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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pril 1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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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8. ‘행동하는 의사·화가’ 홍건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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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의학과 핵의학 분야를 이끈 이민 1세대 전문의이자, 붓끝으로 소외된 이웃의 삶을 기록해온 홍건 박사가 지난 13일 본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은 시카고 미시간 거리의 남미 난민 노점상을 그린 자신의 유화 작품 앞에 선 홍 박사.

시카고서 40여 년간 영상의학·핵의학 이끈 이민 1세대 전문의
▶30여 개국 의료봉사… ‘인생의 십일조’ 실천
▶그림은 기록이자 섬김… 전시 수익 다시 장학과 의료지원으로 환원
▶여성·사회취약층 섬김, 멈추지 않는 봉사

[편집자주]
본지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토대를 일군 원로들의 삶과 발자취를 기록하는 연재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여덟 번째 순서는 시카고에서 40여 년간 영상의학과 핵의학 전문의로 일한 뒤, 은퇴 후 30여 개국 의료봉사와 의학교육, 그림을 통한 섬김으로 삶의 지평을 넓혀온 홍건 박사다. 전문직 이민 1세대의 길을 닦았고, 시카고에서 얻은 것을 다시 가장 필요한 현장으로 돌려준 그의 삶은 ‘실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에티오피아 지와이 의료선교 현장에서 현지 의료진과 주민들, 한국의 후배 의료진이 함께했다. 홍건 박사는 후배들과 함께 2년 과정의 릴레이 의학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현지 의사 양성에 힘썼다.

평생 사람을 살리던 의사는, 은퇴 후 더 깊이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화가가 됐다. 시카고에서 오랜 세월 영상의학과 핵의학 전문의로 일한 홍건 박사는 진료실과 강단, 선교지와 화실을 오가며 지금도 바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은퇴를 삶의 마침표로 받아들이지만, 그의 시간은 오히려 그 이후 더 넓어졌다. 시카고에서 쌓은 전문성과 신앙, 그리고 오래 품어온 예술적 감수성은 아프리카와 북한, 그리고 시카고 지역사회의 현장들로 다시 흘러갔다.

◇ 이면지 위에 피어난 화가의 꿈과 의학의 길

1946년 해방 직후 서울에서 태어난 홍 박사는 고된 피란 시절을 겪었지만, 소년의 손에는 늘 그림이 있었다.

그는 “피란 간 부산의 학교에서 어머니가 교사로 일하시며 쓰고 남은 종이를 가져오시면, 저는 그 뒷면 백지에 그림을 그렸다”며 “부모님께서 보시고는 참 잘 그린다며 칭찬해 주셨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어린 시절(왼쪽)과 서울고 재학 시절의 홍 박사.

학창 시절 각종 미술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화가의 꿈을 키웠지만, 1950년대 한국 사회는 예술만으로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홍 박사는 “미술을 전공하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힘든 길로 가지 말라며 펄쩍 뛰셨다”며 “그러다 고3 때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그때 처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의사라는 직업이 괜찮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결국 미술 대신 의학을 택했지만, 그것은 꿈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래 담아둔 첫사랑에 가까웠다.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뒤에도 그는 예술적 감각을 놓지 않았다. 의대에 들어가자마자 미술부부터 찾아갔을 정도다.

서울의대 재학 시절 함춘원에서 풍경을 화폭에 옮기고 있는 홍건 박사.

그는 “예과 2년과 본과 4년 동안 그림이 너무 좋아서, 미술부 반장까지 맡아 활동했다”며 “의대 동기 중엔 유급당하는 친구들도 (무지하게) 많았는데, 다행히 낙제 한 번 안 하고 무사히 졸업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사람의 몸을 살펴보는 의사의 눈과 대상을 오래 바라보는 화가의 눈은 이 시절부터 함께 자라기 시작했다. 그는 “미대생 친구들이 과제와 국전 입선 문제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내가 의대에 오길 참 잘했구나’ 생각하기도 했다”며 “의대생은 시험이 끝나면 잊어버리고 다음 것만 하면 되니, 공부만 하는 게 사실 제일 쉬운 거였다”고 회상했다.

그의 농담 섞인 회고처럼, 훗날 그의 삶을 떠받친 두 축인 ‘의술’과 ‘예술’의 진정한 출발점은 바로 이 시절이었다.

◇ 낯선 미국행, 버티는 법부터 배웠다

졸업 후 해군 군의관으로 3년간 복무한 그는 1970년대 초 미국행을 결심했다. 당시 미국은 외국 출신 의사들에게 기회의 문이 열려 있었지만, 낯선 땅에서 전문의 수련을 받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해군 ROTC 장교 시절 동료들과 함께한 홍 박사(맨 오른쪽).

홍 박사는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언어와 문화, 의료 시스템이 모두 달라 매 순간 실력으로 나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다”고 돌아봤다. 영어가 특히 큰 장벽이었다. 그는 초창기 수련 시절을 떠올리며 “영어가 서툴러 처음에는 외과부터 돌며 수술실에서 쓰는 말부터 귀에 익혔다”며 “결국은 무조건 외우고, 부딪히며 배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방사선과 수련 초기에는 지금도 웃으며 꺼내는 일화가 있다. 그는 “첫날부터 엑스레이 판독 내용을 딕테이션해야 했는데, 타이피스트들이 저를 불러 세우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젊은 타이피스트가 표현 하나하나를 바로잡아주며 사실상 영어 선생님 역할까지 해줬다. 홍 박사는 의료기록실에서 샘플 리포트를 구해 문장을 통째로 외웠고, 그렇게 버티는 법을 배워갔다.

시카고 이민 초기, 전문의 수련 시절의 홍 박사.

그 과정에서 그는 영상의학과와 핵의학 분야를 자신의 길로 만들었다. 환자를 오래보며 대화하는 진료도 중요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병의 흔적을 영상으로 읽어내는 일은 그의 성향에 더 잘 맞는 분야였다. 그렇게 그는 그 분야를 자신의 전문 영역으로 개척해 나갔다. 그는 시카고 근교 리틀 컴퍼니 오브 메리 병원(Little Company of Mary Hospital)에서 34년 동안 근무하며 핵의학과 과장으로 묵묵히 주류 의료계에 자리를 잡았다.

◇ 치열한 정착기 지탱해 준 가족의 힘

이처럼 고단했던 이민 초기의 삶과 분주한 수련의 과정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 홍경옥 씨의 헌신이 있었다. 불교 집안에서 자란 홍 박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따라간 기독교 동아리에서 성가대 솔리스트였던 아내를 만났고, 10년 연애 끝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젊은 시절부터 인생의 긴 길을 함께 걸어온 홍건 박사 부부. 아내 홍경옥 씨의 고교 졸업식(왼쪽), 세월이 흐른 뒤 유럽 배낭여행에 나란히 선 부부의 모습.

그는 “미국 수련의 시절, 병원 일로 바쁜 저를 대신해 아내가 타국에서 자녀들을 키우느라 정말 고생했다”며 “아내 덕분에 교회를 가게 됐고, 신앙에 뿌리를 둔 가정 안에서 자녀들을 키울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3남 1녀를 정성껏 키워낸 부부는 현재 손주 7명과 증손주 3명을 둔 대가족의 어른이 됐다.

이런 가족애는 특별한 기록으로도 남았다. 자녀들이 대학에 진학해 뿔뿔이 떠나자, 그는 매주 가족신문 ‘더 홍 가제트(The Hong Gazette)’를 발행했다. 홍 박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자녀들에게 가족 소식을 전하려고 시작한 신문이 매주 발행하여 10년 넘게 이어지며 700회를 훌쩍 넘겼다”며 “아이들이 결혼하면서 가족신문은 막을 내렸지만, 훗날 그 기록 정신이 에티오피아 선교 소식을 전하는 ‘선교 신문’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세 식구로 시작한 미국 이민의 첫걸음은 긴 세월을 지나 네 자녀와 며느리, 사위, 손주 7명, 증손주 3명으로 이어지는 대가족의 뿌리가 됐다. 홍건 박사 부부는 이제 그 가족의 중심에서 든든한 큰어른으로 서 있다.

아내는 그가 의사로서 자리를 잡은 뒤에도 그림과 선교, 교육 사역으로 삶의 지경을 넓혀갈 때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다. 그는 “내가 여러 사역으로 뻗어 나갈 때마다 아내는 조용한 응원을 보내줬다”며 “60년을 함께 지내며 부부싸움 한번 없이 살아온 것은 묵묵히 나를 세워주고 양보해준 아내 덕분”이라고 했다.

결국 가족은 홍 박사에게 안식처인 동시에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치열한 정착기를 버티게 해준 것도 가족이었고, 안정된 삶에 머물지 않고 더 넓은 섬김의 자리로 걸어가게 한 것도 가족과 신앙의 울타리였다. 그렇게 그의 삶은 어느 순간 또 다른 질문 앞에 서게 됐다.

◇ “이것이 전부인가?”

홍 박사의 삶은 직업적 성취에서 멈추지 않았다. 병원 생활이 안정을 찾고 교회를 통해 신앙이 깊어질수록, 그의 마음 한편에서는 ‘이것이 전부인가?’라는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안정된 의사로 살아가는 것도 분명 감사한 일이었지만, 내가 얻은 지식과 경험을 더 절실한 곳에 써야겠다는 부르심이 점점 또렷해졌다”고 회상했다. 의사로서의 전문성과 신앙적 책임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1990년대 후반 첫 해외 의료봉사로 이어졌다.

의료선교 현장에서 홍건 박사가 현지 주민 진료와 말씀 사역을 병행하며 섬기고 있다. 그는 은퇴 후 30여 개국에서 의료봉사와 의학교육, 그림을 통한 섬김을 실천해 왔다.

홍 박사는 “페루 아마존으로 첫 의료봉사를 떠났을 때, 시카고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내가 가진 것을 어디에 내어줄 것인가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에게 신앙은 단지 위안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었다. 작은 깨달음을 즉시 행동으로 옮긴 그는 이후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등 30여 개국으로 끝없이 발길을 넓혀갔다.

세계 오지를 누비던 그의 발길은 마침내 같은 민족의 아픔이 있는 북한 나진·선봉 지역에까지 닿았다.

그는 “미주 한인 기독 의사들이 북한 나진·선봉 지역에 병원을 세웠을 때 합류해 두 차례 현지 진료를 다녀왔다”며 “당시 병원에 귀한 CT를 설치했지만 이를 제대로 판독할 현지 전문 인력이 없어, 내가 방문할 때마다 현지 의사들을 모아놓고 가르쳤다”고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이어 그는 “이후 정치적, 환경적인 여러 사정으로 사역이 중단돼 아쉬움이 크다”면서도 “북한이 다시 문을 열고 준비가 된다면 언제든 당장 들어갈 채비가 되어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홍건 박사 부부가 2010년경 기독의사회 수련회에서 20세기 미국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세계적 복음전도자 고(故) 빌리 그래함 목사와 기념촬영을 했다.

◇ ‘인생의 십일조’를 바친 에티오피아 5년

2013년 리틀 컴퍼니 오브 메리 병원에서 은퇴한 그는 편안한 노후 대신 아내와 함께 곧장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로 향했다. 홍 박사는 “50년 의사 생활 중 10분의 1인 5년을 가장 필요한 곳에 바치는 것이 내 ‘인생의 십일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에티오피아에서의 5년은 홍 박사 인생의 두 번째 개척기였다. 그의 의료봉사는 단순한 단기 진료를 넘어 점차 교육과 시스템을 세우는 일로 확장됐다. 처음에는 명성기독병원에서 진료 봉사로 시작했지만, 병원이 자리를 잡아가자 현지 정부의 요청으로 의과대학 설립과 의대생 교육에까지 참여하게 됐다. 환자를 보는 의사에서 다음 세대 의사를 길러내는 스승으로 역할이 커진 것이다.

에티오피아 명성의대 첫 졸업생과 함께한 홍건 박사.

특히 그는 현지 의료의 빈틈을 메우는 데 집중했다. 홍 박사는 “막상 현지에 가보니 수술 없이 환자를 치료하는 ‘중재적 치료(Intervention)’ 방사선 분야가 절실함을 느꼈다”며 “깨달은 즉시 한국으로 건너가 3개월간 신기술을 배워왔다”고 회상했다.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 보여준 놀라운 실천력이었다.

하지만 혼자서 이 모든 것을 전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한국의 후배 교수들을 설득해 매달 한 명씩 에티오피아로 오게 만들었다”며 “그렇게 2년 과정의 릴레이 교육 프로그램을 세워 현지 의사 5명을 직접 수련시켰다”고 설명했다. 이뿐만 아니라, 전무하다시피 했던 핵의학 분야 역시 아디스아바바대학교와 연계해 교육을 시작했고 10명의 전문 인력을 길러냈다.

에티오피아 지와이 의료선교 현장에서 현지 의료진과 주민들, 한국의 후배 의료진이 함께했다. 홍건 박사는 후배들과 함께 2년 과정의 릴레이 의학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현지 의사 양성에 힘썼다.

◇ 영혼을 담는 스케치북

의료봉사 현장에서 그의 손에는 청진기 못지않게 늘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진료 현장의 긴장감, 낯선 땅의 풍경, 사람들의 표정은 짧게는 5분 만에 화폭에 담겼다.

홍 박사는 “일부 아프리카 부족들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굳게 믿어 기겁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며 “그래서 카메라 대신 스케치북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고 웃으며 일화를 전했다.

이어 그는 “가만히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부족 사람들의 경계심이 스르르 풀리고 어느새 곁으로와 마음을 연다”며 “사진이 찰나를 포착하는 것이라면, 그림은 그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영혼을 담아내는 따뜻한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현장에서 그린 스케치는 예기치 않은 기적으로 이어졌다. 흑백으로 복사한 스케치를 제약회사 등 후원자들에게 보내자, 사진과는 또 다른 깊은 울림을 주며 전폭적인 의약품 지원이 쏟아지기도 했다. 이후 지인의 권유로 화폭에 색을 입히기 시작한 그는, 201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시카고와 한국, 프랑스 파리,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24회의 개인전을 열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졌다. 에티오피아 사역 시절에는 지역에 화구상이 없어서 현지에서 원색 안료를 구한 뒤, 요구르트 통에 담아 직접 유화 물감을 만들어 쓸 만큼 그의 예술혼은 뜨거웠다.

홍 박사는 201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시카고와 한국, 프랑스 파리,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24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그림은 오롯이 새로운 ‘섬김의 통로’다. 홍 박사는 전시 수익금 100%를 선교와 장학, 의료 지원에 내놓고 있다. 최근에는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오는 6월 30일부터 7월 5일까지 열리는 ‘제18회 국제기독의사회(ICMDA) 세계대회’ 후원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 대회는 4년마다 한 번씩 개최된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전시회를 통해 모인 수익금을 가난한 나라의 젊은 의사와 의대생들이 제주 국제기독의사회 세계대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항공료 지원을 위해 전액 기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사로 번 것을 봉사에 쓰고, 화가로 얻은 것을 다시 타인을 위해 내놓는 삶. 홍 박사의 예술은 단순한 자기표현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치유하는 또 다른 의술로 묵묵히 확장되고 있다.

◇ 은퇴 이후가 더 바쁜 현역

이처럼 세계를 무대로 한 거대한 나눔 프로젝트를 이끄는 와중에도, 시카고 지역사회를 향한 홍 박사의 발걸음은 멈춤이 없다. 에티오피아 의료선교사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뒤 그의 하루는 현역 시절 못지않게 바쁘게 돌아간다. 시카고 우범지역에 있는 론데일 크리스천 헬스 센터(Lawndale Christian Health Center)에서 25년 넘게 이어오는 무료 영상 판독 봉사는 지금도 변함없는 그의 일과다.

홍건 박사는 2025년 일리노이주의사회(ISMS) ‘올해의 봉사의사상(Physician Volunteer of the Year Award)’ 수상자로 선정됐다. 앞서 2010년 서울대학교 의대인상, 2010년 리틀 컴퍼니 오브 메리 병원 전문진 인도주의상, 2014년 시스터 낸시 보일 어워드상 등을 받으며 의료와 봉사 현장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왔다.

생명을 지키고 다음 세대를 양성하는 일에도 열심이다. 그는 사우스사이드 프레그넌시 센터와 위민스 케어 센터(Women’s Care Center) 등에서도 25년 이상 자원봉사를 하며,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젊은 여성들에게 초음파로 태아의 움직이는 모습과 심장 소리를 직접 들려주고 임신중절 수술을 하지 않고 분만까지의 회복을 돕고 있다. 또한 시카고 메디컬 스쿨(Chicago Medical School) 로절린드 프랭클린 의대에서 교수로서 일하면서 입학사정관 및 교육 봉사를 통해 한인 후배 의사들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내고 있다. 아울러 노던 신학교(Nor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이사로 27년째 헌신하며, 최근에는 한국어 석·박사 학위 과정을 신설해 목회자 양성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홍 박사는 201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시카고와 한국, 프랑스 파리,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24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어 그는 “최근에는 북시카고 지역 교회 관계 담당 대표로서 해마다 100여 개국 아이들에게 성탄절 선물을 보내는 ‘오퍼레이션 크리스마스 차일드(OCC)’ 사역이 1년 내내 아주 중요한 일과가 됐다”고 웃으며 덧붙였다.

은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전문직으로 얻은 것을 자신 안에만 쌓아두지 않고 지역 공동체와 세계로 끊임없이 흘려보내는 그에게서 ‘끝’의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시카고 한인 사회는 그를 두고 ‘드러내기보다 오래, 그리고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가 보여준 진정한 개척은 결국 자신이 선 자리를 넓혀 더 많은 사람에게 길이 되게 하는 것이다.

홍건 박사가 북시카고 지역 교회들과 함께 세계 각국 어린이들에게 전달할 ‘오퍼레이션 크리스마스 차일드(OCC)’ 크리스마스 슈박스를 트럭에 옮기고 있다.

홍 박사는 차세대를 향해 묵직한 당부를 남겼다.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먼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십시오. 그리고 한인으로서 미국 땅에서 얻은 기회와 성취를 지역 사회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어떻게 돌려줄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무언가를 깨달았다면 즉시 행동하세요.”

의사로서 사람을 고치고, 화가로서 영혼을 위로하며, 신앙인으로서 묵묵히 행동하는 삶. 청진기와 화필을 번갈아 쥐며 개척해 온 홍건 박사의 인생 캔버스에는 지금도 ‘섬김과 행동’이라는 따뜻한 색채가 더해지고 있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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