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자족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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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수 목사(순복음충만교회)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상황이나 환경, 조건이나 형편에 관계없이 자족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여기서 배웠다고 하는 것은 바울이 경험에 통해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야말로 생의 여러 난관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 속에서 ‘자족의 비결’을 배웠으므로 그는 환경을 정복하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내가 크게 기뻐한다”(빌4:10절).고 말합니다. 그의 자족은 외적 환경과는 무관하였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감옥 안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했습니다. 좋은 예를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일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17살 때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 갔습니다. 거기서 보디발의 아내를 시중들던 중에 누명을 쓰고 억울한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악조건 속에서도 불평이나 원망없이 성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세월이 흘러 자기를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원수 같은 형들을 껴안고 정에 북받쳐 목놓아 울고 있는 요셉의 아름다운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은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나의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형들이 자기를 팔아버렸는데 미움과 원망과 복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를 노예로 전락시킨 형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고 부둥켜안고 울 수 있었을까요? 요셉에겐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불행을 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섭리)이 있습니다. 섭리신앙을 가진 요셉은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 첫 자리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범사에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둘째,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했습니다.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내가 덧입고 산다는 것입니다.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절). 셋째,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12명의 정탐꾼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과 용기가 있는 지도자입니다. 다른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낙담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오히려 힘과 용기를 주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결코 교만한 마음에서 대적들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거짓 장담을 하여 인기를 얻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9)며 백성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8장에 기록된, 풍랑을 만나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제자들처럼, 그 배 안에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이 함께 계심을 잊고 사는 어리석은 생활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자족하는 생활은 모든 일, 모든 사람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 해방, 자유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 물질, 관심 등 이런 것에 쉽게 좌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약속이 자족의 근거임을 알고 체험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워 환경을 정복하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