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축복을 다시 나누는 삶’
식품 연구로 일군 스웨거 푸드, 글로벌 기업의 파트너로 성장
위암 투병이 남긴 사명, 영양과 치유를 생각하다
아내와 함께 품은 믿음, 장학금과 인류애상으로 이어져
태-신 재단 통해 교육·연구·인류상으로 이어져
[편집자주] 본지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틀을 다진 1세대 한인들의 삶을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열세 번째 인물은 스웨거 푸드 창업자이자 식품과학자, 그리고 나눔의 실천가인 신태량 대표다. 그는 낯선 이민의 땅에서 식품 전문 기업을 일구고, 교육과 연구, 인류애의 가치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에 힘써왔다. 받은 축복을 다음 세대와 사회에 돌려주고 있는 그의 여정을 따라가 본다.
신태량 대표의 삶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상실을 이겨낸 의지’다. 1942년 경남 마산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부모의 깊은 사랑 속에 자랐다. 그는 “공직자였던 아버지는 막내아들에게 늘 우유를 챙겨주시고 씨름을 가르쳐 주셨다”며 “어머니는 ‘보기만 해도 아까운 내 막둥이’라며 따뜻하게 품어주셨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품 안에서 누리던 그 따스한 평화는 1950년 한국전쟁의 포성 속에 힘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전쟁 중 아버지를 여의게 되면서 가족의 운명은 급변했다. 이미 가정을 꾸린 첫째 형은 마산에 남았고, 남은 가족은 부산으로 향했다. 기둥 잃은 집안의 막내에게 세상은 차가웠지만, 그 곁에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준 열다섯 살 위의 둘째 형이 있었다.
둘째 형은 남은 가족을 이끄는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신 회장은 “둘째 형님은 아버지를 대신해 때로는 엄격하게 훈육하셨지만, 내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늘 제시해 주셨다”고 말했다. 그 시절 그는 “내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자립심을 배웠다.
일찍 철이 든 소년은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부산의 어두운 터널 길을 매일 걸어 다녔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그가 산 것은 헌책방의 수학책이었다. 잠을 쫓으려 카페인 알약까지 먹어가며 책장을 넘기던 소년에게 배움은 유일한 열쇠였다. 신 대표는 “그때의 변화는 제힘만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 부르심 같았다”고 고백했다. 누구의 권유도 없이 스스로 성당을 찾아 ‘파스칼’이라는 세례명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 조선공학도에서 식품과학자로 ‘터닝포인트’
신 회장의 삶에서 1960년대 초반은 인생의 항로가 결정된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애초 조선공학자의 꿈을 품고 부산수산대학교 조선학과에 입학했다. 해군식 군사훈련을 받으며 공부하던 그는 1963년 학과가 부산대학교 공과대학과 통합되는 변화를 맞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진로를 다시 고민하게 됐다.
선택의 기로에 서 있던 신 대표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이는 당시 부산수산대학의 정병선 교수였다. 신 대표는 그의 권유로 수산대학에 남아 식품제조과를 선택했고, 훗날 이 결정은 평생의 길이 됐다. MIT에서 수학한 정 교수는 학문적으로 엄격하면서도 인간적으로는 따뜻한 스승이었다. 그는 “정 교수님을 통해 열린 시각과 미국식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배웠다”며 “돌아보면 제 인생의 방향을 바꾼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회상했다.
대학 졸업 후 신 회장은 한국화약 그룹의 골든벨상사 물산부에서 4년간 근무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고, 이후 롯데식품공업(현 농심)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생산과장직을 맡아 현장 제조와 품질 관리의 핵심을 파고들며 식품 전문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안정적인 기반을 닦아가던 1971년, 신태량 대표는 존경하던 정명선 교수의 부인 조희성 숙명여대 교수의 소개로 신유현 여사를 만났다. 신뢰하는 스승 부부가 맺어준 인연이었다.
숙명여대 약학과를 나온 신 여사는 약사공론 기자로도 활동한 지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그해 결혼해 함께 인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부부의 삶에 큰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1973년이었다. 당초 신 대표는 일본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당시 의료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미국 이민의 길이 열리면서 약사였던 아내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낯선 땅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부부는 서로를 믿고 더 큰 도전을 선택했다.
1973년 3월, 두 사람은 500달러를 손에 쥐고 시카고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뒤로한 채, 믿을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새 삶을 향한 의지뿐이었다. 그렇게 신태량·신유현 부부의 미국 이민사는 시카고의 차가운 봄바람 속에서 조용히 시작됐다.
◇ 아파트 부엌의 작은 실험실
시카고에 도착한 부부의 첫 정착지는 전자게임 조립 공장이었다. 두 사람은 약 두 달 동안 팩맨 게임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신 대표는 망치로 못을 박고, 아내 신 여사는 전선을 자르며 낯선 땅에서의 첫 생활을 시작했다. 신 대표는 “쉬는 시간에 판타 한 병을 사서 아내와 나눠 마시던 그 짧은 시간이 하루의 전부처럼 달콤했다”고 회상했다. 차가 없던 시절, 아내가 탄 버스를 자전거로 따라가며 출퇴근하던 길도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이민 초기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시카고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영어는 쉽게 들리지 않았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신 대표는 자전거 핸들에 두꺼운 사전을 끈으로 묶고 다녔다. 그는 “길을 가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자전거를 세우고 사전을 찾았다“며 “그 단어를 외울 때까지 다음 길을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새출발을 해야 한다는 현실은 더 무겁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그의 머릿속은 식품 연구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기회는 식품 전문 기업 ‘B. Heller & Co.’에 케미스트로 입사하며 찾아왔다. 제품 성분 분석과 소재 개발을 담당하며 그는 미국 기업 특유의 문화와 업무 기준을 몸소 배웠다. 미국식 시스템을 익히며 자신감이 붙은 그는 1978년, 마침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결심으로 창업의 길에 들어섰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작은 아파트가 그의 연구실이 됐다. 첫 연구 과제는 ‘뜨거운 물에서 덩어리지지 않고 바로 풀어지는 인스턴트 수프 배합’이었다.
부엌에서 밤샘 실험을 이어가던 시절, 아내 신유현 여사는 묵묵히 곁을 지키며 가장 든든한 연구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아파트 이웃들에게 샘플을 맛보게 하며 다듬어온 그 배합 기술은 훗날 글로벌 식품 기업 ‘스웨거 푸드(Swagger food)’를 탄생시킨 모태가 됐다.
◇ 사업은 ‘신뢰’를 쌓는 일
기회는 첫 주문에서 찾아왔다. 여러 회사에 샘플을 보내며 문을 두드린 끝에 신 대표는 쥬얼 티 컴퍼니(Jewel Tea Company)로부터 약 5만 달러 규모의 첫 주문을 받았다. 작은 아파트 부엌에서 시작한 연구가 실제 사업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신 대표는 “그 주문이 본격적으로 회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고 회상했다.
1978년, 신 대표는 알링턴하이츠의 150스퀘어피트 남짓한 작은 공간을 임대해 스웨거 푸드(Swagger Foods)의 첫발을 내디뎠다. 창업 초기의 현실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자금은 늘 부족했고, 은행 이자는 20%를 넘나들었다. 작은 회사가 버티기에는 혹독한 환경이었다. 원료를 구하고, 제품을 만들고, 납기를 맞추고, 대출을 갚는 모든 과정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지키려 한 것은 하나였다. 바로 ‘신용’이었다.
신 대표는 “사업은 결국 신뢰를 쌓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출 상환을 단 하루도 어기지 않으려 했다. 당장의 형편이 어렵더라도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신용이 무너지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첫 주문이었던 쥬얼 티 컴퍼니 납기일 역시 철저하게 지켰다.
그 원칙은 시간이 지나며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이 됐다. 처음에는 작은 사무실과 작은 주문에서 출발했지만, 꾸준히 쌓인 신뢰는 더 큰 거래로 이어졌다. 아파트 부엌에서 연구하던 수프는 점차 공장 생산라인으로 옮겨갔고, 회사는 훗날 4만 스퀘어피트가 넘는 버논힐스의 자체 대형 공장으로 성장했다. 제품도 인스턴트 수프에서 시즈닝, 스터핑 믹스, 팝콘과 바비큐 관련 조미 제품 등으로 넓어졌다.
스웨거 푸드는 이후 맞춤형 블렌딩과 자체 연구개발, 품질관리 체계를 갖춘 식품 전문 기업으로 성장했다. 신제품 배합과 제품 개선, 위생·안전 관리 기준을 지키며 크래프트와 프리토레이 등 글로벌 식품 기업들과도 거래를 이어갔다. 그러나 신 대표는 회사의 성장을 규모나 매출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돌이켜보면 회사를 키운 것은 결국 신뢰였다”고 말했다. 좋은 배합 기술과 제품력도 중요했지만, 그 바탕에는 약속을 지키는 태도와 성실함이 있었다.
◇ 멈추지 않는 평생 프로젝트 ‘배움’
사업이 자리를 잡은 뒤에도 신태량 대표는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1974년 일리노이대 어바나-샴페인에서 식품과학을 공부해 1977년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사업 현장에 뛰어든 뒤에도 학문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았다.
58세가 되던 해 그는 다시 박사 과정에 도전했다. 회사를 운영하며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물리화학과 식품 콜로이드 현상 과목은 처음 30여 명이 수강했지만, 마지막까지 통과한 학생이 3명에 불과할 정도로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2008년 65세의 나이에 식품과학 및 영양학 분야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을 마칠 무렵, “이미 성공한 사업체도 있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공부를 계속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그는 “저에게 배움은 평생 프로젝트”라고 답했다.
◇ 투병이 남긴 사명 “음식은 곧 생명이다”
그런 신 대표의 인생에 또 한 번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70대 초반, 그는 위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통해 위의 상당 부분을 절제해야 했고, 힘든 회복 과정을 겪었다. 평생 식품을 연구해온 그였지만, 환자의 자리에서 음식을 바라보는 일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투병의 시간은 그에게 음식과 영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무엇을 먹는가, 몸이 약해진 사람에게 어떤 음식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이 절실해졌다. 그는 “음식은 사람의 건강과 삶에 직접 닿아 있다”며 “식품을 만드는 사람은 그것이 사람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암 투병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식품과학자로서의 사명을 더 분명하게 해준 계기이기도 했다. 그는 이후 건강 회복과 영양, 질병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식품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 관심은 개인의 연구와 사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식품과학자로서 쌓아온 지식, 이민자로서 일군 사업, 그리고 투병을 통해 깨달은 생명의 가치는 자연스럽게 나눔으로 이어졌다.
◇ 공동체와 인류애를 위한 기부
신태량·신유현 부부의 나눔은 한인 사회를 넘어 주류 사회와 더 넓은 세상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그동안 받은 축복을 다시 나누고, 교육과 연구, 인류애의 가치를 다음 세대로 이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태-신 재단(Tai Shin Foundation)을 세웠다.
그 중심에는 “받은 것은 다시 나눈다”는 부부의 오랜 믿음이 있었다. 신 대표는 “거창한 계획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며 “미래 세대가 더 큰 꿈을 품고 성장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뜻은 차세대 과학기술 인재를 지원하는 활동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나눔의 폭은 교육과 인류애의 영역으로 더욱 확장됐다. 2022년에는 모교인 일리노이대 어바나-샴페인(UIUC)에 200만 달러를 기부해 ‘신 휴머니테리언 어워드(Shin Humanitarian Award, 인류애 상)’를 제정했다. 이 상은 단순히 학문적 성취가 뛰어난 인물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정의와 인권,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찾아 격려하는 상이다.
신 대표에게 이 상은 성공의 결과물이 아니라, 자신과 아내가 평생 품어온 가치의 연장선에 있다. 부부가 함께 걸어온 이민자의 삶, 사업을 통해 얻은 배움, 그리고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 교육과 연구, 인류애를 지원하는 형태로 이어진 것이다.
신 대표는 “내가 받은 것은 잠시 맡겨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그것을 통해 누군가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그것이 나눔의 이유”라고 말했다.
그의 관심은 식품과학과 건강,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일로도 이어지고 있다. 위암 투병을 겪은 그는 음식과 영양이 환자의 회복에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깨달았다. 현재 그는 일리노이대 시스템(UIUC·UIC·UIS)이 함께 추진하는 암 연구·치료 연계 암센터 프로젝트에도 디렉터로 참여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
그에게 암은 단순한 연구나 지원의 대상이 아니었다. 위암 투병을 겪은 환자로서, 또 사랑하는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낸 남편으로서 암은 그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 아픔이었다. 그래서 그는 암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두려움과 절박함을 누구보다 가까이 이해한다.
그 긴 고통의 시간을 지나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데에는 늘 한 사람이 있었다. 병상에서, 사업의 고비에서, 낯선 이민자의 삶 한가운데에서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켜준 아내 신유현 여사였다.
◇ 아내의 이름으로 새긴 사랑
신태량 대표에게 아내 신유현 여사는 인생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였다. 이민 초기의 고단함과 사업의 위기, 투병의 시간까지 함께 견디며 그의 곁을 지켜준 사람이었다.
신 여사가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깊은 상실의 시간을 보내며 아내를 어떻게 기억하고 그 뜻을 이어갈 것인지 고민했다. 그 마음은 아내의 모교인 숙명여대 약학대학에 ‘안유현 강의실’을 헌정하는 일로 이어졌다. 강의실 현판에는 결혼 첫날 아내가 건넨 카드 문구 “To You with Love.”가 새겨졌다.
신 대표는 그 카드를 50년 넘게 지갑에 넣고 다녔다. 이민의 고비마다, 사업이 흔들릴 때마다, 병상에서 다시 삶을 붙잡아야 했던 순간마다 그 짧은 문장은 그에게 힘이 됐다.
그는 “아내의 사랑이 있었기에 고비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내의 또 다른 모교인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 보수공사에도 힘을 보탠 것 역시 아내가 품었던 사랑과 나눔의 마음을 다음 세대에 이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두 딸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두 딸은 아버지의 곁에서 사업과 나눔의 뜻을 이해하며, 그가 걸어온 길을 조용히 지지하는 든든한 가족의 울타리가 되고 있다.
신 대표에게 아내를 기억하는 일은 과거에 머무는 슬픔이 아니다. 함께 품었던 사랑과 가치를 오늘의 나눔으로 이어가는 일이다. 그가 아내의 이름으로 남긴 강의실과 기부의 발자취에는 한 사람을 향한 깊은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세상에 다시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함께 담겨 있다.
◇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길…”
반세기가 넘는 이민과 개척의 시간을 돌아보며 신태량 대표가 후배들에게 가장 강조한 것은 성실과 신용, 그리고 책임감이었다.
신 대표는 “빠른 성공보다 한 걸음씩 성실하게 쌓아가는 과정이 결국 사람을 세우는 힘이라고 믿는다“며 “젊은 세대가 계속 배우고, 자기 일에 책임을 지며, 받은 것을 다시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성공은 더 많이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어떻게 쓰고 나누느냐에 달려 있다.
훗날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큰 기업가나 박사로 기억되기보다,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던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의 삶은 한 사람의 성공담을 넘어,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길을 남긴 이민 1세대의 기록이다. 받은 사랑의 삶을, 다시 사랑으로 돌려주는 것. 그것이 신태량 대표가 걸어온 길이며, 앞으로도 이어가고 싶은 그의 남은 숙제다. 그리고 그 길 위에는 여전히 아내에게서 받은 한 문장이 조용히 빛나고 있다.
“To You with Love.”
<윤연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