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Rabbit in the ha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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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후(TV탤런트/네이퍼빌)

 

사람의 속임수는 눈이 부신다. 우선, 검은 커텐이나 붉은 보자기를 씌워놓고 부리던 농간을, 밝은 대낮에 그것도, 공원에서 사람 몸을 둘로 분리 시키는데 까지 진화를 하며 성공했다. 미리 준비한 소품도 속여가면서 말이다. 참으로 경탄 할수밖에 없는 연출이다. 연출이 아니라면 동맥과 정맥을 놀라운 속도로 순환하던 피가 댓줄기처럼 뿜어 져 나와야 맞다. 따라서 연출은 연출이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 연출은 도데체 누구의 작품이며 누구의 농간으로 저렇게 자동인형 처럼 시침을 뚝따고 천연덕 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었을까?,하고 열번 생각 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미북회담이후 감투같은 미국모자와 그안에 숨겨진 토끼한마리가 도데체 몇마리로 분화 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꺼리가 그야말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실관계를 조목조목 따저서 전후좌우를 정밀하게 추적하는 사람들과 그냥 내가 바라는데로 굴러가기 바라는 맘이 급해서 그저 어림짐작으로 강변을 토해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혼란을 겪고있는 사람들은 물론 어린 백성들 뿐이다. 온갖 비밀을 마술사 처럼 움켜쥑고 있었던 전직 CIA요원을 비롯해서 변호사 언론종사자 자칭 전문가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화두는 <목판을 두드리니 편죽이 울린다>는 말 처럼 정말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어둠컴컴한묘실에서 갑짜기 눈을 부릅뜨고 살아나오는 미이라를 보고 장래가 촉망되는 착한청년이라고 추켜세우는 아첨과 공손한 예절은 어느 도덕 책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대목이기는 하다. 그러나 트럼프는 신들린 사람처럼 말한다. 줏어 섬기는 말 자체가 정론을 가지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휘유와협박이기 때문에 애둘러 말할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돌아가세요>라는 교통표지판을 인식하라는 점잖은 소구법이라고나 할까? 그는 지난날 한국 국회에서 하늘나라의 사도처럼 연설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회상해 보라는 권면을 하면서 본질을 파악해 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것에 대하여 강연을 할라치면 36강을 해도 모자랄 정도라는, 유연한 친절을 우리는 잊고 있다. 기득권이 허물어 질가 두려워 한사코 평가절하를 일삼고있는 미국내 좌파들과 언론들의 공세에도 끄떡하지않고 새로운 궤적을 그리고 있는 트럼프, 그에게도 사실, 정답이 곧 쥐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래를 낙관 할수는 있다. 그동안 우리들은 정과 반, 흑과 백에 익숙한 시대를 살아왔다. 한마듸로 정의를 내릴수 없으면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실망부터 먼저 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느님께서는 왜 십자가의 고통을 설계하셨을까? 아니, 설계하셨다는 말 자체도 이미 정답이라고 전제한 속단이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생자체가 무엇인가?라면서 먼저 정의 하려고 든다. 그러나 나의 뜻도 아니고 너의 뜻도 아닌 명확한 과정이 먼저일 뿐이지 그 의미를 부여 하는것은 나중문제 일 뿐이다. 이세상 어느 누구도 과정을 무시하고 뛰어 넘을 수는 없다. 하느님 조차도 그렇다는 말이다. 바다가 갈라지는 홍해의 기적도 하나의 과정일뿐이지 예정이 아니다. 그것이 예정이었다면 아우스빗츠의 깨스독살과 좀비화되어가는 정치범의 요덕수용소도 이미 예정 되었다는 말이된다. 이제 우리는 악마들이 넘실데는 바다와 그 바다를 건너야 할 운명 앞에 놓여 있다. 예정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바다 말이다. Flattering get you nowhere. Let’s wait and see it! 미국대통령 트럼프도 이렇게 같은 말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