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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pril 2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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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9. ‘한인 경제의 가교’ 오국정 전 MB 파이낸셜 은행 한국금융부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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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국정 행장이 4월 16일 한국일보 사옥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윤연주 기자>

“절망은 인간의 의지보다 강할 수 없다”
▶금융 위기 속에서 한인들의 ‘신용’을 수호하다
▶신용의 불모지에서 ‘한인 전담 부서’ 개척한 주역
▶’10번의 법칙’으로 일궈낸 35년 외길 금융 인생

[편집자주] 본지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토대를 일군 원로들의 삶과 발자취를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아홉 번째 순서는 시카고 이민사회에서 ‘한인 경제의 가교’로 불리는 오국정 전 MB 파이낸셜 은행(MB Financial Bank) 한국금융부 행장이다. MB 파이낸셜 은행의 전신인 매뉴팩처러스 은행(Manufactures Bank)의 이사회 멤버(Board Member)에 오르기까지 그의 여정은 한 개인의 성공담을 넘어,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 경제의 높은 문턱을 넘어 뿌리 내리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한인사회의 신용을 지키고 시카고 한인 경제의 금융 문턱을 낮추는 데 힘써온 오 행장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대신중학교 재학 시절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한 가족사진.

◇ 흥남에서 부산까지, 피란길이 남긴 집념

오국정 행장은 1941년 함경남도 흥남 용흥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태어난 유복자였다. 열병으로 남편을 잃은 젊은 어머니는 어린 딸과 뱃속의 아들을 안은 채 홀로 삶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터졌고, 1951년 1월 가족은 흥남부두에서 피란선에 몸을 실었다.

오 행장은 “해군 수송선의 문이 열리며 배에 올라탔던 장면이 지금도 또렷하다”며 “어머니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상점도 모두 뒤로한 채, 장신구 몇 점만 챙겨 어린 자식들의 손을 잡고 피란길에 오르셨다”고 회상했다. 거제도에 도착한 아홉 살 소년은 뒷산에서 땔감을 구하며 일찍이 삶의 무게를 배웠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앞섰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오 행장 자택에 걸린 ‘가화만사성’ 액자. 집안의 화목을 가장 큰 가치로 여겨온 오 행장 가족의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거제도에서 8개월을 보낸 후 가족은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쌀가게와 포목점을 운영하며 자식들을 키워냈다. 어머니의 교육은 엄격했다. 오 행장은 “어머니는 늘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며 “따뜻하면서도 흐트러짐을 허락하지 않는 헌신적인 교육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오 행장은 영도초등학교, 대신중학교, 동아고등학교를 거치며 성장했다. 중학교 시절부터는 방과 후 곧장 어머니의 가게로 달려가 일을 도왔다. 쌀가마니를 나르고 물건을 정리하며 밤늦게까지 어머니 곁을 지켰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집안의 한 사람 몫을 해내야 했다”며 “어머니가 나를 위해 바친 희생에 비해 나는 충분히 갚지 못한 것 같아 늘 마음에 빚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 실패가 만든 승부근성

오 행장은 인생의 전환점으로 ‘입시 실패’를 꼽았다. 그는 “공부를 꽤 한다고 자만했었는데 고교 진학 때 1지망 학교에서 떨어지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며 “그때의 좌절이 오히려 나를 깨우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자부심이 무너진 순간이었으나 그는 이를 통해 경쟁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 행장은 “그 이후로는 다시는 같은 실망감을 주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공부에 매달렸고, 준비와 끈기라는 평생의 습관도 그때 자리 잡았다”고 덧붙였다.

청소년기 그의 삶을 지탱한 것은 공부만이 아니었다. 육상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중학교 시절 육상부장을 맡았고, 고등학교에서는 반장을 지내며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전교 릴레이 대회를 앞두고 직접 친구들을 골라 연습시키며 우승을 이끌었던 기억이 난다”며 “오래 버티는 힘과 포기하지 않는 성정은 그때 운동장을 뛰며 몸에 밴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고 재학 시절, 적십자 단장으로 활동하며 자매신흥기독보육원에 위문품을 전달하는 오국정 행장.

더 넓은 세상을 향한 동경은 그를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이끌었다. 대학 졸업 후 ROTC 2기 장교로 복무하며 조직 운영 능력을 익힌 그는 1960년대 중반 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국영기업(현 농수산물 유통공사)에 입사했다. 국영기업 내에서도 투자회사를 관리하는 핵심 부서에서 근무하며 남부러울 것 없는 안락한 삶을 보장받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오 행장은 “안정된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더 넓은 세계를 직접 마주하고 부딪쳐보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며 “그 뜨거웠던 갈증이 결국 서른을 넘긴 나이에 한국에서의 모든 기반을 뒤로하고 미국행을 결심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고 회고했다.

◇ ‘10번의 법칙’ 장벽을 기회로 바꾸다

1972년 결행한 미국 유학길은 낯선 현실과의 정면충돌이었다. 한국에서의 화려한 경력은 내려놓아야 했고, 학생이자 가장으로서 학업과 생계를 동시에 책임져야 했다. 오 행장은 “미국에 온 뒤 루즈벨트대학교(Roosevelt University)에서 공부하는 한편 바텐더와 공장 조립공, 창고 일 등을 전전하며 학비를 마련했다”며 “책상 위 이론보다 생존의 원리를 몸으로 먼저 익힌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 고생을 직접 겪었기에 훗날 한인 이민자들의 형편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1975년 자녀들과 함께한 오 행장.

그 시절 오 행장 곁에는 든든한 동반자인 아내 오인애 씨가 있었다.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오인애 씨는 오 행장과 같은 직장에 다니다 인연을 맺어 결혼했다. 미국 이주 후에는 시카고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of Chicago)에 먼저 취업해 가계를 든든히 떠받쳤다. 이후 연방준비은행을 떠난 뒤에는 외국어 학원에서 미국인 비즈니스맨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법원 한국어 통역으로도 활동하며 자신의 전문성을 이어갔다.

부부는 생계와 육아를 감당하기 위해 하루를 촘촘히 나눠 써야 했다. 오 행장은 “당시 루즈벨트대학교에서는 야간 수업이 가능했기 때문에 아내와 번갈아 아이를 돌보며 공부와 일을 이어갈 수 있었다”며 “부부가 서로를 의지하며 버텨낸 치열한 시간이었다”고 돌아봤다.

2014년 7월 은퇴식에서 아내 오인애 씨와 함께한 오국정 행장.

가장 높았던 장벽은 역시 언어였다. 특히 첫 학기에 접한 회계학 전공 서적은 한두 번 읽어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오 행장이 스스로 세운 원칙이 바로 ‘10번 이상의 법칙’이었다. 무엇이든 10번 이상 반복해 익히고, 그래도 부족하면 20번까지 파고드는 방식이었다.

그는 “학기 내내 같은 책을 10번 넘게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이치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둘째 학기부터는 귀가 트이고 회계학 용어에도 점차 익숙해졌고, 이 원칙은 좋은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부족함을 끈질긴 노력으로 돌파한 이 경험은 이후 35년 금융인 생활을 지탱한 중요한 자산이 됐다.

시카고 공연차 방문한 정명훈 지휘자 부부(사진 아래)와 함께 오 행장 부부.

◇ 이민자의 ‘금융 문턱’을 낮추다

오 행장은 1979년 커머셜 내셔널 뱅크 오브 시카고(Commercial National Bank of Chicago)에서 금융 커리어를 시작했다. 10주 동안 은행의 각 부서를 돌며 실무를 익히는 강도 높은 트레이닝 과정을 통해 미국 금융 시스템의 구조를 현장에서 배웠다. 이어 1980년 10월, 한인사회의 성장 잠재력에 주목하던 피터슨 은행(Peterson Bank)으로 자리를 옮기며 본격적인 개척의 발판을 마련했다.

1980년경 한국의 날 행사에서 피터슨 뱅크 홍보 차량 행렬에 오 행장의 자녀(왼쪽 네 번째)가 함께했다.

입행 후에도 그는 실무에만 머물지 않았다. 오 행장은 은행 업무를 시작한 뒤 경험과 지식의 부족을 빠르게 메우기 위해 스스로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기 발전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우고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고, 그 실천으로 1979년부터 아메리칸 인스티튜트 오브 뱅킹(American Institute of Banking) 과정을 이수했다. 이어 중서부 은행연합회와 위스콘신대 매디슨 캠퍼스(University of Wisconsin at Madison)가 제공하는 그레주에이트 스쿨 오브 뱅킹(Graduate School of Banking)도 졸업하며 전문성을 넓혀 갔다. 그는 실무와 학업을 함께 이어가며 전문성을 넓혔고, 끊임없이 배우려는 태도로 자신의 경쟁력을 키워갔다.

그렇게 현장과 이론을 두루 갖춘 그는, 곧 시카고 한인 이민자들이 마주한 미국 금융 시스템의 높은 문턱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보게 됐다.

오 행장은 “당시 한인 이민자들은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했지만, 미국식 신용 기록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대출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틈틈히 있었다”고 전했다. 비롯 미국에서의 사업 연륜이 짧고 경험이 부족하더라도 사업현장에는 분명한 생산성과 성장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은행이 요구하는 서류와 숫자만으로는 이를 온전히 증명하기 어려운 경우, 오 행장은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직접 현장을 뛰어 한인들의 가능성을 입증해 나갔다.

데일리 전 시카고 시장으로부터 봉사상을 받는 오국정 행장.

그는 “특히 비즈니스 성격상 현금거래가 많은 사업체의 경우 아침저녁으로, 주중은 물론 주말에도 예고 없이 사업체를 방문해 손님이 얼마나 드나드는지, 재고 회전율은 어떤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며 “서류상에 나타나지 않는 한인 특유의 성실함을 내가 직접 보고 설명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장 방문을 통해 얻은 지식은 ‘좋은 융자’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고, 내가 다룬 융자 가운데 문제가 된 사례가 한 건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해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지하의 작은 사무공간에서 시작된 한국부 업무는 점차 은행 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키워갔다. 오 행장은 1995년 피터슨 은행이 MB 파이낸셜 은행과 합병된 뒤에도 전문성을 인정받으며 역할을 넓혀갔다. 이후 주류 은행의 최고 의사 결정기구인 이사회 멤버(Board Member)를 거쳐 한국부 행장까지 올랐다. 한인 커뮤니티를 가장 잘 이해하는 금융인으로서 그는 미국 주류 금융권 안에서 한인사회의 신용을 설명하고 연결하는 가교가 됐다.

◇ 한인의 ‘정(情)’을 ‘신용’으로 증명하다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시카고에 진출했던 한국계 은행들이 속속 철수했다. 갈 곳 잃은 한인 비즈니스의 자금줄을 지켜낸 것은 주류 은행인 MB 파이낸셜의 한국부였다. 오 행장은 당시를 가장 가슴 아프면서도 치열했던 시기로 회상했다.

그는 “한국계 은행들이 떠날 때 우리를 믿고 찾아온 한인 고객들은 오히려 늘어났다”며 “하지만 2000년대 후반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부동산 가치가 폭락하자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당시 은행 본사에서는 대출금을 회수하기 위해 엄격한 심사역들을 외부로부터 투입했다. 오 행장은 그들의 압박에서부터 한인 고객들을 지키기 위해 전면에 나섰다.

오국정 행장은 2010년 경 팻 퀸 전 일리노이 주지사 초청 환영 파티에서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오 행장은 한인 고객들이 단순히 돈을 빌린 채무자가 아니라, 약속을 지켜온 최고의 파트너임을 수치로 증명해냈다. 그는 “부자라고 해서 반드시 제때 돈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며 “한인들은 가족과 비즈니스를 지키기 위해 은행 이자부터 가장 먼저 챙기는 분들이었고, 그분들의 압도적인 우수 상환 실적은 우리의 강력한 방어막이 됐다”고 밝혔다.

그는 평소에도 은행과 꾸준히 관계를 맺고 자신의 사업을 설명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급할 때만 은행을 찾는 것이 아니라 뱅커와 꾸준히 신뢰를 쌓는 사람이 결국 위기 때 도움을 받고 더 멀리 갈 수 있다”며 “내가 수십 년간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 역시 숫자 이전에 사람과 관계를 먼저 보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은행의 최전선에서 수많은 한인 기업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그는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거나 도약을 꿈꾸는 후배 세대들에게 현장의 경험이 녹아있는 실질적인 생존 전략을 전한다.

◇ “동업은 하되, 반드시 문서로 남겨라

오 행장이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 세대에게 가장 강조하는 조언 중 하나는 파트너십, 즉 동업이다. 그는 “혼자의 자본과 힘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분명한 만큼, 더 큰 도약을 위해서는 동업과 협력을 통한 규모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유태인들은 여러 사람이 자본을 나눠 투자하고 함께 비즈니스를 키워가는 경우가 많지만, 한인들은 내 것을 나누지 못하는 성향 때문에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며 “한 사람이 모든 짐을 짊어지는 방식보다 함께 판을 키우는 방식이 더 건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카고 비즈니스 전문 매체 ‘크레인스 시카고 비즈니스(Crain’s Chicago Business)’에 소개된 오국정 행장 관련 기사.

다만 그는 동업을 ‘정(情)’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반드시 문서화된 계약(Written Agreement)이 전제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정으로 시작한 동업은 결국 법정 다툼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며 “작은 장사를 하더라도 역할을 명확히 나누고 변호사를 통해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며, 무엇보다 비즈니스맨 스스로 자신의 계약 조건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십 년간 자영업자들의 흥망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는 결국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사람 사이의 신뢰이되, 그 신뢰를 오래 지키는 힘은 분명한 원칙과 기록에 있다고 봤다. 성실함 위에 계약의 원칙까지 더해질 때 비로소 사업도, 공동체도 더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이 그가 후배들에게 남기는 조언이다.

◇ 35년 헌신, 은퇴식에 담긴 의미

2014년 7월 1일, MB 파이낸셜 은행 링컨우드 지점은 오후 3시에 문을 닫았다. 평소보다 2시간 일찍 영업을 종료한 이유는 오직 하나, 오국정 행장의 은퇴식을 위해서였다. 주류 은행이 특정 임원의 은퇴를 예우하기 위해 지점 영업 시간까지 조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2014년 7월 은퇴식에서 MB 파이낸셜 은행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가졌다.

오 행장은 “은행 측이 공식 은퇴식을 마련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지점 영업까지 일찍 마감한 것은 큰 감동이었다”며 “내가 특별해서라기보다, 내가 떠난 뒤에도 MB 파이낸셜 은행이 한인 커뮤니티를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날 300명이 넘는 분들이 찾아와 주차장이 가득 찼다”며 “그 풍경을 보며 지난 세월의 고단함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고 돌아봤다.

그의 금융 인생은 30년을 훌쩍 넘는다. 합병 전후의 시간을 모두 합치면 약 35년, MB 파이낸셜 은행에서만 33년 8개월을 헌신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단순히 오래 근무한 은행원이 아니라, 한인 고객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그들의 사업과 정착을 돕고 시카고 한인사회와 주류 금융권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온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2014년 7월 은퇴식에서 한인 고객이 선물한 수박 카빙.

오 행장은 지금도 자신이 한인 사회에 큰 빚을 졌다고 말한다. 이민자 사회에서 신뢰는 단순한 감정을 넘어 생존과 직결되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이룬 성취를 개인의 공으로만 돌리지 않고, 늘 공동체가 보내준 신뢰 위에 겸허히 올려놓았다.

◇ “포기하지 않으면, 절망은 희망이 된다”

현역 시절 오 행장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하루를 시작하던 사람이었다. 새벽 6시 반이면 어김없이 눈을 떠 8시 전에는 반드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것은 단순한 근태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세운 엄격한 원칙이자 일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은퇴는 그 오랜 긴장감을 조금씩 내려놓게 했다. 오 행장은 “이제는 휴가를 가도 일감을 챙기지 않아도 되고, 늘 긴장 속에 하루를 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서 큰 자유를 느낀다”고 웃으며 말했다.

2011년 MB 파이낸셜 은행에서 열린 ‘행장과 고객의 만남’ 행사 모습.

이제 그의 일상은 평생 곁을 지켜준 아내와 가족들을 살피며 무탈한 하루를 보내는 데 맞춰져 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에게 무엇보다 크게 다가오는 가치는 건강과 가족이다. 그는 “젊은 날에는 목표를 이루고 책임을 다하는 일이 앞섰다면, 이제는 곁에 있는 사람의 평안과 평범한 하루가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한평생을 치열하게 살아낸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담담한 소회였다.

후배 세대에게는 묵직한 조언을 남겼다. 그는 “포기하지 않는 순간 절망은 희망으로 바뀔 수 있다”며 “결국 끝까지 버티고 견디는 사람이 자신의 삶과 소중한 가치를 지켜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오 행장이 남긴 유산은 단지 한 은행에서의 긴 경력만이 아니다. 척박한 이민의 땅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한인들이 미국 금융의 높은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아온 시간이었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그의 담담한 말에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한인사회를 위해 한평생 책임을 다해온 삶의 무게가 담겨 있다. 한 사람의 꺾이지 않는 의지와 성실함이 어떻게 공동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시카고 한인 이민사의 소중한 기록으로 남게 됐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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