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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May 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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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11. 박성덕 전 재미시카고한인간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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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덕 전 재미시카고한인간호사협회장.

“내 등 뒤에는 항상 태극기가 있었다”

간호 현장에서 조국 알린 ‘민간 외교관’
6·25 참전용사 돌보며 새긴 감사와 사명
암 투병 뒤에도 멈추지 않은 봉사의 삶

[편집자주] 본지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틀을 다진 1세대 원로들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열한 번째 주인공은 연방 공무원 간호사로서 전문직 여성의 표상을 세우고, 평생을 봉사에 헌신해 온 박성덕 전 재미시카고한인간호사협회장이다. 50년 이민 생활 내내 한인 공동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온 그의 삶을 조명한다.

박성덕 회장은 제시 브라운 보훈 메디컬 센터에서 연방 공무원 간호사로 근무한 뒤 2013년 은퇴했다.

박성덕(朴星德)이라는 이름에는 두 지역의 깊은 인연이 담겨 있다. 그는 한국전쟁의 포화가 한창이던 1951년 10월, 경북 영덕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당시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가 성주로 발령받게 된 인연을 기려, 성주의 ‘성(星)’과 영덕의 ‘덕(德)’을 따 ‘성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두 고장의 정기를 이어받은 이름처럼, 그는 훗날 한국과 미국 두 나라를 잇는 가교가 됐다.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 있던 시절, 교육 환경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박 회장은 “학원도 없었고, 전과나 참고서조차 귀하던 시절이었다”며 “누군가 길을 열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아내야 했던 세대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 시절의 어린 박성덕은 일찍부터 자신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아이였다. 단순히 안정된 직업을 얻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마음에 불을 붙인 것은 뜻밖에도 한 권의 잡지였다.

미국에 도착한 1974년, 20대 초반 박 회장의 모습.

◇ 잡지 한 권이 열어준 미국의 꿈

중학교 3학년 시절, 간호사였던 언니가 가져온 잡지 ‘영어세계’는 그의 시야를 세계로 넓혀준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잡지 속에는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마틴 루터 킹 목사 등 미국 사회 인물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어린 박성덕은 그 잡지를 보며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미국 배우와 지도자들의 이야기는 한국 잡지를 통해 우리나라까지 오는데, 왜 우리나라 배우 신성일, 엄앵란의 사진은 미국 잡지에 실리지 않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에 머물지 않았다. ‘외국’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 그에게 미국은 언젠가 반드시 발을 내디뎌야 할 약속의 땅이 됐다.
꿈은 곧 구체적인 진로 선택으로 이어졌다. 교육자였던 부모님의 뒤를 이어 교직에 몸담으라는 주변의 권유도 적지 않았으나, 그의 최종 선택은 간호학이었다.

박 회장은 “당시 여성에게 간호사는 전문직으로서 독립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이었다”며 “무엇보다 내게는 미국으로 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통로였다”고 말했다.

그는 경북대학교 간호대학 69학번으로 진학했다. 당시 간호 교육은 매우 엄격했고, 실습 또한 고단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간호는 단순히 책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학문이 아니었다. 몸으로 부딪치며 현장에서 익히고, 환자의 생명 앞에서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숭고한 직업이었다.

박 회장은 “간호사는 단순히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는 직업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훗날 미국에서 오랜 세월 임상 현장을 지키면서도 이 신념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그는 계명대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신입 간호사에게 첫 병원 생활은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현장에서 매 순간 시험대에 올랐고, 환자 앞에서는 단 한 치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 치열한 현장에서 그는 책임감과 성실함, 환자를 대하는 진정성 있는 태도, 그리고 어떤 위급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간호사의 기본을 배웠다.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직업은 생계 이상의 의미가 있었고, 독일이나 미국으로 떠난 한국 간호사들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동시에 가족과 고국 경제에도 힘을 보탰다. 박 회장 역시 그 거대한 시대적 흐름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미국행에는 보다 간절한 동기가 있었다. 바로 중학생 시절 잡지를 보며 품었던 ‘더 넓은 세상’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는 계명대 병원에서 근무하며 쉼 없이 미국행을 준비했고, 마침내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어왔던 꿈을 현실로 옮길 채비를 마쳤다.

◇ 단돈 60달러로 시작한 미국 생활

1974년 9월, 박 회장은 김포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 해외 이주자에게 허용된 외화 반출액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떠나기 전 전기밥솥과 카메라 등 정착에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하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은 고작 60달러였다.

박 회장은 “단돈 60달러를 들고 떠나는 길이었지만 두려움보다는 기대를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며 “미국행은 단순히 낯선 나라로의 이주가 아니라, 어린 시절 나 자신과 했던 약속을 지키러 가는 당당한 여정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첫 정착지는 인구 3만 명 규모의 조지아주 롬(Rome)이었다. 상상 속의 화려한 대도시와 달리, 그곳은 동양인을 구경하기조차 힘든 미국 남부의 전형적인 소도시였다. 한국인은커녕 아시아 문화 자체가 전무했던 그곳에서 박 회장은 언어와 문화의 거대한 벽에 부딪혔다.

그는 “책으로 배운 영어와 현장의 언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며 “일상의 작은 일부터 전문적인 간호 업무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부딪치며 해결해야 했다”고 말했다.

1976년 1월, 조지아 지역 신문에 소개된 박성덕 회장의 ‘민간 외교관’ 활동. 그는 태극기와 한국 전통 인형을 들고 다니며 한국을 알렸다.

◇ ‘민간 외교관’의 긍지와 헌신

현지 양로원에서 근무를 시작한 박 회장은 특유의 성실함으로 지역 사회의 신뢰를 쌓아 나갔다. 언어 장벽과 낯선 환경으로 인한 외로움이 컸지만, 그는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했다. 양로원 측에선 그를 계속 붙잡아두기 위해 집까지 지어주려 했을 만큼, 그의 업무 능력과 성실함은 현장에서 깊은 신뢰를 얻었다.

박 회장에게 간호사라는 직업은 단순히 생계를 잇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조지아의 작은 도시에서 한국을 알리는 사실상 유일한 ‘얼굴’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했다. 그는 늘 태극기와 한국 전통 인형을 가지고 다니며 만나는 이들에게 조국을 소개했다. 지역 신문과 인터뷰할 때도 간호사로 사는 삶뿐 아니라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정성을 쏟았다.

누군가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제 나라를 알리고 싶어서요.”

그에게 간호복은 전문직의 상징이었고, 마음속 태극기는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이었다. 미국 생활의 출발점에서부터 박 회장은 이미 간호사 가운을 입은 ‘민간 외교관’으로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기원하며 시카고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박성덕 회장.

◇ 시카고 정착과 평생의 동반자

1977년, 박성덕 회장은 간호사였던 언니가 시카고로 오게 되면서 조지아를 떠나 시카고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시카고 정착 후 잠시 고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평생의 동반자가 될 박위환 씨를 만났다. 두 사람은 인연을 이어가다 1978년 4월 화촉을 밝혔다.

박 회장은 남편에 대해 “유머와 지식을 겸비한 사람”이라며 “무엇보다 내가 밖에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늘 이해하고 믿어준 사람”이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또한 “마음 놓고 일과 봉사에 전념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남편의 지지가 큰 힘이 됐다”며 “남편은 저의 삶을 든든히 받쳐주는 가장 가까운 조력자”라고 소개했다.

남편은 바쁜 간호사 아내를 배려해 요리와 장보기를 함께 나누며 가정을 꾸려 나갔다. 이러한 남편의 헌신적인 지지는 박 회장이 전문직 여성으로서, 또 한인 사회의 리더로서 활동의 폭을 넓혀가는 데 단단한 밑거름이 됐다.

◇ 미국 병원에서 배운 존중의 문화

박 회장은 시카고 제시 브라운 보훈 메디컬 센터(Jesse Brown VA Medical Center)에서 연방 공무원 간호사로 오랜 세월 근무한 뒤 은퇴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세 가지 선택으로 ‘간호학 전공’, ‘미국 이민’, 그리고 ‘보훈병원 근무’를 꼽을 만큼 이곳에서의 시간에 각별한 의미를 둔다.

박 회장에게 보훈병원은 단순한 일터를 넘어, 미국 사회의 성숙한 시스템과 그 속에 담긴 ‘인격’을 배운 학교였다. 그는 “의사가 바닥에 쏟아진 물을 직접 닦고,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병원장과 간호부장이 산타 모자를 쓴 채 환자들을 찾아 봉사하는 모습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높은 직위일수록 먼저 낮아지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미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화를 현장에서 목격한 그는, 권위보다 책임감을 앞세우는 병원 문화의 강점을 높이 평가했다.

아시안 보건센터, 신장재단, 골수기증협회 등에서 봉사를 이어온 박성덕 회장.

박 회장은 미국 사회에서 간호사가 받는 존중도 깊이 기억하고 있다. 그는 “미국은 군인과 간호사, 선교사를 하늘같이 받드는 나라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며 “공항 경찰이 간호사는 ‘노블(Noble), 고귀한 직업’이라고 말해준 적도 있고, 한 백인 할아버지가 병원 입구에서 친구에게 ‘간호사는 어머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그 말들은 그에게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더욱 깊게 새겨줬다.

◇ 참전용사에게 전한 감사의 마음

보훈병원 간호사로서 만난 환자 중에는 한국전 참전용사들도 많았다. 박 회장에게 이들은 단순히 병상에 누운 환자가 아니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 있던 한국을 위해 싸워준 은인들이었다. 그는 참전용사를 만날 때마다 “당신들이 이름도 모르는 나라를 위해 헌신해 주셨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생각에 매번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는 “한국전 참전용사라는 말만 들어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며 “우리나라를 위해 싸워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 따뜻한 한마디는 환자들에게는 깊은 위로를, 박 회장에게는 한국인 간호사로서의 뜨거운 자부심을 안겨줬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몸은 비록 미국 병원에 있었지만, 내 등 뒤에는 항상 태극기가 있었다”고 표현했다.

◇ 가운은 벗어도 손길은 멈추지 않는다

월남전 고엽제 참전자인 고 김종치 대령의 치료를 도운 박성덕 회장. 박 회장의 알선으로 김 대령은 두 차례 수술과 네 곳의 병원 진료를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박 회장은 “간호사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배움을 실천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에게 간호는 단순한 생업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아픔 곁에 서고, 두려운 순간을 함께 견디며, 생명을 살피는 일이었다. 그는 “간호사로 살아온 삶에 후회가 없다”며 “다시 태어나도 주저 없이 간호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마음은 은퇴 후에도 일상의 습관으로 남아 있다. 박 회장의 주머니에는 지금도 늘 사탕 몇 알과 일회용 밴드가 들어 있다. 사탕은 저혈당 증세가 올 수 있는 당뇨 환자를 위해, 밴드는 예기치 않게 다친 사람을 돕기 위해 챙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큰 핸드백이 아닌, 활동하기 편한 크로스백을 항상 메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든 응급상황이 생기면 즉시 심폐소생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은퇴 후에도 그의 몸에는 현장을 누비던 간호사의 긴장감과 준비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의 봉사는 한인사회 곳곳으로 이어졌다. 재미시카고한인간호사협회장을 비롯해 시카고한인회 부회장, 민주평통 시카고협의회 부회장 등 여러 직책을 맡으며 공동체의 일에도 앞장섰다. 보건의료 분야뿐 아니라 노인, 여성, 장애인, 평화통일 관련 활동까지 그의 발걸음은 필요한 곳을 향했다.

박 회장은 “부탁을 받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도 있지만, 우리 공동체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몸이 먼저 움직였다”고 말했다. 그에게 봉사는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 간호사로 살아온 사람이 자연스럽게 이어간 삶의 방식이었다.

메모리얼데이 퍼레이드에 한복을 입고 참석해 한국 문화를 알린 박성덕 회장.

◇ 멈추지 않는 개척자의 발걸음

박 회장은 2008년부터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해 올해로 18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공항은 누군가에게는 설레는 여행의 출발점이지만, 언어가 서툴고 절차가 낯선 한인 노인과 이민자들에게는 거대한 미로처럼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박 회장은 터미널을 헤매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탑승권을 확인해 주고, 탑승구를 안내하며, 와이파이 연결이나 비행기 모드 설정 같은 작은 일까지 도와준다.

그는 “어르신들에게는 그런 작은 도움이 큰 안심이 된다”며 “한국 여행객들을 도울 때마다 간호사 시절 못지않은 보람을 느낀다”며 미소 지었다.

봉사는 공항 밖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싱싱실버 노인센터에서 10년 넘게 어르신들에게 카카오톡과 QR코드 사용법 등을 가르치며 ‘디지털 전도사’ 역할을 해왔다. 아시안 보건센터, 신장재단, 골수기증협회 등 그의 손길이 닿은 곳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벅차다. 병원 안에서 환자를 살피던 간호사의 손길은 이제 공항과 노인센터, 커뮤니티 곳곳으로 이어져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박 회장은 2008년부터 18년째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에서 자원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 암 투병이 일깨운 소명

박 회장의 삶에도 큰 고비는 있었다. 2013년, 그는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암은 임파선과 식도까지 전이된 상태였고, 8차례 큰 수술과 힘든 회복 과정을 견뎌야 했다.

박 회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의사는 길어야 7년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시간을 넘어 13년 이상 보람되게 잘 살아가고 있다”며 “살아 있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투병은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평생 간호사로 환자를 돌보던 그가 이번에는 환자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생명의 연약함과 살아 있음의 무게를 몸으로 배운 시간이었다.

지금도 약 부작용으로 오한과 어지럼증이 찾아올 때가 있지만, 박 회장은 봉사의 자리를 쉽게 놓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며 “남은 삶을 남을 돕는 데 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죽음의 문턱을 지나온 경험은 그의 봉사를 멈추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박 회장은 싱싱실버 노인센터에서 10년 넘게 어르신들에게 카카오톡과 QR코드 사용법 등을 알려주며 디지털 생활 적응을 돕고 있다.

◇ 받은 것을 다시 나누는 삶

박 회장의 헌신은 여러 수상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미국 대통령 자원봉사자상과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시카고 시장 모범시민상, 대한 간호사협회 80주년 기념 공로상, 아시안 명예의 전당 헌액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로를 인정받았다. 최근에는 일리노이주 재무관실이 주최한 아시안 유산의 달 행사에서 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커뮤니티 봉사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박 회장은 상을 개인의 영예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이 상들은 내가 혼자 잘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한인사회가 함께 인정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봉사는 보상을 바라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것을 공동체에 다시 돌려주는 삶의 방식이었다.

최근 일리노이주 재무관실이 주최한 아시안 유산의 달 행사에서 ‘커뮤니티 봉사상’을 수상한 박성덕 회장. 오른쪽은 마이클 프레릭스 일리노이주 재무관.

그 나눔은 모국으로도 이어졌다. 박 회장은 2008년부터 한국의 여러 대학에 초청돼 특강을 하며 예비 간호사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전문직 여성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전해왔다. 그는 후배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라고 말하면서도, “실력만큼 중요한 것은 사람을 향한 진심”이라고 강조한다.

박 회장이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당부는 분명하다. “자신의 뿌리를 잊지 말 것,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기꺼이 도울 것, 그리고 반드시 자신만의 전문적인 직업을 가질 것.”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는 경제적·직업적 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가정과 사회에서 당당하게 자아를 실현하라”고 조언했다.

가족들과 함께한 박성덕 회장. 가족은 그의 미국 생활과 봉사 활동을 지탱해 준 든든한 힘이 됐다.

슬하의 1남 1녀 가운데 딸 에스더 씨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존 스트로저 쿡카운티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박 회장에게 딸이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직업의 대물림이 아니다. 사람을 돌보는 일의 가치가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박 회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선물로 받은 삶’으로 여긴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시간이라 생각한다”며 “그 시간을 이웃을 돕는 데 쓰고 싶다”고 말했다.

보훈병원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를 돌본 간호사로, 낯선 미국 땅에서 조국을 알린 민간 외교관으로, 암 투병의 고비를 넘어 공항과 커뮤니티에서 손을 내미는 봉사자로 살아온 박성덕 회장.

그의 삶은 한 사람의 성공담을 넘어, 받은 사랑을 다시 이웃에게 돌려주는 시카고 한인 이민사의 아름다운 한 페이지로 기록되고 있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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