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 시대 바벨탑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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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목사(두란노침례교회 담임) 

아볼로는 에베소의 한 회당에서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전합니다. 그러나 정작 구원의 복음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를 데려다가 복음을 자세히 가르쳐줍니다. 아볼로의 태도가 큰 도전을 줍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대도시에서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학자입니다. 반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텐트를 만들어 파는 상인에 불과합니다. 아볼로가 이들 부부를 가르쳐야 그림이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볼로는 그들의 가르침을 겸손한 태도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겸손의 영성 때문에 아볼로는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 알던 것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구원까지 얻는 최고의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볼론을 통해 겸손의 의미를 배우게 됩니다. 겸손의 첫단계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인정하는 겁니다. 두번째 단계는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완전하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겁니다. 이 둘이 함께 나타날 때 겸손의 영성이 완성됩니다. 겸손한 자가 누릴 복도 엄청납니다. 한 가지만 예로 들어봅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쳐주십니다(시편25:9).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삶 앞에서 부족한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겸손히 구할 때, 하나님께서 손수 그의 손을 잡고 이끌어주신다는 겁니다.

신종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깊이 성찰해봅니다. 지금 이 때가 다시 바벨탑을 쌓고 있는 시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인간들이 모여 바벨탑을 쌓아올린 동기는 두 가지였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홍수와 같은 대재앙을 막아내자.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아 우리의 이름을 높이자. 인간의 교만으로 쌓아올린 것이 바로 바벨탑이었던 겁니다. 최근 과학과 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달하면서, 흥분한 인간들이 또 다시 바벨탑을 쌓아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고만장한 인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화의 영역으로 내몰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우상과 거짓 신과 같이 취급하기 시작한 겁니다. 니체가 선언했던 신은 죽었다는 명제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깊이 스며든 겁니다. 인류가 힘을 합쳐 인간 안에 내재된 초인적 힘을 개발해간다면, 과거 인간이 신의 경지라고 생각한 그곳에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하게 될 거라고 믿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을 사용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잊을 때, 하나님과 단절되는 비극에 빠지고 마는 겁니다. 그 비극을 막기 위해 하나님께선 지금까지 수 많은 경고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들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경고해오신 겁니다. 14 세기 유럽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흑사병부터, 1900년대 초와 중반에 있었던 세계 대전, 1929년부터 시작된 대공황, 최근 인도네시아와 일본에서 있었던 쯔나미 재앙, 그리고 현재의 신종 바이러스까지….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해온 과학과 기술을 가지고도 속수무책인 상황들을 통해 하나님께선 인류의 교만에 경고의 메시지를 주고 계신 겁니다. 성경 속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깨닫듯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유는 깨어나라는 겁니다. 겸손의 영성을 회복해서 다시 하나님을 찾는 자,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겁니다.

코비드 19 사태를 지나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먼저 겸손의 영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동시에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선 이스라엘을 끌어안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같은 이유로 주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울며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바벨탑을 쌓고 있는 이 시대 백성들을 끌어안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