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은 ‘예비된 은혜’… 저는 영원한 현역입니다”
▶45년간 꺼지지 않은 24시간 응급전화 ‘생명의 벨’
▶국경과 세대 너머 멈추지 않는 ‘생명의 파수꾼’
[편집자 주] 본보는 ‘2026 윈 미디어 프로젝트’를 통해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틀을 닦은 1세대 개척자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이번 순서에서는 시카고 최초의 한인 소아과 개원의로 45년간 지역사회의 건강을 지켜온 김부웅 박사의 발자취를 조명한다. 현역 시절 24시간 응급 전화를 단 한 번도 끄지 않았던 그는, 은퇴 후에도 국경을 넘어 중남미 오지에서 의료 선교를 이어가고 있다. 시카고 한인 이민사의 산증인인 그의 삶을 따라가 본다.
“원장님, 아기가 많이 아파요.” 밤낮 없이 울려 퍼지던 다급한 응급 전화. 45년 동안 단 한 번도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은 의사가 있다.
언어 장벽 앞에 선 이민자들에게 타국의 병원은 높은 벽과도 같았다. 아픈 아이를 안고 밤새 발을 동동 구르던 부모에게 김부웅 박사는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다. 1975년 시카고 최초의 한인 소아과를 개원한 그는 퇴근 후에도 집 안방에 응급 전화를 연결해 뒀다. 새벽 3시,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건 초보 부모에게 “괜찮으니 안심하라”는 한마디를 건네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수많은 아이들의 곁을 지켜온 김 박사의 여정은 1940년 대구에서 시작됐다. 일본에서 양복 재단 기술을 익히고 돌아온 아버지와 생활력 강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집안의 셋째 아들이었다. 해방과 전쟁 전후의 혼란기 속에서도 성실하게 가업을 이어온 부모의 삶은 어린 김부웅에게 훗날 인생을 지탱할 밑바탕이 됐다.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그는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고, 그 삶에는 늘 신앙이 함께했다. 14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앙생활은 그의 삶을 바로 세우는 전환점이 됐다. 김 박사는 “신앙을 깊이 받아들이면서 공부를 대하는 태도와 삶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며 “그때부터 인생의 방향이 잡히기 시작했고, 진로에 대한 확신도 점점 또렷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경북의대에 진학하며 사람을 살리는 길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 등록금이라는 현실의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전쟁의 상흔이 짙게 남아 있던 1950년대 후반, 장학금 제도조차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의대 학비는 일반 가정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에게 의대 대신 사범대 진학을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꿈을 포기해야 할 순간, 그를 붙잡아준 것은 어머니였다. 김 박사는 “어머니께서 자식의 꿈이 꺾이지 않도록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첫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 주셨다”며 “그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경북의대 입학 후에도 고비는 계속됐다. 6년이라는 긴 학업 과정을 이어갈 학비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길을 물었고, 기적 같은 반전이 찾아왔다. 아버지의 양복점이 인근 중고등학교의 교복 제작권을 독점 수주하게 된 것이다.
그날 이후 집안에는 밤낮을 잊은 재봉틀 소리가 가득 찼다. 쉼 없이 돌아가는 바늘땀은 아들의 등록금이 됐고, 아버지는 자식의 미래를 묵묵히 기워 나갔다. 김 박사는 “그때 정말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시간을 ‘예비된 은혜’라고 표현했다.
이어 그는 “내가 잘나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님의 희생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열어준 길을 걸어왔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제대 다음 날 미국행
경북의대를 졸업한 김부웅 원장은 3년 동안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대다수에게는 고된 기억으로 남는 군 생활이지만, 그에게 이 시기는 “인생에서 가장 평안했던 준비의 시간”이었다. 김 원장은 “가던 곳마다 상관들이 아들처럼 아끼며 배려해 주셨다”며 “엄격했던 아버지에게서 다 받지 못한 사랑을 군대에서 채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에게 군의관 시절은 단순한 복무 기간을 넘어, 앞으로의 길을 준비하고 다져간 시간이었다.
준비는 곧 결단으로 이어졌다. 당시 외국인 의사들에게 미국 병원 수련 기회를 제공하던 프로그램을 통해, 그는 1968년 6월 30일 제대한 다음 날인 7월 1일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김 원장은 “미국 병원 수련 일정에 맞추기 위해 돌아볼 여유도, 망설일 시간도 없이 태평양을 건넜다”고 전했다.
첫 정착지인 뉴욕 링컨 병원에서의 생활은 상상을 초월하는 강행군이었다. 당시 의료 인력이 부족했던 미국에서는 인턴과 레지던트가 병원에 상주하며 강도 높은 근무를 이어갔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꼬박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오후가 돼서야 퇴근하는 고된 일정이 반복됐다.
김 원장은 “피를 뽑는 일부터 응급 환자 대응까지 모든 것을 직접 도맡아야 했다”며 “낯선 환경에서 체력적·정신적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건장한 미국인 동료들조차 코피를 쏟을 만큼 치열한 현장이었다”며 “너무 힘들어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싶어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계를 넘나드는 고된 수련 속에서도 그를 버티게 한 동력은 가장 작고 연약한 ‘아이들’이었다. 당초 내과를 선택할 생각이었던 그의 마음을 바꾼 것은 소아과 병동의 풍경이었다. 고통 속에 울던 아이들이 치료를 받고 웃음을 되찾아 퇴원하는 모습에서 그는 확신을 얻었다. 김 원장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내게 가장 큰 보람과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그렇게 소아과를 평생의 소명으로 선택했다.
▲ 1975년, 시카고 최초 한인 소아과 개원
뉴욕에서 레지던트와 소아과 펠로우십을 마친 김 박사는 학문적 깊이를 더하기 위해 시카고로 향했다. 1973년 일리노이대(UIC)에서 소아심장 전공 과정을 밟으며 전문성을 한층 넓혔다. 이는 복잡한 심장 질환까지 아우를 수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 무렵,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시카고 한인사회였다. 이민자 수는 늘어나고 있었지만 정작 아이들이 아플 때 한국어로 상담하고 진료받을 수 있는 소아과 의사는 없었고, 그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한인사회로 향했다.
김 원장은 “당시엔 소아과 의사 자체가 귀했고, 부모들은 아이가 아파도 언어 장벽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기 일쑤였다”며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할 소명이 무엇인지 점점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마침내 1975년 7월, 그는 결심을 실행에 옮겨 시카고 한인사회 최초의 소아청소년과를 개원했다. 이는 한 개인의 개업을 넘어, 시카고 한인사회가 ‘우리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의사’를 처음으로 갖게 된 순간이었다. 동시에 한인 의료의 새로운 출발점이 됐다.
시작은 녹록지 않았다. 개업 초기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환자가 많지 않았지만, 진정성 있는 진료가 입소문을 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산부인과 의사들이 신생아 환자를 김 박사에게 보내기 시작하면서 신뢰의 고리가 형성됐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타국에서 아이의 질병 앞에 막막해하던 한인 부모들에게 그는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 24시간 꺼지지 않던 응급전화… ‘안심’을 건네던 의사
김 박사의 진료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개업 이후 단 한 번도 병원 전화를 끄지 않았다는 점이다. 퇴근 후에도 응급 전화를 집으로 연결해 직접 받았고,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전화벨이 울리면 지체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미국 의료 시스템에서는 응급 상황일 경우 응급실로 안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는 부모의 상황을 먼저 살폈다. 부모의 불안을 덜어주는 것 또한 의사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초보 부모들에게 밤사이 아이의 열이 오르는 건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라며 “병원에 당장 가야 할지, 아침까지 기다려도 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를 때 ‘괜찮으니 해열제를 먹이고 내일 오라’고 한마디 건네면 부모들은 비로소 안심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 안도감을 주는 것 역시 의사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40년 넘게 24시간 대기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 6일 근무 속에서도 그는 밤잠을 포기하며 환자들의 불안을 함께 나눴다. 한인들이 서버브로 이주하기 시작하자 그는 나일스(Niles)와 파크리지(Park Ridge)에 오피스를 열어 환자들을 찾아갔다.
그는 “당시 멀리서 찾아오는 부모들이 많았는데, 10시간 넘게 운전해 오는 경우도 있었다”며 “그럴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고, 더 꼼꼼하게 진찰하게 됐다”고 전했다.
▲ 스페인어를 독학한 의사, 언어 너머의 마음을 읽다
김 박사의 진료실에는 한인뿐 아니라 히스패닉 환자들도 많았다. 당시 시카고의 히스패닉 커뮤니티 역시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저녁마다 스페인어 학교를 다니며 직접 언어를 배웠다.
그는 “언어가 달라도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눈빛은 전 세계 어디나 똑같다”며 “스페인어로 ‘아무 일 없을 것이다(No hay problema)’라는 한마디에 안도하며 눈물을 맺는 부모들을 보며, 소통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교감의 시간은 그가 81세까지 현역으로 진료를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그는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갓난아기 때 진료했던 아이가 성인이 되어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찾아올 때”라며 “‘선생님, 저 기억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순간, 그 세대의 흐름 속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이어 “의사는 단순히 병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한 가족의 시간을 함께하는 동반자”라고 덧붙였다.
당시 배운 스페인어는 훗날 중남미 선교지에서 원주민들의 마음을 여는 강력한 도구가 됐다. 그는 “하나님은 이미 1970년대 진료실에서부터 저의 노년기와 선교를 예비하고 계셨던 셈”이라고 고백했다.
▲땅끝까지 이르는 영원한 진료
김 박사는 81세가 되던 2019년 12월, 45년의 진료를 마치고 은퇴했다. 긴 시간 동안 주 6일 근무를 이어오며 단 하루도 진료를 쉬지 않았다는 점은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그는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주신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은퇴는 마침표가 아닌 진료의 확장이었다. 그는 2009년 설립된 ‘갈릴리 선교회’의 초대 이사장으로서 인생의 후반전을 중남미 선교에 바치고 있다. 1978년 첫 선교지 방문 이후 이어온 발걸음은 은퇴 후 더 본격화됐다.
김 박사는 “병원 문은 닫았지만 의사로서의 소명은 끝나지 않았다”며 “이제야 진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갈 시간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의 발걸음은 도미니카공화국, 볼리비아, 멕시코의 오지로 향하고 있다. 과거 스페인어 학교에서 배운 언어는 이제 원주민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약을 나누는 ‘사랑의 언어’가 됐다.
▲ AI 시대, 후배 의사들에게 전하는 ‘마음의 처방전’
이처럼 평생 ‘사람을 향한 진료’를 이어온 그의 시선은, 빠르게 변화하는 의료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본질을 향하고 있었다.
인터뷰 말미, 대화의 주제는 인공지능(AI)과 의료 기술의 변화로 옮겨갔다. 1960년대 수동 청진기와 타자기로 진료를 시작했던 그에게 오늘날의 변화는 낯설 법도 했지만, 김 박사의 통찰은 분명했다.
그는 “AI가 사진을 판독하고 로봇이 수술하는 시대가 오고 있지만,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며 “환자의 눈을 맞추고 떨리는 손을 잡아주는 진심, 그리고 아이의 울음 뒤에 숨겨진 부모의 불안까지 살피는 것이 의사의 본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기술이 발전할수록 의사는 더욱 인간적이어야 하며, 데이터보다 뜨거운 심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인 2, 3세 의사들에게 한국어와 한국적 정서를 지킬 것을 당부했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한국어를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필요한 이유는 언어가 곧 ‘치유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환자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며 “가장 두렵고 힘든 순간, 모국어로 건네는 따뜻한 한마디는 어떤 첨단 장비보다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은퇴는 소명의 확장
그의 헌신적인 삶 뒤에는 평생을 묵묵히 뒷바라지해 온 아내 김명옥 씨의 지극한 내조가 있었다. 교회에서 만나 미국 정착기부터 45년 개업의 생활까지, 아내는 늘 남편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였다. 주 6일 진료와 24시간 응급 전화 대기라는 고된 일상에서도 가정을 단단하게 지켜낸 아내의 헌신은 김 박사를 버티게 한 가장 큰 힘이었다.
그 밑거름 위에서 자란 네 자녀는 부모의 삶을 이어받아 가족의 신앙 유산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다. 목사, 교사, 선교사, 그리고 의료인으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올해로 85세. 김 박사의 얼굴에는 여전히 청년 같은 생기가 감돈다. 그는 “특별한 비결은 없다”며 “아직 나눌 것이 남아있다는 기쁨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며 웃으며 말했다. 그에게 은퇴는 마침표가 아니었다. 진료실을 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이어지는 ‘소명의 확장‘이다.
김 박사는 자신의 삶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은혜’라고 고백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날까지 나는 영원한 현역”이라며 “이번 여름에도 멕시코 선교지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만나러 떠날 것”이라고 미소 지었다.
24시간 켜져 있던 그의 응급 전화는 멈췄지만, 생명을 향한 소명에는 은퇴가 없었다. 시카고 한인사의 기틀을 닦은 그의 발걸음은 세대를 잇고 국경을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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