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무개와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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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서상규 목사

“아무개여!”(룻 4:1)

 

보아스는 룻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보다 더 가까운 친족인 기업 무를 자를 찾게 됩니다(룻 3:13). 그런데 성경에는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아스가 그를 직접 부르는 장면에서도 마치 “어이, 이리 좀 와”하는 식으로 부를 뿐,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룻 4:1). 개역개정성경에서는 “아무여!”라고 번역했는데 “아무”는 “아무개”보다 존칭이기는 하지만, “아무여!”라고 호격조사 “여”를 붙여 놓은 이 표현은 우리가 좀처럼 쓰지 않는 표현으로 어색합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그 표현이야 어떻게 되었든, 문제는 보아스보다 엘리멜렉 집안과 더 가까운 사람이 있었는데, 그 기업 무를 자의 이름이 의도적으로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왜 밝혀져 있지 않은지는 알 수 없지만, 룻기의 저자가 이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보아스는 그 아무개를 만나서 엘리멜렉(나오미의 남편)이 팔았던 땅에 대하여 의논을 합니다(룻 4:3). 나오미는 그들의 형편이 어렵게 되자 가족의 유업이었던 땅을 팔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희년이 되면 그것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지만(레 25:28) 희년이 되기까지 가족이 살아가려면 친족 중에 기업 무를 자가 나타나 그 땅을 사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레 25:25-27). 이 이야기를 들은 아무개는 그 땅을 내가 무를 것이라며 주저하지 않고 땅을 사고자 나서게 됩니다(룻 4:4). 그런데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그 아무개는 나오미와 룻의 형편을 돕기 위한 생각 보다는 자신의 재산 증식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보아스는 그 아무개에게 땅을 사게 되면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됨으로 그녀와 결혼하여 자손을 낳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게 됩니다(룻 4:5). 만약 그가 룻과 결혼한다면 룻이 낳게 될 그 첫째 아들은 룻의 죽은 남편의 아들로 여겨질 것이고 그렇게 될 때 그가 나오미에게 살 땅과 그의 재산까지도 룻의 아들에게로 상속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미처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아무개는 즉시로 발을 뺍니다. 아무개는 내 기업에 손해가 될까 염려가 되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고 말하며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넘기게 됩니다(룻 4:6). 이에 보아스는 친히 나서서 나오미와 룻을 위하여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행하기로 언약을 맺습니다(룻 5:7-9).

룻기의 이야기에서 룻은 우리들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졌던 기업, 우리의 땅을 잃어 버렸습니다. 인류가 범죄 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에덴의 그 아름답고 영화로운 땅을 그만 선악과 하나에 다 팔아 먹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힘으로 그 땅을 다시 찾아 올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잃어 버린 땅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의 값은 무엇인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우리의 잃어 버린 기업을 다시 되 찾기 위해서 우리는 그 값을 치뤄야 하는데 죄의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은 죽음 뿐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빚에 눌려 죽을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때 룻을 위하여 그 모든 기업을 대신 무를 자로 보아스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우리의 기업 무를 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 밖에 갚을 수 없는 그 죄의 값을 우리를 대신하여 치르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대속의 피가 우리를 죄의 채무에서 건져 내셨고 우리가 잃어 버린 땅을 다시 되찾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무개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그것이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위해 손해보고 희생할 수 있는 보아스와 같은 사람이 되는 일에는 주저합니다. 득과 실을 따지는 일에는 너무나 밝습니다. 우리가 입은 예수님의 무한한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누구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무개입니까? 보아스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