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모래시계

1894

이영후 TV 탤런트/네이퍼빌

 

왜 모래시계일까?

한번 뒤집지 않으면 그냥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한번 뒤집어 놓으면 알알이 모래 알갱이가 떨어져 쌓이면서 아날로그 시계처럼 하나씩 하나씩 그 숫자를 세어 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부터 우주의 시각을 재는 시계와 같다. 그러나 한번 지나처 버리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는 한계를 모래시계는 안고 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모래 알 같은 날, 쇠털같이 많은 날들을 살아가면서도  무엇인가를 남긴다는 것이다. 남긴다는 말은 어쩌면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는 시간을 되돌릴수 있을까? 누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착한 아이처럼 영차영차 하면서 되돌려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고인이 되어 버렸지만 김종학의 흐트러진 머릿칼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그의 눈은, 그 허물어진 성터를 복원 해야 만 직성이 풀리는 정도가 아니다.

왜 허물어 졌을까? 왜 허물어 져야 했을까? 왜 그렇게 허물어 지지 말라고 지성으로 말렸는데도 주저물러 앉아서 주인공은 마침내는 사형<死刑>이라는 쓰라린 굴레까지 벗어나지 못했을까?

돈이란 무엇이며, 정치란 무엇이고, 권력이란 또 무엇인가? 거기에 등장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이루어 놓았고 무엇을 위하여 싸워 왔다는 말인가? 드라마 모래시계는 숫자로만 치부한다면 세속의 말로 공전의 대기록을 갖고있다.

최고 시청율64.5%, 평균시청율 50.5%, 수도권만 볼수있었던 외진 방송이 7개 지역에 방송국을 한꺼번에 개설 할 수 있도록 만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강자의 <모래시계>가 되었다. 이와같은 성공과, 비결이 정말 무엇이었을까? 오래된 고전이기는 하지만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평범한 문법이었다. 평범이라고 하는것이 그냥 평범에 지나지 않는 문법 뿐일까? 아니, 전 국민들을 공분으로 들끓게  했던 고질같은 부정부페, 저 스럿머신 깡패와 비호세력들, 그 정권실세들을 이잡듯이 잡아내어 줄줄이 감옥으로 보냈던 암행어사 와도 같은 멋찐 기개와 용기, 이것 마저도 역시 그저 그런 평범이었을까? 그렇다. 악을 악이라고 말하고 의를 의라고 주장하는것은 평범한 것이며 그평범한 문법데로 산다고 하는것 자체가 평범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그와 같은 평범에 열광할수 밖에 없는 것일까? “고전이란 우리의 먼 미래”라고 일러준 성현, 맹자도 있다.

지금,무엇이 중한지도 모르면서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열 여섯명이나 등록금을 내고 자리다툼을 하겠단다. 그중에 모래시계의 닉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의 주의, 주장이 명쾌하다. 현실인식을 두려움 없이 쏟아 놓으면서 권선징악을 부르짖는다. 살아온 그의 경력이 결코 다른이들 처럼 더럽지 않다.

더럽기는커녕 미래지향형의 식견은 우리의 먼 미래 까지 믿고 맡길 수 있는 단 한사람의 평범한 일꾼이라는 믿음을 준다. 그에게 씨워진 통계숫자는 모래시계와 같다. 그는 광장에서 외친다.

세상풍조 어두운 밀실에서 우물쭈물 야합하는 그런 수많은 모리배 와는 결단코 다른 인간이다.  광장에서 국민들의 상처난 가슴에 손을 대며 천둥처럼, 호랑이 처럼 외치고 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서 천둥은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일찌기 서정주 시인이 보았던 저 예지의 세계, 우리들이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렸던 하늘의 기적, 그는, 범의 모습으로 드디어 우리에게 표연히 나타났다.

시간이 너무 없어서서 촉박하다는것, 그러나 모래시계는 다시 뒤 엎어지면서 또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것, 그 평범의 문법은 절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