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왕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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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규 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목사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화를 이르는 말입니다. 어진은 제작 방법에 따라 도사, 모사, 추사 등으로 분류합니다. 도사는 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이고 모사는 원본을 밑에 받치고 그려낸 것이며 추사는 생존시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왕들의 어진은 태조, 원종, 영조, 순조, 문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 등이 남아있는데 이 중 영조의 어린 시절을 그린 연잉군의 어진만 도사본이고, 나머지는 원본을 베껴서 그린 그림입니다. 원래는 세조, 숙종, 정조 등의 어진도 더 있었으나, 1954년 12월 10일 임시로 부산으로 옮겨 뒀을 때 화재로 인해 대부분 불에 타 없어지고 현존하는 어진만 남았다고 합니다. 1만원권 지폐에 있는 세종대왕의 모습도 실제 왕의 어진이 아니라 운보 김기창 화백의 상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몇 해 전 ‘왕의 얼굴’이라고 하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는 관상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었는데요 극중에서 선조는 자신의 얼굴이 왕의 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반면 광해는 왕의 얼굴에 걸맞는 관상을 가진 것으로 설정되어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이 가미된 픽션적 설정입니다만 실제로 선조는 초상화 남기는 것을 싫어해 실제 그 모습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선조가 어진 그리기를 극구 거부 했었던 이유가 얼굴에 어떤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냐?”(요 1:19) 로마의 압제 가운데 있었던 유대인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예언된 왕,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낙타의 털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기이한 말씀을 전하는 한 사람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냐?” 이 질문의 의미는 “네가 메시야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침례 요한의 행색을 보면서 “네가 설마 메시야? 그 예언된 왕 일리가 없어!”라는 뉘앙스가 그 질문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역시나 요한의 대답도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놀라운 말을 이어갑니다. 곧 그분이 오실 것인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왕, 메시야는 누구인가? 그때 요한은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6) 사람들은 두리번거리며 도대체 어디에 메시야가 있다는 말인가! 하고 찾아 보았으나. 그 주위에는 왕의 용모를 한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요한이 가리킨 자의 행색은 초라했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예수의 모습은 그들이 기대했던 왕의 용모, 왕의 관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상은 왕의 얼굴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게 됩니다(마 26:67).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메시야처럼 생기지도 못한 게 메시야 행세를 한다고. 왕의 관상을 가지지도 못한 것이 감히 왕이라고 말한다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왕의 모습, 왕의 용모, 왕의 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분의 얼굴을 때렸습니다.

우리는 어떤 왕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준수한 외모와 겉치레가 가득한 예수님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그런 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외모는 보잘 것 없었지만 그분은 어질고 마음이 깊으며 연약하고 상한 자 곧 죄인들을 지극히 사랑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어진은 비록 남아 있지 않지만 그분의 삶의 모습이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참된 왕의 모습을 가지셨던 예수님을 발견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