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Friendly Persuasion

1756

이영후<TV탤런트/네이퍼빌>

 

<우정있는 설복>은 1956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미국 영화다. 무뚝뚝하지만 견실한 이미지의 게리 쿠퍼와 퀘이커교도 목사로 나오는 도로시 맥과이어가 주연이었는데 남편이 부인한테 쩔쩔매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감독은 영화로 말한다>는 후레임데로 말한다면 윌리엄 와일러는 근본주의와 원리주의 사이에서 어느쪽이었을까? -하나님의 뜻과 그 근본을 따라야 한다는 목사엄마의 협박과 애원에, <사람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살지 못하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해요>라며 총을 들고 나선 아들사이의 갈등에서 그는 누구의 편을 들었을까?  아무리 만류해도 듯지않는 아들을 그냥 보고만 있지말고 뭐라고 말 좀 해 달라는 엄마에게 <나는 저 애의 아비일뿐 그의 양심도 아니며 더구나 그애의 인생 그자체도 아니오>하면서 완곡하게 거절을 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그 영화 제목처럼 <우정있는 설복>쪽에 선 원리주의자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영화의 원제 Friendly Persuasion은 두가지의 서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의역을 하면 <퀘이커교도의 믿음>이라는 뜻을 품고있으며 퀘이커교도들은 you대신 Thee라는 고어와 함께,  <friend>를 한 <형제>, <persuasion>을 <믿음>이라는 관용어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수 없는 원리주의도 좋지만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지언정>이라는근본주의를 외면 할수도 없다는 <I am on the fence>의 모호한 남자, 윌리엄 와일러. 그러나 보수와 진보라는 단순논리의 후레임에서 본다면, 오히려 그는 보수 쪽인 근본주의자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엄중하게 따저야 할 궁극적인 입장이 되어 본다면 말이다. 믿음과 신앙이란 이렇게 절제된 언어속에 있다. 근본주의와 원리주의가 비슷할것 같으면서도 본질을 인식하는데에 있어서 이렇게 엄청난 거리가 있듯이, 다원주의라는 고집 까지를 합쳐놓으면 그야말로 풀수없는 실타레가 되고말기 때문이다. 지금 한반도에는 남북회담과 북미회담이 걸려있다. 남북회담은 속된말로 <짜고치는 고스돕>같은 북남회담이 될것이고 북미회담은 으름짱 다음에 오는<고요한 태풍>같은 미북회담이 될것이라는 전망이다. 말은 지어내기가 쉬운 고무줄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대화법>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대규모로 연구한 학자와 책들도 있다. 그러나 대화는 대체로 일방통행적이다. 이미 정해 놓은 명제를 가지고 이리저리 둘러 대고 있을 뿐이지 그 입장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특히 항복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절대로 다른말로 그걸 대신 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구고두<九叩頭>,삼복배<三伏拜>, 그것도 <철사줄에 꽁꽁묶여, 맨발로 절며절며 울고넘는, 한 많은 미아리 고개>같은 고난, 거두절미하고, 머리가 잘려 나가고 꼬리까지 짤려버리는 해체수술을 의미하는 극렬상황 자체를, 김정은이가 어떻게 감당할수 있을까? 제 고모부가 당한 고통보다 더 참혹한 고난을 견뎌낼만한 한줌의 지각이라도 혹시, 그에게 있기는 있단 말인가? 혹자는 스위스 유학경험을 살려 진정한 패권국인 미국의 사드를 <중강진과 나진선봉에 배치 때리구, 똥뙤놈들과 각을 세울테니낀 거저 제발 목숨만 살콰주구레>라고 하지 않을까하는 대박꿈을 꾸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상누각 보다도 허망한 기대이다. 바랄걸 바라야지 지은 죄가 얼마인데, 불구대천의 원수는 고사하고 아무리 용서할라고 애를 써도 독까스와 핵을 인류에게 무분별하게 퍼뜨리면서 먹고살고 있는 저 악마, 오랑시의 저, 페스트균 과도 같은 도적떼들하고 어떻게 태평하게 마주하고 앉을수있단말인가? 대좌는 물론, 시작부터가 전염병에만 걸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함께 자리에 앉는것 자체 부터가 무위가 된다는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