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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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한국인을 사랑하며 전도자의 삶을 살아왔던 메리 R. 힐만(Mary R. Hillman)는 1870년 4월21일 오하이오 주 뉴어크 지역에서 출생 하였고 오하이오 주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후 병원에서 간호 훈련를 거쳐, 뉴욕주에 있는 폴츠 선교 재단에서 교육받고 1899년 12월31일에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내한 하였다.

그녀의 초기 선교사역은 남성들이 할수없는 여성 교육에 힘썼다. 제물포에 있는 여성 선교 협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여 이화 학당의 3대 당장이었던 조세핀 페인(Josephine O. Paine) 뒤를 이어 당장의 직무를 대리한 당장서리를 맡았다.

힐만의 사역은 강화 지역과 해주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여성 사경회를 조직하였다. 1902년에 설립된 삼일 소학장에서 1928년까지 이사장으로 봉직하며 교육에 힘써왔다.

힐만의 선교 사역은 교단 선교부로부터 임명받아 인천, 수원,원주, 강릉까지 확장 하였으며 남녀공학 교육기관인 의정 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수시로 지역에 성경 강습회를 열어서 여신도들을 가르치고 전도하여 교회 부흥에도 큰 일조를 이루게 된다.

교육의 열정을 가진 힐만은 교파도 초월하여 연합 정신에 입각하여 교단을 초월하여 설립되는 여학교 건축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미국 북 장로회 베어드(Baird, W. M) 선교사가 교육사업에 교파간 협력을 언급 했을때 힐만 선교사도 감리회 여자학교 책임자로 있으면서 베어드의 주장에 동조하며 건축비를 마련하고 새 여학교를 설립 하려는 장로교 선교부와 합동할 것을 제창했다.

힐만 선교사는 여성교육뿐만 아니라 조선 예수교 서회의 신앙서적 번역에도 힘썼고 우리 민족이 일본이 제국주의 식민지로 삼았을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기도했다.

사경회를 열어서 모세와 여호수아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결코 조선을 버리지 않을것” 이라고 격려했다. 힐만의 동료들은 그녀를 표현하기를 영성이 깊어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말씀을 배우는 제자와 같았다고 한다. 그만큼깊은 영성이 있었으며 그녀의 얼굴은 항상 광채가 있었고 다른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라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오직 사랑으로 섬김의 삶을 보여 주었다.

힐만 선교사는 몸을 돌보지 않고 과로로 인한 병이 악화되어 1928년 2월1일에 세브란스병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양화진에 안장 되었다. 그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처럼 조선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과 헌신은 한국 교회가 본받아 빚진 마음으로 세계 선교는 물론이고 코로나 19를 맞이하여 어려운 이웃 사랑 실천의 삶을 살아야 될것이다.

“Never the Lees I Live”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 있노라)

(참고문헌: 양화진 선교사의 삶, 이화의 10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