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침에…] 시카고한국일보 50년을 돌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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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관헌(칼럼니스트/시카고)

시카고한국일보는 시카고한인의 이민사를 가장 잘 간직해오고 있어서 지난 50년간의 우리들 모습을 드려다 볼 수 있는 거울이 되고 있다. 며칠 전, 6.17.자 시카고 한국일보 창간(1971년 6월 9일) 49년 기념특집호를 집어 들고, <다시 불끈 힘을 내, 마침내 함께 오른다>는 표제와 함께 축하광고와 메시지로 전통적인 함께 접기 식 천연색 신문지가 화사하게 펼쳐져 필자자신도 미국이주 50년이 찰라(刹那/순간)에 반짝하며 그 짧지 않은 긴 세월이 휙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시카고에 한국인의 족적을 남긴 기록은 1893년 콜럼버스 미 대륙발견 40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박람회인 <The World’s Fair; Columbian Exposition>때인, 1893.5.1. 46개국 참가국 중, 은둔의 나라 대조선(大朝鮮)국을 대표하여 찾아 온, 정경원대사와 그 수행원들, 그리고 자원봉사자 청년 학생 두 사람의 활약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 다음 1933년 Chicago World’s Fair 때는 1903년 사탕수수밭농장이민으로 알려진 하와이 첫 이민이 도착한지 30년이 지나 차세대 중, 대륙에 이주하여 시카고에서 식당업에 성공, 상해임시정부까지 애국성금을 보낸 김경 씨, 노스웨스턴 대학유학생들과 안창호선생의 흥사단 시카고지부 창립, 시카고감리교회와 그 학생관, 치과의사이며, 대한민국 명예영사, 초대한인회장으로 활약하였던 정보라박사로 이어지는 <전기이민사회>가 독립운동과 대한민국건국에 공을 세운 분 들이 많았으며, 그후, 1970년부터 김창범 전한인회장 등, 재독 한국인의 집단이주가 시작되어 본격적인 시카고한인사회의 형성과 확대발전을 거듭하는 <초기이민사회>를 거쳐 1980년대부터 시작되는 자유이민사회의 번성기를 맞으면서 흥성(興盛)기, 위축(萎縮)기, 기회와 위기를 넘기며 오늘에 이르렀다.

필자가 조국근대화물결에 실려 감사업무전산화 정부사업효율화 훈련을 목적으로 2년간 미국유학의 행운을 얻어 NIU에 왔다가 감사원장교체와 제2대 이모원장의 해외파견 감사관의 소환에 불복하여 면직(의원면직)됨으로서 무원고립, 시카고에서 생존투쟁에 든 지 몇 달이 안 되어 개인적으로 암담했던 시절이었다. 그 때가 71년 6월 9일이었다니, 16절지의 한글타자로 찍고, 이를 등사한 신문을 얻어들은 필자는 몇 번을 뜯어 읽고 또 읽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 한국의 신문은 지금 미주판과는 달리 오늘의 조선일보같이 대문짝만 한데, 16절지에 등사된 시카고한국일보는 학생 때, 명동에 있는 미국대사관인지 문화원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때맞추어 가면 얻어 볼 수 있던 <News Bulletin>과 시카고일본불교사원에서 철필로 내려 쓴 등사신문을 가끔 얻어 본 것과 비슷하였다.

놀라서 한글판(공병우타자기) 타운뉴스를 읽는 기쁨은 대단한 것이었다. 생존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던, 내 생애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이렇게 탄생한 시카고한국일보는 한국신문과 타운뉴스를 미국에서 발행한 첫 사례여서 그 역사적의미가 대단하였으나 정기구독도 못하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새 진로에 접어들 때, 시카고불교사찰의 효시인 불타사 첫 창립소식을 담아 용케도 제집에 배달되어 두 번째로 깜짝 놀라 지인들과 소통도하고 구독자도 되었다. 그 후 승산선사 등 한국고승들의 법회소식을 비롯하여 많은 불교행사에 대한 소식이 이 신문을 통하여 알려지고 지금까지 시카고 불교사가 한국일보지면에 보존되어 있으니 불교발전에도 크게 공헌을 하였으며 이러한 일은 한인사회의 모든 분야에서도 같이 일어났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재미언론의 역사는 김용화 창업자와 함께 언론을 사랑했던 많은 기자들과 현 김병구 회장이하 한국일보 창업정신을 지켜 감투(敢鬪)하는 관계자들에게 큰 영광이 있길 기원하며, 소리없는 독자들 앞에 필자도 고함치며 조국을 지킬 수 있는 광장, 시카고한국일보의 무궁한 발전을 축원한다.

시카고 한인사회 선도언론 시카고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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