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성경상식 44] 죽으면 바로 주님께 가나요? 아니면 나중에 부활해서 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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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원 목사(시카고언약장로교회 담임)

구원받은 신자는 죽는 순간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땅에 묻혀 썩어 사라져 있다가 역사의 종말 시점에 깨어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일까?

마지막 때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주님을 맞게 될 것을 역설한 사도 바울이 정작 자신의 죽음을 언급할 때는, 자신일 죽음을 언급할 때 사용하던 ‘잠’ 개념 대신 ‘천국에의 즉각적 진입’을 말한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3, 고후 5:8 참고).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도 같은 약속을 들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그렇다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을 ‘잔다’고 하며 예수의 재림 때까지 땅 속에 있는 것으로 언급하는 본문들이(고전 15;51-53, 살전 5:14-17) 이런 생각들과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이 들린다.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지금 우리가 갇혀 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초역사적 세계가 갖는 신비다.

영혼으로서의 인간이 죽어서 물리적(物理的) 한계에 갇힌 이 세계를 떠날 때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벗어난다. 공상과학 영화 <매트릭스>(1999년)에서 전지전능한 프로그래머는 ‘매트릭스’의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하며 사건과 인물을 매트릭스 안의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든 자유롭게 들락날락하게 만들 수 있다. 세계 밖에 존재하시지만 세계 안에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짐작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신학적 개념이다. 하나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으로 엮인 역사라는 매트릭스를 초월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永遠)이란, ‘지루하게 계속되는 장구한 시간’이 아니다. ‘영원’이란 인간의 인식과 존재 한계인 시공(時空)을 초월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거기에는 우리 식 개념의 시간 길이가 의미 없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그렇다면 바울을 비롯하여 예수의 재림 전에 죽은 자들의 사망 시점과 재림의 종말 시점 사이의 2천년 넘는 시간은,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 속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우리 인간의 한계적 사고 개념일 뿐이다.

신자들은 죽는 순간에 바로 예수 재림의 시점으로 건너뛰는 것이다. 죽는 순간에 시간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자들은 죽는 순간에 바로 종말 때의 부활을 경험하여 다시 오시는 주님과 함께 영원 속에서 같이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낙원’은 바로 그렇게 주님의 강림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동거의 현장이며 실재다. 따라서 죽은 자들이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고후 5:8, 빌 1:28)과 죽은 자들이 변화된 형상으로 부활하여(고전 15:51-53) 주님을 맞아 영원히 동거한다는 것(살전 4:16-17)은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두 다른 방식의 표현일 뿐이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 영원을 확보한 사람들에게는, 개인적 종말과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살아서 맞이하는 역사적 종말 사이의 간극이 없다. 단지 이 물리적 세계 속에서 느끼는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나 그 물리적 존재의 육신을 벗어나는 순간, 그 시간의 한계도 사라지니 이 간극 또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신비한 고백이 나온다.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 4:15).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