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부활과 신앙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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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목사(두란노침례교회 담임)

벨릭스 총독의 법정에 선 바울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향해 자신은 항상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힘쓰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렇게 사는 이유를 자신이 믿는 부활의 소망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마지막 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앞에 부활의 몸을 입고 서게 될 것을 믿는 성도들은 다 바울처럼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역사는 좋은 교과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대 곳곳에 바울처럼 살다 간 믿음의 영웅들을 심어 두셨기 때문입니다.

프레드 더글라스 쉐파드는 청년의 때에 선교의 소명을 받고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선교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를 두고 고민하던 그는 의대에 들어가 의술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 의사가 되자 마자, 27살이 되던 1882년, 갓결혼한 아내와 함께 오스만 투르크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그는 의과 대학에서 가르치며 환자들을 돌보았고, 또한 자신이 필요한 곳이면 몸을 아끼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특히 오스만 투르크 정부가 아르메니안 족에 대해 대학살과 추방을 자행한 1895년과 1909년에는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모아 놓은 캠프로 달려가서 몸을 사리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1895년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캠프에 갔던 딸 엘리스는 성인이 된 후 그때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놓았습니다.

“캠프는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21,000명 정도 되는 생존자들은 허기와 공포에 짓눌려 있었고, 위생 상태가 엉망인 캠프 안에는 콜레라가 창궐해 있었다. 전염병으로 이미 죽은 시신들이 발에 치일 정도로 캠프 곳곳에 널려 있었지만, 생존자들은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뿐, 그 시신을 끌어내 묻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마치 모두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는 캠프 곳곳을 다니며, 살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고, 시신을 격리하게 했으며, 치료하기 시작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그러나 질서 있게 움직이는 아빠는 뭔 가에 홀린 것 같았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성령 충만한 모습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빠의 헌신으로 하루에 50명씩 죽어 나가던 camp는 일주일만에 하루 사망자가 5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쉐파드는 그들을 치료하는 동시에, 미국 선교 단체와 적십자사에 구호를 요청했으며, 오스만 투르크 정부를 향해선 아르메니아안에 대한 학살을 멈추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의 헌신은 환자를 치료하다가 콜레라에 전염되어 하나님 품에 안긴 191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의료 선교 사역을 인정받아 적십자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쉐파드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목적입니다. 돈이나 명예를 위해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이 분명한 진리를 증거하러 온 겁니다. 나의 헌신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면, 난 이미 상급을 다 받았고, 그렇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쉐파드의 장례 예배에 참석한 한 아르메니아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실제로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닥터 쉐파드를 통해 그분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선 이 아르메니아인의 고백을 통해 당신 품에 안긴 쉐파드에게 너 날 위해 참 잘 살았다고 칭찬해주신 겁니다.

교회가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위기의 시대, 시카고 지역의 성도들은 강한 전염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백성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 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분명히 믿고, 흔들리지 않는 부활의 소망 위에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백성들이 되시길 축복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