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스마트폰 시대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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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명(시카고신학대 교수)

 

나는 헌책을 좋아한다. 같은 책을 헌책과 새 책 사이에서 고르라 하면 헌책을 고른다. 헌책이 담고 있는 세월이 좋고, 누군가의 흔적이 좋다. 내가 선택한 책을 먼저 읽은 사람과 맺는 익명의 동지의식도 생긴다. 내가 예전에 자주 가던 헌책방은 시카고 링컨파크 지역에 클락과 웰링턴이 만나는 코너에 있었다. 마지막 가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못하지만, 넘쳐나는 책을 꽂아둘 공간이 없어 바닥에 줄지어 책이 쌓여있던, 책을 세월과 냄새로 기억하게 해준 헌책방이다.

헌책을 사면 먼저 옛 주인의 이름이 적혀있는지 찾아보게 된다. 책을 구입한 연도와 날자가 친절하게 기록돼 있으면 당시 나의 모습을 기억해본다. 밑줄이 쳐 있는 부분은 더 자세히 본다. 무심코 지나치려해도 누군가의 밑줄은 늘 그 의미에 대한 물음표를 남긴다. 밑줄 옆 여백에 코멘트가 있으면 그건 또 다른 독서거리가 된다. 책에 자신의 생각을 굳이 써서 남기는 이유는 습관일 수도 있지만 강한 긍정이나 부정의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독자의 느낌과 나의 느낌이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 경우 누가 잘못 읽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한다.

시대가 바뀌어 종이책은 전자책(ebook)이나 pdf문서 또는 디지털 활자로 대체되기 시작한지 오래다. 나도 직업상 책을 많이 접하게 되지만 최근엔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읽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요즘 모든 읽을거리를 스마트폰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앱을 깔고 전자책을 쉽게 볼 수 있지만, 그 경험은 우리가 기억하는 책읽기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예전에 책을 읽기 위해선 마음을 먹고 책을 잡아들어야 했다. 책을 덮겠다는 마음의 결정을 하기까지의 시간은 나와 저자가 일대일로 만나는 시간이었다. 때로는 책의 포로가 된 심정으로, 때로는 내 자신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마음으로 책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책을 읽는 시간은 신문을 보는 시간과도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었다. 스마트폰에선 손끝의 스침 하나로 책에서 잡지, 신문에서 소셜 미디어까지 순간적으로 이동할 수 있다. 책을 집어들 용기가 필요하지도 않고, 질적으로 다른 독서를 허용하지도 않는다. 책에 집중하기에는 손끝의 유혹이 너무 강하다. 읽는다기보다는 훑어본다는 게 맞는 표현인 경우도 많다.

전자책(ebook)엔 헌책이 없다. 아무리 많은 책을 스마트폰에 저장해 놓아도 세월의 흔적과 지식의 무게로 나를 겸손케 만들지 않는다. 책을 읽는 방법을 잊어버렸다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인지 커피숍에 앉아 스마트폰이 아니라 책 한권에 빠져 있는 사람을 보면 우리를 대신해 어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처럼 느껴지기고 한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교과서가 아니라 컴퓨터를 지급하는 시대이니, 책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는 건 이 세대가 마지막인지도 모른다.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사람들이 책에 담고 걸었던 소망과 기대는 매우 컸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인생에 쉬운 답이 없으니 오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진리의 깨달음, 무지에서의 해방, 내면의 성찰과 치유 등은 모두 고전적인 책들을 씨름하며 외로운 자기반성과 사유를 필요로 하는 문제라 생각했다. 하지만 갈수록 그런 실존의 문제들이 전문가의 영역이 되어 책은 소외되고 우리는 그들의 진단과 처방의 소비자가 되어가고 있다. 최근 책의 미래를 논하는 얘기가 많이 들린다. 그 미래는 책의 미래가 아니라 결국 인류의 미래이기 때문에 떨림과 두려움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다.(※이 글은 지난 3월1일 한국기독교연구소 봄 학기 첫 독서모임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시카고 한국일보의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