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순서(소명/중생5)

1415

정성국 목사/로뎀교회 담임

사람이 거듭날 때 그 순간을 인식할 수 있을까? 중생 그 자체는 인지할 수 없다. 요한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살펴보자. 어느 날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성령으로 난 사람의 특징을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라고 하신다(요 3:8).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잘 생각해보자. 바람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바람의 본질(substance)을 인식할 수 없다. 대신 주변의 것을 통해서 바람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이것을 예수님은 소리라고 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과 풀이 흔들리며 물결이 넘실거리며 소리가 들린다. 즉 바람의 본질 자체는 알 수 없어도 실존(현실 존재)을 통해 존재를 증명한다. 예수님은 이 비유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설명하신다. 즉 중생 그 자체는 가시적이지 않다. 대신 바람의 존재를 주변의 실존을 통해 증명하듯이 중생 존재 여부도 회심이라는 실존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회심이란 회개와 믿음으로서 과거의 죄악 된 길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믿음의 길로 가는 것이다.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에서 벗어나서 순종하는 삶으로의 전환이다. 영적으로 교만한 삶에서 벗어나서 가난하고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향한다. 회심은 죄에 대한 뉘우침과 함께 새로운 삶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이런 회심을 통해서 중생 유무들 증명한다. 회심의 순간을 인식할 수 있다면 중생의 발생을 추정할 수 있다.

회심이 극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거스틴의 회심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 모니카의 도움으로 말씀 안에서 성장했지만, 신앙을 버리고 세상의 탐욕과 정욕 속에 몸을 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극적으로 회심하게 된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로마서 1:17을 읽다가 회심한 것으로 보인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성경 인물 중에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사람은 아마도 사도 바울일 것이다. 그는 본래 유대교에 심취한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자였다. 어느 날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극적으로 회심하게 된다. 이후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많은 성경을 썼으며 순교로 삶을 마감했다. 이처럼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면 중생의 순간을 알 수도 있을 것이다. 특별히 이런 경우는 신앙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다가 회심한 경우에 더욱 잘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