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의 아버지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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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관 시카고노인건강센터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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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국군의 서울 탈환이 현실화되자 낙동강 유역까지 내려갔던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포위당한 인민군은 산악지대를 통해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살을 애이듯 추운 겨울밤 문시랭이의 개들은 일제히 짖어대기 시작했다. 삭장구 담(나무가지를 엮어 만든 담) 사이로 따발총을 멘 인민군인들이 보였다. 늘 조용했던 문시랭이였기에 갑자기 터져 나오는 개 짖는 소리는 불길할 정도였다.

문시랭이에서 도보로 약 20분 걸어갈 수 있는 고추 골이라는 자그마한 동리에 진빨갱이 ‘安’이라는 자가 살고 있었는데 이 者에게 불려가 행방불명 된 사람들이 많았다. 전부 산기슭에 파묻었다는 얘기만 있을 뿐 진실을 아는 이가 없었다. 이 者가 문시랭이 예배당에 나가는 교인들을 전부 학살(기관총으로)한다는 소문을 냈다. 이 소문 때문에 예배당은 텅 비었다. 다만 하태수 목사님 한 분뿐이다. 하 목사님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다섯시 새벽종은 꼭 치시는 분이요, 종을 치고 나신 후에는 예배당에 들어가 기도를 오랫동안 하시는 분이셨다. 십분, 이십분이 아니요 길게는 두세 시간 긴 기도였다. 스님이 열반에 들어가기 위해 밤을 새우며 염불을 한다는 얘기에 비추어 볼 때 하 목사님도 똑 같은 분이셨다.

나는 당시 유명한 부흥강사였던 박재봉 목사님에게 푹 빠져있던 때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고 확신했다. 눈물도 많이 흘렸고 통성기도 때는 소리도 잘 질렀다. 그래야만 성령님이 내려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두툼한 솜이불을 둘둘 마른 체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기도하시는 모습이 가까이서 보였다. 예전처럼 방석위에 앉아 講道床 마루위에 머리를 떨구고 기도하시고 계셨다. 꿇어앉으신 아버지의 모습은 늘 경건하다고 느껴왔기 때문에 그 날의 아버지 모습또한 경건해보였다. 나도 기도를 시작했다. “주님, 하나님, 아멘, 할렐루야, 거룩하신…, 믿습네다…” 등등 부흥회 때 자주 쓰는 감탄사는 아버지 기도에 방해가 될 듯싶어 쓰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루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문수봉 위로 넘어온 아침햇살은 포근하고 조용했다. 그 언덕을 넘어 예배당 안으로 들어온 햇살! 주님이 오신 듯 아름다운 빛이었다. 예배당 옆에 서있는 밤나무 잎이 흔들릴 때마다 햇빛은 애기 손춤을 추듯 펄럭이며 앉아계신 아버지위에 내렸다. 아버지 눈가엔 아주 작은 고드름이 다이아몬드처럼 맺혔고, 講道床위에는 어머님의 젓꼭지처럼 두 개의 눈물고드름이 솟아 있었다. 좁쌀보다도 더 작은 아버지의 ‘눈물 구슬’, 자신도 모르게 떨어져 얼어붙은 눈물 고드름! 아버지는 고개를 드시면서 “재관이냐?” 물으셨다. “네”… “네가 고추골의 安인줄 알고, ”아버지 하나님 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마지막 기도를 드렸는데… 너 였구나…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시험해 보신 것 같다” 하시며 안도의 숨을 건네셨다.  허기야 아버지가 ‘安’의 살생부 제 1호였으니 그렇게 생각하셨으리라 짐작이 갔다.

오늘의 과학자, 심리학자, 조직신학자 등 많은 지식인들이 ‘神의 存在’에 대하여 분석하고 종합해서 하나의 결론을 내리지만 나는 아버지의 삶을 통해서 그 분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느끼고 있다. 어렵고 힘들 때 나는 늘 아버지를 생각한다. 내 집무실 책장위에 걸어 놓은 아버지의 영상을 종종 쳐다보면서 ‘없는 중에도 넉넉하셨고, 사람들로 인해 아픔을 당했어도 곧 기쁨을 찾으셨고, 부인으로부터 핍박을 받아도 침묵하셨고, 늘 궁핍했어도 감사의 기도를 멈추지 않으신 분이라’는 느낌 때문에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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