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순서(성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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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논문심사위원)

구원의 과정 중에 성화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현실적 증거가 된다. 그리고 성화의 가장 보편적 형태가 선행이다. 그렇다면 선행이란 무엇인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고, 다친 사람 도와주고, 적십자 같은 곳에 기부하는 것이 선행일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의에 의한다면 그렇다. 그런데 성경, 특히 개혁주의 신학이 정의하는 선행은 좀 다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장 1항의 정의를 보자. “선행이란 하나님께서 단지 그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명령하신 것들만을 가리킨다. 성경의 보증이 없이, 맹목적인 열심에 의한 것이나 선의를 가장하여 사람들에 의해 고안된 것들은 선행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행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일치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진리로 선포된 것과 우리 인간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진리가 믿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이 열정에 대해서는 무게를 두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가슴은 뜨겁지만, 진리에 대한 앎이 뜨거운 가슴을 따라주지 않기에 그릇된 길로 간다. 이런 현상은 대단히 위험하다. 회심하기 전의 바울이 이런 상태였다. 대단한 열심이 있었지만, 진리에 대해 잘못 알았기에 주님의 교회를 핍박했다. 선행은 항상 하나님의 계시를 기초로 진리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둘째로 선행은 “선한 양심”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선한 양심이란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착한 마음씨를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므로 말미암은 선한 양심을 가리킨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른 선행을 할 때에 자기만족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한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느냐, 아니면 자기만족이나 자기 위로 때문이냐에 따라서 선행의 여부가 결정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장 2항이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선행은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의 열매들이요 증거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선행을 실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선행은 성화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성화가 거룩으로 향하는 내적 변화의 과정이라면 선행은 성화가 외적으로 나타난 행위이다.

그런데 성화는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회심한 사람에게 일어난다. 회심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회개요, 또 하나는 믿음이다. 회심은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이다. 자기 의지에서 탈출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 마귀의 법에 대한 순종에서 하나님의 법을 순종한다. 이것을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 믿는 것”이다. 또한 예수 믿어 회심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거듭나게 해 주셔야 한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중생 되어 예수 믿어 회심하지 않는 사람은 선행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 믿어 회심하고, 의롭다고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만이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