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대산군 태수 최치원선생의 족적을 찾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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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관헌 칼럼니스트

2019.8.22. 새벽, 서울용산 역에서 군산을 거쳐 익산까지 가는 무궁화호에 몸을 실고, 다시 최치원선생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눈을 감고 살짝 작은 소리도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떠나면서 여러 해 동안 답사하며 느낀 작은 흥분으로 잔잔한 평안함을 다시 음미하는 시간이다. 서기 857년 탄생하셨으니 1162년 전 일이며, 그 때 하룻길은 지금의 한 시간으로 줄어들었건만 그 때, 그 시절 그 사람들과 오늘 우리들 생각이야 서로 멀지않은데, 떨어져 아득한 그 시대, 그 분의 모습과 말씀이 전혀 꿈속의 이야기 같아서 밝힐 수 있을까 가슴 설레인다.

수년 전에 호서에서는 부성과 남포에 이어 세 번째로 최치원선생 유적을 발굴 세상에 공표한 내 친구인 전 홍성군수 이종근과 옛 부성군태수 최치원선생선양회 홍성군 장곡의 쌍계계곡의 유적선양회를 대표하는 김태우님이 마중 나와, 우리 일행은 홍성 역에서 택시로 10분 쯤 달려,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 <장곡동길>옆 유적지에 도착했다(이 군수와는 세 번째 동행이다). 김태우님은 전문가답게 상계골짜기 서쪽 석벽을 따라 내려가면서 등 넝쿨 습한 벽에 석각이 희미하게 보이는, 그래도 雙溪(상계)라는 각자와 孤雲(고운), 書(서)라는 글자가 아직도 선명하여 사진도 찍어주었는데 확인해 보니 사진에서는 식별할 수 없었다. 골짜기에서 올라와 지난 번 보았던 석각들을 다시 보니, 첫 대면하던 감동은 반감했지만 그런대로 평지에 잘 자리를 틀고, 10여개의 크고 작은 바위에 아직은 석각의 흔적도 있고, 月陜(월협), 龍隱別墅(용은 별서) 등 몇 자는 깊게 파여져 있지만 석질(석비례)이 나빠서 머지않아 깨지고 달아서 없어질 것 같아 안타까웠다. 뿐만 아니라 전시 해 논 이 석각들이 흙속에서 비바람을 피해 무치었다가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지금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몇 년 안에 풍화로 살아질 것 같아 문화재 전문요원들의 보호와 보관조치가 시급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필자가 중학생이던 때, 그 때도 이미 밭이 되어버린 성주사 터와 남포해안가 도로변, 그리고 바닷가의 아름다운 보리섬에서 보았던 그 많은 석각이 2년 전, 아내와 함께 방문했을 때는 그 단단하고 매끈했던 유명한 藍浦烏石(남포오석)에 새겨져, 그 때 이미 천년이 지나고도 그렇게 선명했었는데, 필자가 미국에서 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일본인들이 신작로를 만들며 파낸 석각들이 길가에 있었는데 고운의 귀중한 석각들이 무지한 일꾼들에 의하여 간척과 방조제를 쌓는데 돌 더미와 함께 그 많은 돌 철망으로 쌓여 살아진 듯하다. 처음 본 대천수산중학교학생의 내짧은 한문 실력(겨우 4-5세에 천자문을 읽고 중학 1학년에 일일지계는 재어 인하고 라고 기억나는 한문시간)으로는 파진 것은 글자요 덩어리는 오석밖에 몰랐으니 애달 타 지금 모두 다 살아졌음이여! 이렇게 오늘 다시 찾아 나선 최치원생의 천년문화재를 포함한 우리 한桓-韓)의 인류문화유적과 30만 년 전 한 반도 중원 청주의 도루봉동굴과 용굴, 그 유명한 북경원인보다 더 대단한 구석기시대의 유적, 구 인류로 부터-5만 년 전의 현생인류인 우리들 호모사피엔스의 유적, 유물을 훼손, 방치한 것을 보며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 역사관광자원과 자랑스러운 민족역사가 자손들의 무지와 근시안적 욕심으로 살아지는 현실, 참으로 한탄스럽다. 다행히 두리봉 동굴은 폐허가 되기 전, 지각 있는 선배들에 의하여 발굴 조사되고 그 기록이 남아있어 불행 중 다행이지만 최치원선생의 삼교포함(三敎包含哲學)의 정신과 유적이 남아 있는 백제 유허지 사비성(부여)구지(舊址)를 포함하는 신라의 대산군(구 홍산군 비홍산) 태수와 선생이 서국(西國)=당나라희종황제의 사신으로 귀국한 인연으로 대 중국외교에 많은 역할이 부여되었던 최치원이 많은 외교활동을 명(王命)받았던 부성군(서산지역) 태수 직은 후삼국시대로 접어든 계림의 서북(西北) 국경의 요지인 천령군(함양) 태수직과 함께 최치원선생이 은둔한 전후, 신라에 보국한 마지막 시기였다는 점에서 국가 존망에 나름의 역할을 해낸 곳이라 하겠다.

우리는 고운선생이 숨 쉬던 이 자리에서 설잠스님(김시습)도 올리었을 다례(茶禮)도 못 드리고, 홍산까지 시간을 재어줄 것을 부탁하며, 차에 기댄 채, 계백장군이 황산벌이 아니라 왕성 서쪽 비홍산성에 진을 치고 금강과 마령진수군과 고구려, 왜국원병이 청해 항전했었다면, 하는 아쉬운 생각에 잠겼다. 지금도 한미일 동맹만이 북-중-러시아좌파공세를 이길 수 있는데 어찌되는 것인지 걱정하면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