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무엇으로 부터의 구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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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규 목사(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얼마 전 이웃에 사는 한 유대인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네, 우리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온 세상에 평화가 온다고 했는데 아직도 세상은 혼란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믿는 예수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그의 논리는 확실했고 믿음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가 기대하고 있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메시야를 기다렸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박에서 구원하여 다윗왕조의 영광을 되찾게 해 줄 세속적이며 또한 현실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예수님이 왕이 되었을 때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에 대하여 그들은 항상 다투었습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당시의 현실적인 문제로 생각해 봅시다. 유대인들은 왜 그렇게 열렬히 로마의 속박에서 구원한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렸는가? 그것은 세금의 문제였습니다. 로마는 그야말로 납세의 국가였습니다. 오로지 납세자만이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로마였습니다. 단순한 시민의 계층적 계급 이외에도 개인이 내는 세금에 따라 정부가 사람의 등급을 매겼습니다. 당시의 세금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14세부터 65세까지의 남자와 12세부터 62세까지의 여자라면 누구나가 내야 하는 인두세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본세였습니다. 그 다음은 토지세였는데 모든 곡물에는 10%를 부과하고 포도와 기름에는 5%를 부과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외에도 수입의 1%를 부과하는 소득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금들은 정해진 고정세였기 때문에 세리들이 별로 속일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당시의 로마는 세금을 거두는데 현지 사람들로 구성된 세금징수인을 고용하였습니다. 로마는 자신들이 정한 세금만 받으면 되었고 그 이외에 세리들이 얼마를 걷는지에 대해선 크게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들은 때론 짐마차의 바퀴 숫자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였고 마차를 끄는 동물에도 세금을 메겼습니다. 때론 노상에서 보행자를 불러 세우고 그 짐을 풀게 한 후 그 속에 있는 내용물들에 대해서 세금을 부여하는 착취를 빈번하게 저질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리의 착취가 만연했고 세리는 매우 부패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크게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처럼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성전을 유지하기 위한 성전세와 아스라엘 국가를 위한 세금까지 내고 있었으니 로마에 대한 세금과 함께 이중으로 세금의 부담을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벌어들이는 돈의 51% 정도를 세금으로 내야 했었다고 하니 그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겠습니까? 세금 생각만 해도 지긋 지긋, 세금 때문에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서 속히 메시야, 그들의 약속된 힘있는 왕이 나타나서 로마의 속박, 아니 이 세금의 속박에서 자기들을 벗어나게 해주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그런데 이 땅에 오신 메시야, 예수님의 사명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세금의 속박이 아니라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 사람들의 수가 늘었다는 통계를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막대한 세금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세금을 피해 사람들은 도망합니다. 심지어 국적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죄입니다. 죄의 문제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해결 할 수 없습니다. 그 죄의 값은 무엇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롬 6:23)입니다. 우리의 목숨입니다. 우리의 목숨 줄을 죄어오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영원히 감면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