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순서(소명/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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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로뎀교회 담임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에서 당신의 선한 뜻에 따라 구원할 자를 선택하시고 나머지는 유기하신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는 하나님의 때에 부르신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하는데 특히 유효한 소명이라고 칭한다. 유효한 소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부르시면 반드시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종교 개혁주의자들은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표현을 썼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거부할 수 없다.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의지를 반드시 이루신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부름을 받는 자는 반드시 응답한다.

유효한 소명 이전의 인간은 모두 영적으로 죽은 시체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원받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시체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은 반드시 효과를 일으킨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하나님이 영적 시체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런 역사를 거듭남, 즉 중생(重生)이라고 한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죽어 무덤 속에 있었다. 죽은 나사로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아무런 느낌이나 반응도 하지 못한다.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나사로 앞에 예수님이 오셔서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외치니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요 11:44).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예수님이 나사로의 영혼을 시체 속에 다시 넣어주셨기 때문이다. 나사로의 영혼이 들어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니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중생이 이와 같다.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죽었다. 이 말은 영혼이 소멸했다는 말이 아니다. 영혼이 죄악으로 부패하고 오염되어서 사탄에게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의 음성을 듣고 사탄이 지시한 대로 따른다. 사탄의 지시를 따른 영혼도 어떤 즐거움이 있지만, 그 즐거움은 영원하지 않고 곧 시들며 사망으로 향한다. 이런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새로운 영을 주신다. 그러면 죽은 영혼이 살아난다. 하지만 완전히 살아난 것은 아니다. 아직 옛 본성이 중생한 영혼 속에도 남아있다. 부패한 자아가 있고 아직 죄성이 있다. 그래서 중생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길에 있는 하나의 과정이다.

중생한 사람 속에는 두 개의 자아가 존재한다. 영혼이 두 개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의 영혼이지만 부패한 자아와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아가 공존하여 싸우기 시작한다. 그래서 중생한 자의 이 땅에서의 삶은 많은 갈등을 수반한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와 싸워야 하므로 괴로울 때가 많다. 이 점이 거듭나지 않는 자와 거듭난 자의 차이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감기에 걸렸다. 몸속에 감기 바이러스가 침입한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모든 사람이 이와 같다. 이때 의사가 항생제를 처방해 주었다. 항생제를 맞자마자 순식간에 낫는가? 물론 아니다. 완전히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항생제를 맞은 당신의 몸속에는 전쟁이 일어난다–물론 엄밀히 말해 그 전부터 일어나기는 하지만…–. 항원과 항체 간의 전쟁이 일어난다. 중생한 사람이 이와 같다. 옛 자아와 거듭난 자아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다. 은혜의 방편인 말씀, 기도, 성례를 잘 활용하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 거듭난 자아가 이기고, 게으름으로 은혜의 방편을 활용하지 않으면 옛 자아가 싸움의 주도권을 갖는다. 악한 사탄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중생한 자라도 삼킬 자를 찾는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성령으로 중생한 자는 분명 마지막 승리를 거둘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에 따라서 이생에서의 심판과 행복의 수준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