 변두리 영화관 흑백영상으로 만났던 사람들. 두 연인의 비극적 사랑의 종말이 오히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한편, 나락에 떨어진 여주인공이 갚아야 하는 불운과 죄값에 연민을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저렇게도 슬프고 참담한 일이 생긴다면 어찌 할 것인가? 비극이 그리는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은 관중의 마음에 연민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윽고 인간적인 감성과 감정의 파도와 함께 마음속으로 어떤 형태로 순화되는 정신적 승화작용(catharsis)이 일어 날 수도 있다고 한다.

살아가는 동안, 부지불식간 우리들 무의식 바닥 깊숙히 숨겨져 집요하게 묻혀있던 마음의 상처나 정신적 콤플렉스(complex)가 비극을 통한 언어, 행동과 감정의 형태와 수단을 타고 밖으로 표출될 수도있게되는 것이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존경받어야 할 착하디 착한 주인공을 자기자신과 동일시하기 시작한 관객은 드디어 주인공이 당하게되는 불운과 고통을 송두리채 내 것으로 껴안으며 슬픔과 연민을 느낀다. 은막 스크린이 꺼지고 분명한 현실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관객은 비극속의 주인공과 자신의 운명과는 사실상 분명히 별개의 것임을 알아차리며 몸서리가 쳐질 듯한 안도감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

‘오랜만에 한 바탕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 지더라, 사람들이 하나같이 천사처럼 보이더라.’ 가까이 지내는 이들과 어울리며 듣을 수도 있는 에피소드. 슬프디 슬픈 비극이나 소설을 관람하거나 읽는 것도 그럴듯한 마음공부를 통해서 도닦는 방법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