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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November 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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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국일보 특별 기획 인터뷰] 서른 살, 340만 원을 쥐고 태평양을 건넌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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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주 변호사이자 KTK 아카데미 원장, 국제법률전문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기태 변호사(51세)


‘언어’의 장벽을 부수고 ‘미국변호사’가 되다

2026년 10월 18일, 서울 역삼동 포스코타워 대강당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에 우산마저 소용없는 궂은 날씨 탓에 빈자리가 많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대강당 문을 열자, 의리의 사나이 김기태 변호사의 출판기념회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지인들의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단돈 340만 원을 쥐고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 7년 6일 만에 뉴욕주 변호사로 금의환향한 사내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무대 아래에서 마주한 그의 눈빛에는 치열한 세월을 이겨낸 자 특유의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그는 벅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단돈 340만 원을 쥐고 떠났던 30살의 그 무모함이 힘들었지만 결국 지금의 단단한 저를 만들었습니다.” 폭우를 뚫고 찾아온 지인들을 향해 고개 숙이며 그는 덧붙였다.
“7년 6일 만에 얻은 이 벅찬 기적은 궂은 날씨에도 달려와 주신 여러분의 의리 덕분입니다.” 가끔 큰 누님이라 불리는 본지 특파원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절망의 끝자락에서 기어코 희망을 쏘아 올린 그의 뜨거운 인생 궤적을 쫓아보았다.

서울 역삼동 포스코타워 대강당 출판기념회에서 김기태 변호사(좌)와 본지 특파원(우)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과거의 흉터가 훈장이 되다
서른 살의 늦은 나이, 수중에 쥔 단돈 340만 원이 그의 전 재산이었다. 학점은 2.54에 불과했고, 영어는 한마디도 못 했으며 비행기조차 처음 타는 척박한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끔찍했던 것은 지난 4년 반 동안 겪었던 좌절의 늪이었다. 심한 악필 탓에 사법고시 주관식 시험의 벽에 부딪혀 아무런 꿈도 꿀 수 없었던 암흑기였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 변호사 시험은 랩탑으로 치른다는 사실을 듣고, 그는 무작정 태평양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막막함을 뚫고 피어난 첫 마음은 그 어떤 두려움보다 강렬하고 절박했습니다.” 절망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희망의 끈은 그를 온전히 부활시켰다.
“비록 척박한 내일이 기다릴지라도, 다시 꿈꿀 수 있다는 벅찬 행복 하나만으로도 모든 시련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그 쓰라린 흉터는 이국땅에서 그를 지탱하는 가장 눈부신 훈장이 되어주었다.

숱한 생채기가 굳은살이 되다
꿈을 안고 도착한 미국에서의 삶은 날 선 생존 투쟁의 연속이었다. 위험하기로 소문난 카슨 지역의 세탁소를 거쳐 컴턴의 리커스토어에서 평일 6~8시간, 주말에는 16시간씩 쉼 없이 일했다. 큰 찬합에 밥을 안치고 김치를 볶아 얹어 하루 세 끼를 묵묵히 버텨냈다. 이어 할렐루야 드라이빙 스쿨에서 연 11만 마일 이상을 달리는 운전 강사로 일했고, 학업을 병행하려 밤부터 새벽까지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지난날을 반추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처절한 생존의 벼랑 끝에서도, 제 가슴속 깊이 품은 꿈의 불꽃만큼은 결코 꺼지지 않았습니다.” 택시 안에서 타임스를 읽으며 주경야독(晝耕夜讀)했지만 로스쿨 25곳에 낙방하는 아픔도 맛보았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고단했을지언정 결코 불행하지는 않았다.
“고난에 주저앉기보다 끊임없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며 흘린 땀방울이, 고난을 딛고 일어선 찬란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그의 몸에 새겨진 숱한 생채기들은 그렇게 가장 강력한 굳은살로 영글었다.

언어를 뛰어넘어 진짜 무기를 쥐다
세상은 미국 변호사라면 원어민 수준의 완벽한 영어가 필수일 거라 지레짐작한다. 하지만 그의 진단은 달랐다. 한국의 자격시험처럼 미국 시험 역시 정해진 시간에 텍스트를 읽고 풀어내는 능력이 관건임을 간파했다. 세 번의 낙방 끝에 3전 4기 만에 180달러짜리 낡은 중고 책으로 당당히 합격을 거머쥔 배경에는 그만의 통찰이 있었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본질을 짚었다.
“결국 이 시험을 관통하는 핵심은 화려한 영어가 아닌 본질의 꿰뚫음에 있습니다.” 2010년부터 KTK아카데미를 통해 이 명확한 본질을 전수했고, 수많은 이들이 합격하여 세계 무대를 누비고 있다. 나아가 AI 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언어의 장벽마저 무너지는 지금, 그의 공부법은 더욱 빛을 발한다.
“자신의 고유한 커리어 위에 편견을 깨부순 타임 매니지먼트 전략과 미국법 지식을 결합한다면, 새로운 무대는 폭발적으로 확장될 것입니다.” 서툰 언어를 넘어 그가 움켜쥔 진짜 무기는 시대를 꿰뚫는 거대한 희망이 되었다.

나눔과 성취로 새로운 사명을 새기다
KTK 아카데미 원장으로서 그가 걷는 길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선 생생한 구원의 여정이다. 한국인 특유의 지독한 끈기가 미국 변호사 시험이라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만났을 때 빚어내는 폭발력은 현장에서 경이로운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편입했던 수강생이 단번에 합격의 영광을 안았으며, 숱한 직장인들이 이직과 이민이라는 인생의 역전극을 묵묵히 써 내려간다. 이 벅찬 현장을 지켜보는 그의 철학은 굳건하다.
“제가 변호사가 되어 겪은 삶이 180도 변하는 가슴 벅찬 기적을 다른 분들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돕고 싶습니다.” 다가오는 AI 시대는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 미국법 지식의 활용 가치를 더욱 넓히고 있다. 그가 쉼 없이 후학 양성에 매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돈보다 앞서는 숭고한 교육의 사명감이 제 가슴을 끊임없이 뛰게 만듭니다.”

한인 동포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다
‘국제법률전문가협회’의 창립은 그가 글로벌 무대의 개척자로서 내디딘 또 다른 굵직한 발걸음이다. 미국 변호사들과 법률 전문가들이 교류할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를 마련한 그는, 전 세계 각국에 포진한 수강생들과 함께 새로운 비전을 선포한다.
“이제는 우물 안을 넘어 세계로 향하는 거대한 도약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특히 영어가 자유롭고 미국 문화에 익숙한 미주의 한인 2세, 3세들에게 미국 변호사 자격증은 굳이 로스쿨(JD)에 진학하지 않고도 비학위 과정으로 주류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획기적인 열쇠가 된다. 개인이 묵묵히 쌓아온 커리어에 미국 라이선스가 더해지는 순간, 뻗어나갈 무대는 거침없이 넓어진다.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와 개척자 정신을 바탕으로 우리 동포들의 활동 영역은 끝없이 확장될 것입니다.” 그는 이 벅찬 비전을 품고 내년 3~4월 뉴욕, 시카고, 뉴저지, LA, 텍사스 등지에서 북콘서트를 열며 찬란한 항해를 앞두고 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시카고를 비롯해 이민 사회의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 앞에서 남몰래 좌절하는 동포들에게, 그의 치열했던 궤적은 그 자체로 가장 진실한 위로가 된다. “저의 삶 자체가 고단한 이민 사회를 살아가는 동포들에게 가장 따뜻하고 묵직한 위로의 편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차별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기필코 주류 사회에 진입해야만 훌륭한 삶은 아니라고 그는 담담히 덧붙인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기에, 주체적으로 삶의 닻을 내리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급 7달러짜리 노동자로 숟가락 하나부터 장만하며 이국땅의 서글픔을 견뎌냈던 팍팍한 경험은 동포들의 멍든 가슴을 깊이 어루만진다.
“과거 팍팍했던 이민자로서의 제 경험이 동포 여러분께 인생의 방향키를 다시 쥐어줄 희망의 메시지로 스며들기를 소망합니다.” 벼랑 끝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은 그의 삶은 흔들리는 동포들에게 다시 일어설 굳건한 용기가 되어준다.

자부심, 꺾이지 않는 코리안의 정체성
타국의 거대한 시스템과 차가운 시선 속에서도 그가 결코 주눅 들지 않고 버텨낸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는 단호하게 그 원동력이 ‘한국인이라는 뜨겁고 단단한 긍지’에 있다고 짚어낸다. 비루한 현실과 거대한 장벽 앞에서도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꿈을 향해 나아가는 끈기 덕분이었다.
“한국인은 사하라 사막 한복판에 떨어뜨려 놔도 살아남을 무서운 생존력을 지녔습니다.” 정해진 룰조차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미국 로스쿨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기발한 역발상과 ‘K-공부법’으로 기어코 살아남은 것이 바로 한국인이다. “한민족 특유의 위대한 생존력과 불굴의 투지는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꿈을 잃고 방황하는 수많은 청년들에게 그의 치열했던 궤적은 피가 끓게 하는 눈부신 나침반이 된다.

가족은 고단한 내 삶의 유일한 안식처
세상은 그저 그가 부지런하고 영리하게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 그의 하루하루는 늘 한 발짝만 물러서면 끝없이 추락하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뼛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가족이라는 존재 덕분이다.
“가족은 제가 험난한 시간을 온전히 버틸 수 있도록 벼랑 끝에서 지켜낸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훗날 그는 사랑하는 자녀 무진이와 가빈이에게 그저 성공한 변호사가 아니라, 가족과 사회를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따뜻한 아빠로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같은 뼈아픈 사회적 슬픔 앞에 늘 발 벗고 나서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이다.
“돈을 저만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약자들과 연대하며, 타인의 삶까지 윤택하게 하는 진정한 부자로 남고 싶습니다.”

김기태 변호사 저서

지면에 차마 담지 못한 이야기
수없이 원고를 고치고 다듬으면서도 차마 책의 지면에 다 담아내지 못했던 가슴 시린 일화도 있다. 서툰 이민 초기, 요리를 할 줄 몰라 식용유에 미역을 볶아 대충 끓여 넘겨야 했던 이야기는 화려한 성공 이면에 감춰진 서글픈 이방인의 삶을 짐작하게 한다.
“팁 몇 달러가 아까워 식용유에 미역을 볶아 먹었던, 가난과 외로움이 끓여낸 노란 미역국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1년 반 동안 한국 식당에는 얼씬조차 하지 못한 채 큰 솥에 미역국을 끓여 일주일을 버텨야 했던 지독하게 팍팍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눈물로 삼켰던 그 미역국은 그를 주저앉힌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삶의 맹렬한 의지를 일깨웠다.
“눈물로 삼켰던 그 시간들은 저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끝내 포기하지 않아 단단해진 삶의 근육이 되어주었습니다.”

끝없는 다큐멘터리의 다음 장
두려움에 떨며 낯선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청년은 이제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쏘아 올리는 작가이자 어엿한 교육자로 우뚝 섰다. 치열했던 김기태 변호사의 휴먼 다큐멘터리가 새롭게 써 내려갈 다음 챕터의 방향은 명확하다.
“제가 새롭게 써 내려갈 다음 챕터의 제목은 다름 아닌 ‘함께 꿈꾸는 미국 변호사’입니다.” 서툰 영어와 빈약한 주머니 사정 탓에 꿈조차 사치라 여기는 이들에게, 누구나 도전하여 자신의 삶을 180도 바꿀 수 있다는 벅찬 비전을 나누는 것이 그의 첫 번째 목표다.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고단했던 이민자의 과거를 결코 잊지 않는다.
“상식과 연대로 써 내려갈 따뜻한 다큐멘터리를 계속해서 이웃과 함께 완성해 나가겠습니다.” 가족을 깊이 사랑하고,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며 쉼 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그가 그려갈 눈부신 미래다.

서른 살 청년이 꽉 움켜쥐었던 340만 원은 단순한 지폐가 아니라, 거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가장 절실한 희망의 불씨였다. 삶의 무게가 숨통을 조여올 만큼 버거워도, 스스로를 굳게 믿고 한 걸음 내디딜 용기만 있다면 기적은 반드시 피어난다. 김기태 변호사가 온몸으로 증명해 낸 이 찬란한 여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방향을 잃고 서성이는 누군가에게 벅찬 희망의 이정표가 된다. 끝내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가슴 뛰는 현재진행형이며, 당신의 내일은 오늘보다 반드시 눈부실 것이다.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한국특파원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
시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