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시대와 역사를 향해 질문해야 한다”
▶산골 소년에서 기자로, 사회 변화를 꿈꾸다
▶1975년 시카고 특파원 부임, 이민자의 길잡이가 된 한국일보
▶광주항쟁 보도, ‘기자의 양심’을 택하다
▶진보와 보수, 남과 북의 경계에서 지킨 펜의 중심
▶독립운동가 아버지의 기록에서 이민사 집필로 이어진 삶
[편집자주] 본지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틀을 다진 1세대 한인들의 삶을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인물은 1975년 한국일보 시카고 특파원으로 부임한 뒤 반세기 가까이 시카고 한인 언론과 이민사 현장을 지켜온 조광동 전 시카고 한국일보 편집국장이다. 그는 1980년 광주항쟁 당시 한국 본사의 검열 지침에 따르지 않고 광주의 진실을 보도했다. 이후 민주화운동, 방송·라디오·칼럼 활동, 집필을 통해 한인사회 안팎의 문제를 기록해왔다. 굴곡과 실패, 갈등 속에서도 끝내 ‘기자로서의 질문’을 놓지 않았던 그의 삶을 따라가 본다.
◇ 침묵할 것인가, 기록할 것인가
1980년 5월, 시카고 한국일보 편집국에는 주류 외신을 통해 들어온 광주항쟁의 소식이 쉴 새 없이 쌓이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언론들이 계엄과 검열 속에 침묵하던 때였다. 당시 시카고 한국일보 조광동 편집국장은 서울 본사의 지침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침묵할 것인가, 기록할 것인가. 그는 기록을 택했다.
조 국장은 외신 자료를 바탕으로 광주의 참상을 미주판 지면에 과감하게 실었고, 신군부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 그 선택은 그의 기자 인생을 바꿨다. 본사에서는 지침을 따를 것인지, 신문사를 그만둘 것인지 선택하라는 압박이 내려왔다.
당시 그는 영주권도 없는 특파원 비자 신분이었다. 한국에서 오랜 교제 끝에 결혼한 아내가 막 미국에 온 직후였고, 첫아이도 갓 태어난 때였다. 조 국장은 “신문사를 떠난다는 것은 이국땅에서 신분과 생계가 모두 흔들리는 일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그는 끝내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본국 신문이 계엄과 검열 때문에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시카고에서라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이듬해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기자의 양심으로 내린 그날의 결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20여 년이 흐른 2001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광주항쟁 보도와 활동을 인정해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회복 통지서를 전달했다. 조 국장은 보상금 신청은 사양했다.
그는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해서 보상까지 받을 일은 아니었다”며 “내가 기자로서 해야 했던 일에 대한 기록, 그거 하나만 남기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광주 보도는 언론이 침묵의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평생의 기준이 됐다. 그날 이후 그의 삶은 안온하고 보장된 언론인의 길이 아니라, 시대와 불화하더라도 진실을 묵묵히 써 내려가는 길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꼿꼿한 기준의 뿌리는 더 오래전, 산골 소년 시절 품었던 꿈과 부당함 앞에 고개 숙이지 않던 기질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내 마음의 고향은 옥방
조광동 국장은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세 살 무렵 아버지가 경상북도 봉화군 옥방의 중석광산으로 내려가면서 그곳에서 약 10년을 살았다. 강원도 울진과 경북 봉화가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던 첩첩산중이었지만, 조 국장은 옥방을 “내 영혼이 성장한 마음의 고향”으로 기억한다.
산골 소년의 꿈도 그곳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문집에 장래희망을 쓰며 처음에는 에디슨 같은 발명가를 적었다가, 마감 직전 ‘링컨 같은 정치가가 되어 남북통일을 이루겠다’고 고쳐 썼다.
서울로 이사하고 중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그는 가정환경조사서 장래희망란에 ‘정치가’라고 썼다. 담임교사가 그 말을 하자 교실에는 느닷없는 웃음이 터졌다. 조 국장은 “공업학교에 딸린 중학교였으니 친구들 대부분은 기술자나 공장장을 꿈꿨다”며 “산골에서 온 아이가 정치가라고 쓰니 낯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뒤 그는 꿈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조선일보 배달을 하며 동경하게 된 ‘기자’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기 시작했다.
◇ 재봉틀 공장에서 올려다본 하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는 홀로 두 아들을 키워야 했다. 집안을 돕기 위해 조 국장은 공업학교에, 남동생은 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조 국장은 경기공고 기계과에 들어갔지만, 학교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학교생활과 실습장은 행복한 공간이 아니었다”며 “마음이 늘 무거웠고, 소년의 꿈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고등학교 졸업 전 여름방학, 공장 실습장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재봉틀 머리를 깎고 구멍을 뚫던 순간, 시커먼 쇠붙이 위로 코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수돗가에서 피를 씻고 고개를 들었을 때,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피어 있었다”며 “그 순간 옥방 산골에서 냇가에 누워 하늘을 보던 소년 시절과 잊고 있던 꿈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 길로 담당 선생에게 가 실습 중단을 선언하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저 대학 가겠습니다.”
어머니의 묵묵한 침묵 속에서 그는 대학 진학을 결심했고, 고군분투 끝에 경희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시절 역시 방황의 연속이었다. 군 제대 후, 그는 나약한 지성을 버리고 자신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인생의 “리엔지니어링(재구성)”이라 불렀다.
배낭을 메고 80일간 혼자 길을 떠났다. 40일은 비포장 신작로를 걸었고, 40일은 무주 구천동 덕유산에 텐트를 쳤다. 그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사투리 때문에 웃음거리가 된 이후 생긴 말더듬 트라우마를 깨부수기 위한 치열한 훈련이었다. 등산객이 없는 새벽마다 덕유산 꼭대기에 올라 웅변 원고를 외치고 발성 연습을 했다. 목이 잠기면 소금물로 목을 달래며 스스로를 다시 세웠다.
그는 “그 시간이 없었다면 훨씬 나약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며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지고 소중했던 시간이었다”고 돌아봤다.
◇ 한국일보 기자가 되다
1972년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 이후 언론과 정치 활동이 강하게 통제되면서 언론 채용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조 국장은 생계를 위해 잠시 제일은행에 들어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이내 사표를 던졌다.
얼마 후 기회가 찾아온 중앙일보 기자 시험. 하지만 최종 면접에서 삼성 이병철 회장을 마주했을 때, 그의 대쪽 같은 기질이 고개를 들었다. 한국 기업의 역할을 묻는 이 회장의 질문에 그는 당시 대기업의 부정과 밀수 사건을 염두에 둔 듯,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를 거침없이 설파했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 직후 한국일보가 공채 시험을 공고했다. 최종 면접장에 들어선 그에게 창업주 장기영 회장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중앙일보 시험도 봤다는데 왜 떨어졌나?” 조 국장의 입에서 순간적으로 재치 있는 답변이 튀어나왔다.
“관상이 나빠서 떨어진 것 같습니다.”
면접장에 웃음이 터졌다. 이어 공업학교 출신이 왜 기자가 되려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당당히 답했다. 기술자가 되는 것보다 기자가 되어 우리 사회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개혁하고 싶다고. 그렇게 그는 1973년 한국일보의 기자가 됐다.
조 국장은 “기자가 된 것이 정말 좋았다”고 회상했다. 어린 시절 세상을 바꾸는 정치인을 꿈꿨던 산골 소년에게 기자는 직업 그 이상이었다. 마침내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흐르는 시대와 역사를 향해 당당히 질문할 수 있는 진짜 길을 찾은 순간이었다.
◇ 1975년, 시카고 특파원으로 오다
1975년 조 국장은 한국일보 시카고 특파원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당시 시카고 특파원은 워싱턴 특파원의 정치 보도와는 달리, 현지판을 안정시키고 한인 사회의 이민 현실과 사회 현상을 전하는 이민자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가 마주한 시카고 한인사회는 약 2만5천 명 규모였다.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고단한 공장 노동 속에서도 자녀 교육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조 국장은 “미국 사회의 정보와 시스템을 안내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며 미국 시민으로 당당히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교포신문의 사명이었다”고 돌아봤다.
1979년 그는 시카고 한국일보 편집국장이 됐다. 그리고 이듬해 5월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한국 언론이 계엄과 검열 속에 침묵할 때, 그는 미국 외신을 바탕으로 광주의 진실을 미주판 지면에 과감하게 실었다. 통단 제목을 뽑고 신군부를 비판하는 기사와 칼럼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 보도는 결국 그가 신문사를 떠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사직한 뒤에도 그는 기록과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시카고 남쪽 흑인 동네에서 의류 장사를 시작하면서도 민주화운동을 이어갔다. 1982년 민통연합 시카고지부를 창설하고 위원장을 맡아 미국 정치인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지원 모금을 이끌었다. 김대중, 김영삼, 함석헌 선생 등을 초청해 강연도 열었다.
1985년 김대중 전 대통령 귀국 때는 수행원으로 동행했고,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에는 두 김 후보가 동시 출마하면 노태우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 보고 동교동을 찾아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출마하지 말라고 직언했다. 그 일을 계기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결별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오른쪽: 민통연합 초청으로 열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시카고 강연회 모습. 김영삼 씨는 훗날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이 됐다.
◇ 두 권의 북한 방문기, 경계에서 지켜낸 펜 끝
그의 삶은 어느 한쪽의 이념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박정희를 지지했던 청년,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기자, 자신이 뛰어들었던 민주화운동권을 비판하고, 지금은 보수를 역설하는 언론인이 모두 같은 사람 안에 존재했다. 그는 진보나 보수라는 어느 한 진영에 매몰되기보다, 그 시대에 무엇이 국민을 위한 길인가를 먼저 물으며 권력을 향해 질문하는 독립된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그 중심추는 1990년대 초 두 차례의 북한 방문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1991년 재미 언론인 자격으로 3주간 북한을 방문한 뒤 북한 사람들의 생각을 기록한 『더디 가도 사람 생각을 하지요』를 냈고, 1년 4개월 뒤 다시 북한을 찾은 후 『더디 가도 우리식대로 살지요』를 출간했다.

두 방문기의 결은 달랐다. 첫 번째 책이 다른 체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순수함에 초점을 맞췄다면, 두 번째 책에는 이산가족 상봉 과정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돈 문제, 금강산 바위에 새겨진 체제 선전의 훼손 같은 북한 사회의 모순과 그늘을 기록했다.
북한 당국은 비판적인 대목을 빼면 출판비를 대겠다고 회유했지만 조 국장은 타협하지 않았다. 이 일로 그는 북한과 멀어졌고, 남북 문제를 객관적 시각으로 글을 쓰겠다는 그의 생각을 접었다. 북한 권력에게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남이든 북이든 어느 한쪽을 맹목적으로 편드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필요하다면 비판하는 저널리즘의 본령이었다. 그 점에서 두 권의 북한 방문기는 조 국장이 평생 붙들고 싸워온 언론인의 꼿꼿한 태도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 이민자의 목소리를 주류사회로
1993년, 조 국장은 미국에 온 지 18년 만에 시민권을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던 오랜 꿈을 접고, 미국 땅에서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살아갈 의미를 묻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가 품은 다음 꿈은 이민자의 목소리를 미국 주류사회에 전하는 일이었다. 대학교수가 된 동생이 건네준 3만 달러를 바탕으로 영어 잡지 『WE Magazine』을 창간했다. 2세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고, 한인들의 이야기를 주류사회에 알리고자 한 도전이었다. 하와이와 알래스카에서도 구독 신청이 들어올 만큼 반응도 있었다.
그는 잡지와 함께 방과후학교도 열어 숙제 지도뿐 아니라 스피치, 에세이, 태권도, 정체성 교육을 시도했다. 2세들이 영어를 잘하는 미국 학생으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뿌리를 알고 당당하게 주류사회와 만나는 세대로 성장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비록 재정난과 인력의 한계로 잡지는 몇 년 후 문을 닫았지만, 이민자와 2세들이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향한 그의 질문은 계속됐다.
이후에도 그는 언론인의 길을 놓지 않았다. 다시 시카고 한국일보 편집국장으로 복귀해 펜을 쥐었고, 한미TV 보도담당 부사장과 라디오코리아 운영에 이르기까지 매체를 오가며 한인사회의 현장을 지켰다. 기록해야 할 것을 기록하고, 질문해야 할 것을 질문하는 언론인의 사명이었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한인회 선거 갈등과 대형 교회 문제 등 민감한 부조리를 보도하며 좁은 이민사회 안에서 갈등과 소송, 해직을 겪었다. 독립적인 언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얼마나 어려운지 그는 몸으로 배웠다.
그는 은퇴 전 마지막 4년을 대형 편의점 체인 월그린에서 근무한 뒤 70세에 은퇴했다. 조 국장은 그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마음으로 일했던 시간이자, 온전히 나를 돌아본 충전의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평생 시대와 사람을 향해 질문하고, 부당하다고 여긴 일 앞에서는 침묵하지 않았던 삶이었다. 그래서 그의 길에는 늘 질문이 있었고, 때로는 갈등도 있었다. 조 국장은 “나는 불화를 내 씨앗으로 가지고 살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불화는 그가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 60년 만에 만난 아버지의 기록
삶을 돌아보던 시기, 조 국장은 또 하나의 뿌리를 만났다. 2017년경, 평생 가슴에 묻어뒀던 아버지 조인배 지사의 독립운동 재판기록과 공훈기록을 우연히 찾아낸 것이다.
아버지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황해도 해주와 청단 장터에서 서당 학생들을 이끌고 3·1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1년간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망명한 독립유공자였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 학교 선생님들이 집에 찾아와 아버지의 만세운동과 감옥 이야기를 경청하던 장면이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지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그 증거는 오랫동안 찾을 길이 없었다.
60년 만에 컴퓨터 화면에서 다시 만난 아버지는 이후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 만남은 조 국장의 또 다른 기록 작업으로 이어졌다. 아버지가 남겨준 정신적 유산은 이민사 집필이라는 소명으로 이어졌다. 아버지의 기록을 마주하며, 한 개인의 삶도 시대의 일부로 남겨져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단단해졌다.
◇ 기자는 시대와 역사를 향해 질문해야 한다
그의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조 국장은 현재 ‘한국인에서 미국인이 된 삶과 감정과 생각의 역사’를 주제로 이민사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한 개인의 회고록을 넘어, 한 세대가 이민자로 살아가며 겪은 내면의 변화와 흔들림을 담아내는 작업이다. 이 거대한 기록의 바탕에는 평생 놓지 않았던 기자로서의 집요한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그가 후배 언론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당부도 결국 이 ‘질문’에 맞닿아 있다.
“기자는 질문을 잘해야 합니다. 질문은 문제의식의 출발이니까요. 하지만 세상에만 질문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질문하고, 나아가 시대와 역사를 향해서도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젊은 시절 그는 확고한 신념을 앞세워 살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은 옳다고 믿는 생각일수록 스스로 다시 묻고 점검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찰이 없는 확신은 쉽게 독선과 맹신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 국장은 “기자의 정신이 썩으면 문명이 썩고, 사회와 역사가 함께 썩는다”며, 고정관념을 경계할 것을 거듭 강조했다.
1980년 5월, 조국이 침묵할 때 미국 시카고에서 광주의 진실을 기록했던 서른네 살의 젊은 편집국장은 어느덧 여든을 넘겼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자는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가, 이민자는 역사에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시대와 때로 불화하면서도 끝내 기자의 중심을 지켜온 조광동 국장. 그의 삶은 날카로운 질문으로 시작해 정직한 기록으로 남았다. 그가 남긴 발자취는 시카고 한인사회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이민사로 이어지고 있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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