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29]에델 반 와그너 언더우드(Mrs. Ethel Van Wagoner Under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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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나눔교회 담임)

언더우드(H. H. Underwood, 원한경)의 부인 와그너 여사(Mrs. Ethel Van Wagoner Underwood)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태어났다. (엡 4:11)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묵묵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일을 기뻐하는자가 있다. 내가 가진 달란트가 부족 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의 달란트가 더 좋아 보여 기가 죽거나 낙심할 이유도 없다. 내게 부족한 달란트는 남이 갖고 있고 남에게 부족한 달란트를 내가 갖고 있음으로 서로 가진 달란트를 나눌 때 모두가 온전한 달란트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공평하신 하나님의 주신 은사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할때 빛나며 값진 것이다.

에델 반 와그너 선교사(Mrs. Ethel Van Wagoner Underwood)는 1888년 미시간에서 출생하여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1912년 대학을 갓 졸업한 24세 때 미시간주의 작은 마을을 떠나 이역만리 떨어진 한국에 와서 4년 동안 한 교실에서 학년이 모두 다른 30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열정이 있었다. 그녀는 서울 외국인학교의 유일한 교사였으며 이것이 서울 외국인 학교의 출발점 이었다. 그녀는 언더우드 2세 원한경과 결혼하여 남편 선교사역에 적극 내조하며 본인은 한국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 시키기 위하여 기독교 여자 절제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 여성들은 차별을 받으며 자신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 할수없는 환경 이었다. 이들에게 꿈을 갖도록 교육 여건을 만들어주고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 나도록 생활 여건을 개선 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상황은 먹고사는 문제로 일자리를 찾기 위하여 도시에 몰리고 특히 젊은 여성들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어두운 사회로 발을 내딛으며 그 세계에 젖어 들어갔다. 오늘날 빈곤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로 먹고 살기 위하여 매춘 행위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실시간 세계 통계에 의하면 영양실조로 고통 받는자들이 848,533,329명이며 하루 굶주림으로 사망한자들이 18,259명이 된다.

180년전 조선땅에 먹을것이 없어 젊은 여성들이 방황할 때 그들을 위하여 와그너는 상담 요원들의 양성하고, 임시 보호소와 젊은 여성들을 보호하는 기관을 설립 하는일에 주력하게 된것이다. 안따깝게도 계획한 일을 이루지 못하고 1949년 3월17일 62세로 괴한의 저격을 받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와그너가 살해 당하기전 교수 부인회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이모임은 지도층에 있던 교수 부인들이 사회에 기여하도록 활동을 모색하는 후원 모임 이었다. 치안을 맡은자들에 의하면 괴한들이 이 모임에 참가했던 저명한 여류 시인이며 UN총회에 관계했던 모윤숙씨를 살해 하려다가 실수로 와그너를 살해 된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당시에 암살테러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해방이후 미국인이 처음으로 살해되어 세간의 관심을 갖는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남편 원한경 선교사는 유죄 반결을 받은 살인범에게 최대한 관용을 베풀도록 진정 하였다. 와그너 선교사의 장례는 백낙준박사가 직접 영결사를 낭독했으며, 당시 장례식은 수천명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울음을 터트리며 눈물 흘리는 모습이 마치 국장을 치르는 것과 같다고 회고했다. 와그너 선교사에 대한 존경심은 그녀의 진실성과 겸손에서 온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신뢰할만큼 아낌없는 관용을 베푼 그녀의 삶과 정신은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것이다.(참고문헌: 원한경의 삶과 교육사상, 언더우드가문 이야기, 미국북장로교 한국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