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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ugust 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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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1. 박해달 미주한인회총연합회·시카고한인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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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달 회장이 3월 6일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윤연주 기자>

멈추지 않는 개척자, 한 세대의 길을 만들다
1950년대 유학생에서 연방 상원의원 도전까지…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에 태극기 첫 게양
미주총연·한인회 이끌며 정치·경제·교계를 넘나든 리더
신앙과 도전으로 남긴 한인 이민사의 발자취

[편집자주]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며, 미래는 그 기록을 기억하는 자의 몫이다.”
본보는 시카고 한인 공동체의 기틀을 닦은 1세대 개척자들의 삶과 발자취를 기록하고자 한다. 이 연재는 시카고한국일보와 WIN TV, MCTV를 함께 운영하는 윈 미디어 그룹(회장 김왕기)이 추진하는 ‘2026 윈 미디어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번 기획은 본보 지면을 통한 심층 인터뷰를 시작으로, 시카고 주요 한인 인물사를 담은 단행본 출간과 그들의 생애를 기록한 방송 다큐멘터리 제작으로도 이어질 예정이다.

그 첫 번째 기록으로 시카고 한인사의 산증인 박해달 회장(Paul Park)이다. 그는 1955년 화물선을 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그는 경제학과 경영학을 공부한 뒤 세계적인 호텔그룹에서 경영분석가이자 호텔 경영인으로 성장했다. 1972년에는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태극기를 게양하며 미국 주류사회에 한국인의 존재를 알렸다.
그의 활동 무대는 호텔과 경제계를 넘어 한인 사회와 미국 정치권으로 확장됐다. 시카고한인회와 미주한인회총연합회를 이끌며 한인들의 권익 신장에 앞장섰고, 1994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임명으로 워싱턴 D.C. 우드로 윌슨 국제연구센터 이사에 동양인 최초로 선임됐다. 이어 1996년에는 아시아계 이민 1세로서는 최초로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하며 한인 정치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린 유학생에서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미국 연방 정치무대에 도전한 정치인으로 그는 쉼 없이 새로운 길을 열어왔다. 미주 한인 이민 1세대의 개척 서사시와도 같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1995년 우드 윌슨 이사회에서 베이커 국무장관과 함께 한 박 회장.

1972년 8월 15일, 뉴욕 맨해튼 한복판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전면에 태극기가 펄럭였다. 세계 각국의 정상과 귀빈들이 머무는 최고급 호텔에 한국의 국기가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광복절을 맞아 태극기 게양을 이끌어낸 사람은 당시 호텔 경영진으로 일하던 한인 청년 박해달이었다.

월도프 아스토리아에는 국빈이 방문할 때 해당 국가의 국기를 게양하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박 회장은 국빈 방문이 없는 광복절에 태극기를 올려 한국과 한국인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그의 요청으로 뉴욕 하늘 아래 태극기가 올라갔고, 한국과 미주 한인 사회에서 수백 통의 격려 편지가 전해졌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미국으로 건너온 한 유학생 출신 한국인이 세계적인 호텔에 조국의 깃발을 올린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7년 전인 1955년, 박 회장은 화물선을 타고 미국 땅에 도착했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장 기계공과 식당 버스보이, 병원 청소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청년은 훗날 시카고한인회를 세 차례 이끌고 미주한인회총연합회 총회장과 대통령 임명기관 이사를 거쳐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도 도전했다.

그의 삶은 개인적인 성취에 머물지 않았다. 낯선 땅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한인 사회와 미국 주류사회를 연결하며 후대가 나아갈 길을 넓히는 과정이었다. 박 회장은 그 모든 도전을 가능하게 한 힘의 뿌리로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신앙과 부모의 기도를 꼽았다.

1972년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중역들과 함께. 사진 왼쪽 첫 번째가 박해달 회장, 세 번째가 베런 힐튼(Barron Hilton) 회장.

신앙으로 다져진 삶의 뿌리

박해달 회장의 가문은 구한말 복음이 전해지던 시기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집안이었다. 유교적 전통이 강하던 시절, 그의 증조부와 조부는 제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문중에서 쫓겨나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가문의 기개는 아버지에게도 이어졌다.

대구 서문교회의 젊은 장로였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말 신사참배 강요와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신앙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만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의학을 공부한 뒤 돌아와 평생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가계를 돌봤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 있던 동안 어머니는 척박한 땅을 일구며 가족을 지탱했다. 박 회장은 “어머니가 새벽마다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시던 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며 “어머니의 그 기도가 연고 없는 미국 땅에 와서도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고 회상했다.

신앙의 뿌리는 외가로도 이어졌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시카고 한인 사회의 또 다른 원로인 김길남 회장의 조부와 함께 130여 년 전 대구 지산동에 지산장로교회를 세운 주역이었다. 대를 이어 전해진 신앙은 박 회장이 거친 이민 생활 속에서도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붙잡아 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1955년 대구 계성고 농구부 시절. 사진 왼쪽 두 번째가 박해달 회장.

전쟁 후 폐허 속에서 시작된 유학

그가 다녔던 대구 계성고는 6·25 전쟁 당시 서울에서 피난 내려온 대학교수 출신 교사진 덕분에 수준 높은 교육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는 공부로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열망이 뜨거웠다. 그는 “전쟁 직후였지만 오히려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난 덕분에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준 인물은 신태식 계성고 교장이었다. 신 교장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생들에게 넓은 세계를 경험하게 하려 애썼고, 졸업반에서 우수 학생 중 몇 명을 선정해 미국 유학의 길을 열었다. 박 회장은 그렇게 유학 기회를 얻었다.
1955년 가을, 그는 큰 꿈을 안고 한국을 떠나는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당시 배에는 훗날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핵물리학자 안세희 박사도 함께 타고 있었다.

배는 17일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후 박 회장은 캔자스주로 이동해 엠포리아 장로교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엠포리아 장로교대학은 영락교회를 설립하고 한국 현대 기독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한경직 목사의 모교이기도 하다.

1992년 빌 클린턴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서 데이비드 윌헬름 캠페인 매니저와 함께한 박 회장 부부. 박 회장은 클린턴 선거운동에 함께 참여하며 윌헬름과 가까운 인연을 맺었다. 하버드대 출신인 윌헬름은 리처드 데일리 전 시카고 시장과 폴 사이먼 전 연방 상원의원, 빌 클린턴 대통령 등 주요 정치인의 선거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했다고 해서 어려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당시 한국에서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는 방학 때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공업도시 시카고로 향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일하고, 저녁에는 식당 버스보이와 병원 청소 일을 하며 다음 학기 학비를 마련했다. 익숙하지 않은 육체노동이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몸은 힘들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며 “미국 사회를 밑바닥에서부터 경험하며 노동의 귀중함을 배운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1959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시카고에 정착해 시카고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과정에 도전했다. 박 회장은 “당시 2년 선배였던 최종현 전 선경그룹(SK) 회장과도 가까이 지내며 한인 사회의 발전과 미래를 놓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회상했다.

경제학자의 꿈을 품고 시작한 유학생활이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석사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박사과정에 들어간 데다 생계와 학업을 병행해야 했기에 공부에만 전념하기 어려웠다. 낯선 땅에서 삶의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 무렵 그는 시카고 맥코믹 신학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던 유학생 박은기 씨를 만났다. 박 회장은 아내와의 만남을 “하늘이 선택해 준 인연”이라고 표현했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을 올렸고, 박은기 여사는 이후 가정은 물론 박 회장의 사회활동과 수많은 도전을 곁에서 함께한 평생의 동반자가 됐다.

결혼 후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의 삶에도 새로운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가장으로서 가족의 안정을 우선해야 했던 그는 경제학 교수의 꿈을 접고 경영학으로 진로를 전환했다. 이는 학문적 꿈을 포기한 선택이라기보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한 또 다른 도전이었다.

1970년 박 회장 부부의 결혼식에 참석한 로이드 메츨러 시카고 대학원 경제학과 교수 부부. 메츨러 교수(Journal of Political Economy Editor)는 박 회장에게 꿈을 심어준 은사였다.

호텔리어로 세계의 중심에 서다

박 회장은 1962년 시카고 팔머 하우스 힐튼 호텔(Palmer House Hilton)에 경영 분석가로 입사하며 호텔리어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학업 또한 드폴대학교(DePaul University) 경영학 석사(MBA) 과정으로 옮겨 전문성을 쌓았다.

특히 팔머 하우스는 한국 유학생 출신인 그에게 더욱 남다른 의미를 가진 곳이었다. 이곳은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 당시 고종이 파견한 조선 사절단이 머물렀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당시 사절단은 팔머 하우스의 높은 숙박비에 놀라, 다음 날 바로 시카고 남부 42번가의 건물로 숙소를 옮겨야 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그로부터 약 70년 후 한 한국인 청년이 그 호텔의 경영 핵심 인력으로 입성하게 된다. 이는 개인의 성공을 넘어 한국인의 성장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경영 분석가로서 독보적인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입사 7년 만에 세계 호텔리어의 정점이라 불리는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Waldorf Astoria)’로 승진했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과 외교 인사들이 드나드는 국제 외교의 심장부에서 그는 당시 동양인으로서 유례없는 중책을 맡으며 자신의 무대를 세계로 확장했다.

1999년 우드로 윌슨 국제연구센터 이사회에서 메들라인 알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 리 하밀튼 우드로 윌슨 센터 회장과 함께한 박 회장.

특히 박 회장은 월도프 아스토리아에서 한국 현대사의 은인인 맥아더 장군 가문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기도 했다. 박 회장은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장군이 당시 월도프 아스토리아의 스위트(Suite)에 거주하셨는데, 소천하신 후 홀로 남은 미망인과 아들을 도왔다”고 회상했다.

박 회장이 1972년 광복절을 맞아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태극기 게양을 추진한 것도 이 시기였다. 국빈 방문국의 국기만 내걸던 뉴욕시의 전통과 관례를 넘어 태극기를 올린 이 일은 당시 서울경제 뉴욕 특파원을 통해 크게 보도됐고, 박 회장에게는 미주 한인과 한국에서 수백 통의 격려 편지가 이어졌다. 세계의 중심에서 한국인의 존재와 자긍심을 알린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뉴욕 생활 동안 그는 힐튼 그룹의 수장 베런 힐튼을 가까이서 보필하며 미국 주류사회의 네트워크가 어떻게 형성되고 움직이는지를 몸소 경험했다. 이후 박회장은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의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도 참여하며 정치권 인사들과 폭넓은 인연을 맺었고, 이를 바탕으로 주류 정치권과 한인 사회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해나갔다.

하지만 5년마다 근무지를 옮겨야 하는 힐튼의 순환 근무는 자녀 교육에 걸림돌이 됐다. 가족의 안정과 자녀 교육을 위해 그는 뉴욕에서 쌓아온 경력을 뒤로하고 제2의 고향인 시카고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시카고로 돌아온 그는 호텔 경영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경영분석가로서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안정된 직장에 머무르기보다 자신의 경험을 한인 사회의 정착과 성장에 보탤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1971년 5월 19일 자 시카고 한국일보 창간호 지면. 박해달 회장이 한인사회의 도약과 언론의 사명을 강조하며 기고한 축사가 실려 있다.

멈추지 않는 개척자의 길

시카고로 돌아온 박 회장은 1977년 동서부동산을 설립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당시 부동산 업계는 건물을 사고파는 단순한 중개업에 머물러 있었지만, 박 회장의 시각은 달랐다. 그에게 부동산은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삶의 기반이자 시민으로서 권리를 지키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이러한 철학은 훗날 그가 일리노이주 부동산 교육 및 행정감독위원으로 선임되는 계기로 이어졌다. 수많은 고객이 미국 땅에서 자산을 안정적으로 일궈 자산가로 성장하도록 도왔고 이는 곧 한인 사회 전체의 경제적 위상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1990년 8·15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박해달 회장. 당시 시카고 데일리 시장을 비롯한 주류 정치인들이 함께했다.

박 회장은 사업을 운영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한인 사회의 현안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제7대와 제8대, 제14대 시카고 한인회장을 역임하며 한인회가 친목 단체를 넘어 동포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자리 잡는 데 힘을 보탰다.

그는 “초기 한인 사회에는 이민 신분과 체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았다”며 “영어와 미국 제도에 익숙하지 않아 어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미 주류 사회와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동포들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박 회장은 “당시 세 명의 이민국장(Wentling / Moyer / Poliko)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이민국 문제로 고심하던 한인들의 고충을 직접 전달할 수 있었다”며 “법적 절차만으로 해결되지 않던 까다로운 사안들도 그들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곤 했다”고 말했다.

한인 행사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는 박해달 회장. 이석순 당시 시카고한인회장(왼쪽 첫 번째), 초대 한인회장이자 명예총영사였던 정보라 박사(왼쪽 두 번째)와 주류 정치인 등이 참석했다.

또한 그는 초기 이민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한인 2세들의 교육을 꼽았다. 자녀들이 한국어와 문화를 잊지 않는 것이 공동체의 미래와 직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70년 한글 교재를 마련하기 위해 고국을 찾은 그는 유학생 대표 자격으로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미국 한인 사회의 생활과 현실을 소개했다. 방송을 본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게 된 그는, 당초 30분으로 예정됐던 면담을 3시간 30분 넘게 이어갔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 가족과의 저녁 식사에도 함께했다.

그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박 대통령께서 세계지도를 펼쳐 보이시며 ‘한국에 돌아와 일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넓은 미국 대륙에서 제2의 한국을 건설해 달라’고 당부하셨다”고 회상했다. 이 한마디는 훗날 그가 한인 사회 활동과 미 주류 정치권 진출에 헌신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이자 이정표가 됐다.

1978년에는 제2대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총회장으로 선출돼 미주 한인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시카고 정치권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981년부터는 시카고 시의회의 임명으로 경제개발국 자문위원 및 명예 대사로 활동하며 지역 정책에도 참여했다.

1994년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사진 오른쪽).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박해달 회장에게 보낸 감사 편지.(왼쪽)

그는 빌 클린턴을 처음 만난 순간도 또렷이 기억한다. 1991년 시카고 민주당 인사들이 클린턴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만들기 위해 첫 모임을 가졌고, 그는 당시 경제 자문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 훗날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 이후 그는 워싱턴 정가와 한인 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박 회장은 1994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임명으로 워싱턴 D.C. 우드로 윌슨 국제연구센터(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이사에 동양인 최초로 임명됐다. 이 센터는 대통령이 직접 이사진을 임명하는 세계적인 정책 연구기관으로, 소련 연방의 해체와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등 국제 냉전 종식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사들이 참여하는 주요 연구기관이다.

한인 사회의 정치적 목소리를 직접 대변하겠다는 그의 뜻은 1996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 출마로 이어졌다. 아시아계 이민 1세로서는 최초의 도전으로, 한인 정치사의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박 회장은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한인 사회의 정치적 유리천장을 깨기 위한 행보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며 “후세대들이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1970년대 후반, 박 회장이 한인타운 번영회 회장과 알바니파크 상공회의소 회장을 동시에 맡고 있을 때 열린 송년파티. 당시 경찰국장과 경찰서장, 모이어(Moyer) 이민국장 부부 등이 참석했다.

박 회장의 활동은 한인 사회를 넘어 아시아계 커뮤니티 전체로 확장됐다. 그는 40여 년 동안 시카고 아시안아메리칸연합(AACC) 활동에 참여하며 아시아계 공동체의 권익 신장에 힘을 보탰고, 그 공로로 팬아시아(PAN Asia)상을 수상했다.

동시에 그는 교계 활동에도 헌신적으로 참여했다. 미국 장로교 총회 역사편찬위원과 세계 전도회장 등을 역임하며 신앙 공동체의 발전과 보수적 가치 수호에 앞장서 왔다.

특히 교단 내 신학적 정체성이 흔들리던 시기, 그는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150년 전 전 세계 복음화를 주도했던 미국장로교단(PCUSA)이 2010년경부터 동성애자 목사 안수 문제로 갈등을 겪자, 그는 교회의 본질을 지켜야 한다며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당시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총회에는 4,000여 명이 참석했다. 박 회장은 세계 전도회장 자격으로 단상에 올라 반대 연설을 펼쳤다. 그는 “이미 1998년부터 이러한 흐름이 교단 내에 들어와 오랫동안 갈등을 겪어왔다”며 “모두가 침묵할 때 누군가는 이것이 올바른 길이 아님을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연설은 이후 12년 동안 해당 안건이 통과되지 못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80년 로렌스 한인타운 지역 로리노(Raurino) 시의원 사무실에서 촬영한 사진.

개척자의 발자취, 다음 세대를 향해

박 회장은 자신의 삶에서 많은 멘토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학창시절 큰 꿈을 알려주시고, 미국 유학길을 열어주신 신태식 계성고 교장 선생님, 시카고대 대학원 은사 로이드 메츨러(Lloyd A. Metzler) 교수, 그리고 데이빗 윌헬름(David Wilhelm) 민주당 전당대회 의장 등 수많은 분들로부터 영감과 도움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사람은 혼자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르침과 격려 속에서 성장한다”며 “한인 차세대들도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언젠가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 줄 멘토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우드로 윌슨 국제연구센터 이사진과 자리를 함께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 네 번째)과 당시 센터 이사로서 일정을 수행한 박해달 회장(오른쪽 세 번째).

고교 시절 농구팀 주장으로 활동하며 체력을 다져온 그는 여든이 넘은 지금도 꾸준히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그는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 된다”며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더 먼 미래를 바라보며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아직 풀어야 할 두 가지 숙제가 남아 있다고 밝혔다. 그중 하나는 오랜 갈등으로 분열된 미주한인회총연합회(미주총연)가 다시 하나로 통합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는 창립 발기인으로서 “동포사회를 대표하는 단체가 나뉘어 싸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총연의 통합을 촉구했다. 이어 그는 “우리 이민 사회의 미래를 위해 이제는 분열을 끝내야 한다”며 “통합된 총연이 앞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역량을 갖춘 자랑스러운 차세대 리더들에게 물려주고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숙제는 평생 지켜온 신앙의 자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는 장로교단 내 동성애자 목회자 안수 문제에 대해 성경적 원칙에 따른 방향이 세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박 회장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교회가 본연의 가치를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가 끝까지 붙들고 있는 마지막 사명“이라며 “타고난 동성애자가 교회에 오면 환영해야 하고 집사나 권사도 될 수 있지만, 양 떼를 인도하는 목사가 된다면 기독교는 결국 사망의 길로 접어들 것”이라며 교회의 본질을 수호해야 함을 강조했다.

1990년대 초, 큰아들 제임스의 시카고대 의과대학원(MD-PhD) 졸업식에서. 이후 제임스는 하버드대에서 포스닥 연구 과정를 거쳐 안과 전문의의 길을 걷게 된다. 사진 왼쪽부터 박은기 사모, 둘째 미쉘, 제임스, 박순복 씨(누나), 막내 데이빗.

박 회장은 다음 세대를 향한 바람도 전했다.

그는 “우리 세대는 척박한 땅을 고르는 세대였지만, 차세대 아이들은 그 위에서 꽃을 피울 세대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후대들이 이 기록을 통해 우리 한인 선배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살았다는 자부심을 품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하나의 원대한 꿈도 밝혔다. “내 생전에 한인 2세 가운데 미국 대통령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고 싶다”며 “우리 차세대가 미국 사회의 중심에서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1955년, 낯선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디뎠던 한 청년의 도전은 이제 시카고 한인 이민사의 지워지지 않는 이정표로 남았다. 그리고 그는 이제 다음 세대에게 바통을 넘긴다.

“나는 나의 역사를 썼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차례입니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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