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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une 1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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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18. 시카고 영화 유학생 1호, 손만성 콜롬비아 컬리지 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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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만성 콜롬비아 컬리지 전 교수가 3일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윤연주 기자>

“기록하지 않으면 역사는 사라집니다.”
미주 영상 역사의 산증인… 방송·영화 현장 60년
시카고 최초 한인 TV 방송과 MBC ‘억새바람’ 현지 제작
50년 한인사회 영상 기록… “후세들에게 전하고 싶다”
멈추지 않는 도전… ANN·이동식 영화박물관 계획

[편집자주] 본지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틀을 다진 1세대 한인들의 삶을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열여덟 번째 인물은 미국 중서부 방송·영화계에서 현장 기술 전문가이자 교육자로 활동해온 손만성 콜롬비아 컬리지 전 교수다. 1964년 영화 유학생으로 미국에 온 그는 반세기 넘게 시카고 한인사회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해 왔다. 그의 카메라는 이제 시카고 한인 이민사의 기억을 담아내는 눈이 됐다.

1966년 컬럼비아 칼리지 재학 시절, 작품 촬영에 참여하고 있는 손 교수.

◇ 말보다 오래 바라보는 법을 배운 아이

휴대전화를 켜고 손쉽게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는 지금과 달리, 손만성 교수가 지나온 필름의 시대는 매 순간이 현장이었다. 촬영 전 렌즈와 셔터, 필름 상태를 확인하는 일은 기본이었다. 작은 기술적 결함 하나가 촬영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 교수의 카메라는 장비를 정확히 다루는 기술에서만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 바탕에는 사람과 사물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 시선의 출발점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손만성 교수는 1940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아버지가 홀로 외아들을 키웠다. 해방 무렵 서울로 이사했지만, 학교를 다니는 일도 쉽지 않았다. 손 교수는 “매일 험한 산을 넘어 학교에 다녀야 했고, 교실에 늘 늦게 도착하기 일쑤였다”며 “기초 학업을 제대로 쌓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6·25 전쟁은 그를 피란길로 내몰았다. 천안과 성환 일대에서 인민군이 총을 들고 오가던 풍경, 멀리서 들리던 포성과 비행기 소리는 어린 소년의 기억에 깊이 남았다.

유년의 결핍은 그에게 다른 감각을 남겼다. 어머니의 부재와 잦은 환경의 변화 속에서 그는 어느 순간부터 말수가 줄었다. 누군가 말을 건네면 먼저 듣고, 사람과 사물을 오래 바라보는 아이가 됐다. 훗날 카메라를 들고 공동체의 시간을 기록하게 된 그의 시선도 그 시간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학업을 이어가는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공부를 포기하려던 시기도 있었지만, 주변에는 그를 붙잡아준 이들이 있었다. “멈추지 말고 공부를 하라”고 격려해 준 지인들의 도움으로 그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고,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 그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에게 맞는 자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 앞보다, 장면을 만들어내는 카메라 뒤편이 더 편했다. 손 교수는 “연기는 적성이 아니었다”며 “영화와 방송,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의 세계에 매료됐다”고 웃어 보였다.

그렇게 대학 4학년의 끝자락, 그의 인생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미국 유학이었다.

1980년 시카고 버킹엄 분수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손 교수. 아내 헬레나 여사와 두 아들은 그의 삶을 지탱해 준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

◇ 시카고 한인 영화 유학생 1호

1964년 5월, 스물네 살의 청년 손만성은 시카고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자신을 “영화 분야로 시카고 유학을 온 한인 1호”라고 기억한다. 처음 꿈은 미국에서 텔레비전과 영화 기술을 배운 뒤 고국으로 돌아가 방송 현장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 방송은 막 성장하던 시기였고, 그는 미국에서 익힌 영상 기술을 한국 방송국에서 펼쳐보고 싶었다.

시카고에서 그는 컬럼비아 칼리지의 매스커뮤니케이션 과정에 입학해 학부 과정을 다시 시작했다. 당시 매스커뮤니케이션은 지금처럼 영화, TV, 라디오, 신문이 세분화되기 전이라 한 과정 안에서 여러 매체를 함께 배울 수 있었다.

당초 계획은 2년 정도 공부한 뒤 귀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학 초기 전해진 아버지의 부고는 그의 삶을 흔들었다. 국제 연락이 쉽지 않던 시절이라 그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소식을 들었다. 손 교수는 “그때부터 3년 동안 무척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부모님을 향한 마음이었다. 그는 “살아서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 무엇일지 생각했고, 공부를 끝까지 마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도 더는 기대고 돌아갈 집이 없다는 막막함 속에서 그는 시카고에 남았고, 4년 과정을 마쳤다.

언어의 장벽도 높았다. 영어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채 미국에 온 그는 일상 회화는 물론 방송·영화 현장의 전문 기술 용어까지 새로 익혀야 했다. 손 교수는 “현지인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 시간은 훗날 미국 방송·영화 현장에서 신뢰받는 실무형 영상 전문가로 성장하는 밑바탕이 됐다.

1968년 CBS-TV 인턴십 당시의 방송 현장. 손 교수는 이 시기 미국 방송 제작 현장을 배웠다.

◇ 카메라 렌즈를 꿰뚫은 현장 전문가

컬럼비아 칼리지 졸업 후 손 교수는 WBBM-TV(Ch 2)와 WFLD-TV(Ch 32)에서 인턴십을 거쳤다. 손 교수는 “당시 방송국에 들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고 털어놓았다. 이후 NBC-TV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방송국이 아닌 장비와 현장을 더 깊이 배우는 길을 택했다.

그 선택은 한 지인의 소개로 시카고의 대형 영화 제작·장비 회사인 비렌즈(Behrends)에 입사하면서 이어졌다. 미 중서부 최대 규모의 영화 장비 회사였던 그곳에서 그는 1968년부터 1984년까지 17년간 현장 기술 전문가로 근무했다. 카메라 대여 전후로 렌즈, 셔터, 필름, 조명 등 장비 상태를 점검하고, 촬영 현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을 찾는 일이 그의 역할이었다.

1994년 영화 ‘공공의 적’ 촬영 현장에서 현지 TV 방송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손 교수.

손 교수는 현장에서 카메라와 렌즈를 몸으로 배웠다. 카메라 구조를 이해하는 데 남다른 호기심이 있었고, 그렇게 쌓은 경험은 그를 영화·방송 현장에서 신뢰받는 기술감독이자 테크니컬 어드바이저로 이끌었다.

1974년에는 미국 영화텔레비전기술자협회(SMPTE)에 정회원으로 가입했고, 이후 지역 이사로 활동했다. 손 교수는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매우 이른 시기에 SMPTE에 참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한 동물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남극에서 촬영하던 중 카메라가 얼어붙자, 햄 라디오(아마추어 무선)를 통해 시카고에 있던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손 교수는 무선 수신기 너머로 해결 방법을 안내해 촬영을 이어가게 했다. 그는 “수많은 카메라 중 현장에서 그렇게 임시로 조정할 수 있는 장비는 한 종류뿐이었다”며 “그 내부 구조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영상 제작은 책과 이론으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필름을 만지고, 렌즈를 살피고,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며 익히는 세계였다. 그는 훗날 제자들에게도 늘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시카고 최초 한인 TV 방송을 열다

손 교수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장면은 1978년 문을 연 시카고 최초의 한인 TV 방송이다. 그는 MKTC(Midwest Korean Television Corporation)를 설립하고, 현지 방송국 WCIU-TV(채널 26)의 시간대를 빌려 한국어 방송을 시작했다. 처음 30분으로 출발해 1시간으로 확대된 이 방송은 약 3년간 이어졌다.

시작은 그가 제작해온 태권도 기록영화였다. 1978년 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시사회에는 이경훈 총영사와 공보관 등 지역 인사들이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한 인사가 투자를 약속하며 한인 방송국 설립을 제안했고, 손 교수는 링컨길에 사무실을 얻어 방송 제작에 뛰어들었다.

손 교수가 운영하던 SMS프로덕션 회사 전시장의 일부. 이 장면은 당시 시카고 영화 전문 잡지의 특별 취재를 통해 소개됐다.

방송에서는 영사관을 통해 들어온 대한뉴스와 자체 제작한 시카고 한인사회 소식, 한국 영화 등이 방영됐다. 당시에는 뉴스와 광고도 모두 필름으로 촬영하고 현상·편집해야 했다. 손 교수는 “매달 들어가는 필름값과 현상비만 해도 상당했다”고 당시 제작 환경을 설명했다.

처음 투자를 약속했던 이는 곧 부담을 느끼고 물러났다. 그러나 이미 시작한 방송을 쉽게 접을 수는 없었다. 손 교수는 “당장 문을 닫으면 원망을 듣는 사람은 결국 나였다”며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문화사업’의 무게와 재정적 압박 속에서 방송은 3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 3년은 시카고 한인사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 타국 땅에서 한인들이 TV를 통해 한국어 뉴스와 한국 영화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 교수는 “당시 여러 한인 미디어들이 서로 힘을 모으지 못했다”며 “그때 다 함께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1994년 시카고 레이크쇼어에서 진행된 영화 ‘공공의 적’ 촬영 현장. 배우와 스태프들이 함께하고 있다.

◇ 시카고를 무대로 한 작품들

손 교수의 영상 작업은 TV 방송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뮤직비디오, 극영화,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로 이어졌다. 그는 1960년대 후반 뮤직비디오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손 교수는 “훗날 한 필름 현상소 관계자가 ‘시카고에서 최초로 뮤직비디오를 만든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해줬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 작업은 시카고 영상사의 의미 있는 초기 시도 중 하나였다.

1984년부터는 SMS프로덕션을 운영하며 독립 영화와 다큐멘터리, 방송·영상 제작 현장을 지원했다. 장비와 촬영 기술에 대한 오랜 경험은 그가 시카고를 무대로 한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기반이 됐다.

그의 현지 제작 경험이 크게 발휘된 작업은 1992년 MBC 창사 특별기획 드라마 ‘억새바람’ 16부작의 시카고 촬영이었다. 한인 이민사를 다룬 작품으로, 한국 제작진과 배우 25명, 현지 스태프 25명 등 총 50여 명이 움직였다. 시카고 현지 제작을 맡은 그는 로케이션 선정부터 장비 조달, 스태프 구성, 식사와 일정 조율까지 촬영 전반을 챙겼다.

1992년 MBC 창사 31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억새바람’ 첫 장면. 한인 이민사를 다룬 이 작품의 미국 제작 코디네이터로 손 교수가 운영하던 SMS프로덕션이 참여했다.

처음에는 기존 일과 병행하려 했지만 곧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아내와 함께 호텔에 머물며 한국 제작진과 약 3개월간 동고동락했다. 한국과 미국의 제작 방식 차이를 조율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한국 음식과 미국 음식을 따로 준비해야 할 만큼 현장 관리가 만만치 않았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한인 무술인 박호성과 함께 현지 무술 극영화 ‘북 오브 소드(Book of Swords)’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 작품에는 손 교수가 오랫동안 보관해온 특별한 카메라가 사용됐다. 그는 “잭 니콜슨 주연의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촬영했던 카메라를 직접 구입해 보관하고 있다가 이 작품에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손 교수에게 카메라는 현장의 기억과 영화의 시간을 품은 기록의 도구였다.

한인 교포 주연 배우와 타이맥(Taimak)이 함께 출연한 영화 촬영 현장. 배우와 스태프들이 함께한 모습.

◇ 1,000여 명의 제자에게 전한 영화의 힘

손 교수는 컬럼비아 칼리지의 텔레비전·영화예술학과에서 시네마토그래피(영상 촬영학)와 카메라 전반을 가르쳤다. 반세기 동안 그가 가르친 제자만 해도 1,000명이 넘는다. 제자들은 미국 주요 방송국과 영화계, 한국 영상 산업 등 다양한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시카고 WGN-TV에서 50년간 카메라맨으로 일하다 은퇴한 제자부터 한국의 전문 컬러리스트까지 분야도 다양하다.

손 교수는 “종종 영상물 엔딩 크레딧의 ‘스페셜 땡스(Special Thanks)’에서 내 이름을 발견할 때가 있다”며 “내가 가르친 영화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우뚝 선 모습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그가 강단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한 것은 ‘현장’이었다. 손 교수는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화는 이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영화를 감상하는 데 그치지 말고, 감독이 왜 그렇게 찍었는지, 어떤 기술적 고민이 있었는지 질문하라고 가르쳤다.

1989년 퓨리나 인터내셔널(Purina International) 광고 제작 당시의 모습. 시카고의 대형 광고회사가 제작한 이 프로젝트에는 20여 개국이 참여했으며, 손 교수는 한국 관련 기획을 담당했다.

손 교수는 영화 교육의 힘도 바로 그 제작 과정에 있다고 봤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촬영, 조명, 편집, 연출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서로의 역할을 이해하고 책임을 나누는 과정 자체가 공동체를 배우는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 교육은 청소년뿐 아니라 노년층에게도 의미가 있다”며 “청소년에게는 타인과 어울려 일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노년층에게는 자신의 기억을 영상으로 되살리는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영화 인생을 함께 지켜낸 가족

손 교수의 치열했던 60년 영화 인생은 아내 헬레나 여사의 헌신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1969년, 태권도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문화와 종교의 벽, 그리고 처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부가 됐다. 처가의 반대를 딛고 시작된 신혼이었지만, 훗날 장인·장모는 그를 친자식처럼 아꼈다. 장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장모를 모셨다.

1982년 큰아들 마이클의 유대인 성인식(Bar Mitzvah)에서 가족과 함께한 손 교수. 장인·장모(사진 왼쪽)는 그를 친자식처럼 아꼈다.

손 교수는 “내가 주중엔 풀타임으로 일하고 밤과 주말마다 촬영과 방송에 매달릴 수 있었던 건 전부 아내 덕분”이라며 “아내가 지지해 주지 않았다면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삶”이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두 아들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든든하게 뿌리를 내렸다. 큰아들 마이클 씨는 네이퍼빌 경찰서 지휘관으로 근무한 후 은퇴했고, 둘째 스티븐 씨는 심리학 박사로서 배심원 선정 관련 전문 분야에서 활약 중이다.

1978년 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미주 최초 태권도 기록영화 상영회. 당시 시카고 총영사와 태권도 관계자, 영화인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 역사는 유명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손만성 교수가 한인사회를 영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데에는 계기가 있었다. 유학 시절 과제를 쓰기 위해 도서관에서 한국 관련 자료를 찾았지만, 중국과 일본 자료에 비해 한국 자료는 거의 없었다. 한국전쟁 관련 책 몇 권이 전부였다. 그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

손 교수는 “이거 정말 한국 자료가 없구나. 뭐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날 이후 그는 카메라를 들었다. 화려함보다 ‘남기는 기록’에 집중하며 한인회, 교회, 문화행사, 이민자들의 거리와 얼굴을 필름에 담았다. 다운타운 감리교회에 모이던 300여 명의 유학생들, 클락 거리를 채웠던 아리랑과 삼미장 식당 등 초기 한인 상점들의 풍경도 그의 렌즈를 통해 기록으로 남았다.

그의 필름에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주요 장면들도 담겼다. 미시간 애비뉴 퍼레이드, 로렌스 거리에서 열린 한인 행사,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퍼레이드, 한인회장 선거 등이 그 예다. 특히 홍두영 당시 아리랑 라이온스클럽 회장 등과 함께 진행한 한국 입양아 가족 행사는 입양아와 가족들에게 한국 음식과 문화를 나누며 정체성을 전하려 한 자리였다.

2019년에는 그가 50년 넘게 모은 2천 시간이 넘는 영상 기록을 바탕으로 회고전 ‘우리들의 이야기’가 열렸다. 관객들은 필름 속에 남은 시카고 한인사회의 지난 시간을 다시 만났다. 손 교수는 이 제목에 자신의 기록 철학이 담겨 있다고 했다. 그는 “역사는 유명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라며 “낯선 땅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모든 이민자들의 얼굴이야말로 시카고 한인사의 가장 중요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2019년 시카고 한인문화회관에서 열린 손만성 감독의 영상 회고전 ‘시카고 50년 이민사 기록’ 행사 브로셔.

◇ 멈추지 않는 도전

여든여섯의 나이에도 손 교수의 시선은 여전히 미래를 향해 있다. 체력은 예전 같지 않고, 젊은 시절처럼 카메라를 들고 뛰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 그는 “내가 죽고 나면 이 소중한 역사들이 사라져 버리는 게 가장 아쉽다”며 “60년 넘게 배우고 겪으며 필름으로 붙잡아 둔 이민사의 유산을 후세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손 교수의 도전은 지금도 현재형이다. 그가 평생 모은 영화 장비 수백 점을 한국 강릉의 영화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그는 남은 장비를 활용해 남녀노소가 함께 영화와 영상을 배울 수 있는 ‘이동식 영화박물관’도 꿈꾼다.

2014년 9월 2일자 본보에 게재된 손만성 감독 전시관 관련 기사. 한국 강릉에 개관한 ‘시카고 손만성 감독 전시관’에는 손 교수가 기증한 영상 장비와 자료들이 전시됐다.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ANN(Asian News Network)도 계획하고 있다. 아시아계가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고 소유하며 힘을 모으는 방식으로, 아시아계 커뮤니티를 하나로 연결하는 프로젝트다.

AI를 비롯한 새로운 영상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에도 그는 기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동시에 새 기술을 배우고, 이를 영상 교육과 기록 작업에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손 교수는 “필름의 문법과 현장의 경험, 변화하는 기술이 함께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동체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평생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손만성 교수. 그가 담아온 필름과 기록은 다음 세대가 뿌리를 돌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 되고 있다.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시간들. 그의 카메라는 오늘도 그 기록을 향해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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