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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March 2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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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3] 이차희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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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희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사무총장

75년의 기다림과 25년의 사투… 재미이산가족의 길을 열다

시카고 최초 한인 여성 도서관장에서 워싱턴까지…
▶암 투병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상봉 여정

[편집자 주] 한반도의 허리가 잘린 지 70년이 넘었다. 긴 세월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이산가족들의 한(恨)은 미국 땅에도 깊게 뿌리내려 있다. 본지는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세 번째 인물로 이차희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사무총장을 만났다.
시카고 최초 한인 여성 공립도서관장인 그는 실력 하나로 1970~80년대 미국 주류 사회의 인종·성별 장벽(유리천장)을 깬 행정 전문가다. 또한 25년 이상 워싱턴 정가를 누비며 이산가족 상봉을 보편적 인권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본지는 그의 삶을 통해 현대사의 아픔을 되새기고, 그가 일궈온 헌신의 의미를 짚어본다.

이차희 사무총장이 2019년 국회 청문회에 참석해 재미 이산가족 상봉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곧 고향에서 만나자”는 약속, 75년의 기다림

이차희 사무총장은 1940년 당시 독립군 유격대의 은거지였던 만주 다푸차허라는 첩첩산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광활한 만주 벌판에서 시작된다. 일제강점기, 그의 아버지는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이자 뛰어난 기술자였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아버지는 당시 선진 기술이었던 정장 재단 기술을 익혔고,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대규모 양복점을 운영하며 자수성가했다.

그 후 만주 일대에 거대한 땅을 사들인 아버지는 장정 120여 명과 함께 황야를 농지로 개척했다. 이들은 낮에는 들에서 일하고, 밤에는 당시 흔했던 마적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무장했다. 이차희 사무총장은 “돈화 지역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독립군 유격대에 비밀리에 음식과 무기를 공급했으며, 그중에는 아버지의 막내동생도 포함돼 있었다”며 “훗날 한반도의 역사를 바꾼 인물들도 그 대열에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은 민족에게는 기쁨이었지만, 가족에게는 가혹한 이별의 시작이었다.

해방 이후 만주는 이념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중국 공산화로 토지와 재산이 국유화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다.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먼저 고향인 대구로 피신시킨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우리도 곧 대구로 내려가마.” 아버지는 넷째 아들 웅희 씨와 함께 남은 사업을 정리한 뒤 뒤따라가겠다고 약속하며 가족을 ‘남행(南行)’ 열차에 태웠다. 그러나 어머니와 6남매가 만주를 떠난 직후, 만주와 한반도의 국경이 닫혔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 웅희 씨는 만주에 갇히게 됐고, 고향에서 만나자는 그 약속은 75년이 넘도록 지켜지지 못했다.

해방 전 부모님과 큰 오빠의 모습.

1949년 만주에서는 샤평전쟁이라는 마지막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중국 정부는 아버지에게 군대를 맡겨 전쟁 진압을 요청했고, 그는 이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공로로 아버지는 북한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1949년 말 웅희 씨와 함께 북한으로 향했다. 고향인 대구로 가기 위한 길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은 가족에게 잔인한 상처를 남겼다. 대구로 내려왔던 오빠 중 한 명은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꽃다운 나이에 전사했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 사무총장은 차마 믿기 힘든 사실을 알게 됐다. 만주에 남았던 오빠 웅희 씨가 북한군으로 징집돼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전쟁의 광기 속에서 형제는 서로의 생사도 모른 채 남과 북의 군복을 입고 총을 겨눠야 했다. 한 명은 전사자로, 한 명은 적군으로 갈라진 이 잔혹한 운명은 그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천리마 할아버지’의 처절한 신호

어린 차희에게 아버지는 ‘나를 버린 사람’이었다. 대구로 내려온 가족은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힘겨운 시간을 견뎌야 했다.

“왜 아버지는 우리를 찾지 않았을까.” 사춘기 소녀의 가슴에는 그리움보다 깊은 원망이 쌓여갔다. 이 감정은 성인이 된 뒤 미국에 정착한 이후에도 문득문득 삶을 흔드는 슬픔의 근원으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를 향한 원망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1988년이었다. 남편이 여름방학 동안 중국 지린공과대학으로부터 영어과 교수 대상 강의를 맡아달라 초청받았다. 이를 계기로 이 사무총장은 40여 년 만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만주를 다시 찾게 됐다. 기차로 16시간을 달려 도착한 그곳에서 그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던 진실과 마주했다.

1992년에 시카고 감리교 목사였던 조카가 평양을 방문해 오빠 웅희 씨(가운데)와 그의 아들을 만났다.

아버지가 가족을 남쪽으로 보낸 선택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공산화되는 만주의 위험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이 사무총장은 “아버지는 1974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만주 방문을 통해 아버지의 삶을 확인한 순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과 마주했다”고 밝혔다. 아버지는 가족을 버린 것이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했던 것이었다.

40년간 품어온 원망은 깊은 참회로 바뀌었다. 대구에서 미국으로, 다시 만주로 이어진 여정 속에서 그는 비로소 아버지를 용서했고, 오랜 죄책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1992년, 시카고 감리교 목사였던 조카가 북한을 방문해 오빠 웅희 씨와 그의 아들을 만나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소식도 전해 들었다. 아버지는 북한으로 넘어간 뒤에도 남쪽에 있는 가족에게 자신의 생존을 알리기 위해 애써왔다.

북한에서 ‘천리마 할아버지’로 불린 아버지의 마라톤 모습. 오른쪽 사진은 제이슨 안이 북한으로부터 확보해 전달한 아버지 관련 영화 CD 자료.

북한 정권은 85세까지 마라톤을 완주한 아버지를 ‘천리마 할아버지’로 부르며 영웅으로 선전했고, 그의 삶을 다룬 영화까지 제작했다. 영화 출연은 검열이 엄격한 북한 체제에서 남한에 있는 가족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는 여전히 북에 남겨진 오빠 웅희 씨와, 자신과 같은 수많은 이산가족의 얼굴이 떠올랐다. 개인의 아픔이 공동의 과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생존을 알리기 위해 달렸던 ‘마라톤 정신’을 이어가야겠다는 결심은 이때 더욱 또렷해졌다. 그 결심의 뿌리는 이미 오래전, 그가 미국 땅을 밟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3년 11월, 본사 사옥에서 인터뷰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남편 스탠필드 씨, 이차희 사무총장, 줄리 터너 전 북한인권 대사, 김선금 회장, WIN Media 김왕기 회장 부부

▲새로운 기회의 땅, 미국

1960~70년대 대한민국은 역동적이었지만, 기회의 폭은 제한적이었다. 더 넓은 세계에서 학문의 길을 걷고자 했던 청년들에게 미국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차희 사무총장 역시 그러했다.

경북여고와 계명 기독교대학을 거쳐 숙명여대를 졸업한 그는 약 3년간 입양아를 돕는 번역사로 일했다. 이후 1968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인디애나대학교에서 신문학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유학 생활은 곧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당시 많은 유학생이 겪었던 것처럼 한미 간 환율 격차는 컸고, 한국에서 가져온 돈으로는 한 학기 등록금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방학이 되면 그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가 많은 뉴욕으로 건너가 일을 해야 했다.

이 사무총장은 “이미 콜롬비아대학교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아 동부로 학교를 옮길 계획이었지만, 다시 인디애나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를 붙잡은 것은 인디애나에서 만난 운명의 인연, 남편 스탠필드 씨였다. 인디애나의 한 교회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맺은 스탠필드 씨는 가까이에서 학업을 이어가길 바랐고, 그의 진심 어린 설득에 이 사무총장의 마음이 움직였다. 결국 그는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중서부로 발길을 돌렸다.

인터뷰 당일, 폭설이 쏟아지는 날씨에도 백발이 성성한 스탠필드 씨는 직접 운전대를 잡고 이 사무총장과 함께 본보를 찾았다. 유학 시절 그를 중서부로 다시 이끌었던 그 손길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남편 스탠필드 씨는 여전히 이산가족 운동의 험난한 길을 함께하는 가장 든든한 동반자다.

남편의 설득으로 중서부에 남게 된 이 사무총장은 학업을 이어갔고, 퍼듀대학교에서 도서관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이후 1974년 시카고로 이주해 로자리대학교(현 Dominican University)에서 도서관학 대학원 과정을 마치며 전문성을 쌓았다.

2007년 인터네셔널 뉴스 컨퍼런스에서 이차희 사무총장이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시카고 최초 한인 여성 도서관장, 유리천장을 깨다

1970~80년대에는 아시아계 여성이 공립도서관이나 공공기관의 관리직에 오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시카고 공립도서관의 시험 제도를 통해 단 3년의 경력으로 10년 이상 경력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베자지언(Bezazian) 도서관 관장으로 발탁됐다. 언어와 전문성을 갖춘 수많은 경쟁자 속에서 이뤄낸 결과였다. 이 일을 계기로 시카고 도서관에서는 진급 시험 제도가 사라질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약 8년간 재직하며 아시아 자료 컬렉션을 구축했고, 1989년에는 도서관인으로서는 최초로 시카고 시의회 표창(Mayor’s City Resolution)을 받았다.

이후 1989년 4월, 알바니 파크(Albany Park) 도서관 관장으로 부임했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의 중심지였던 이곳에서 그는 단순한 도서 대출 기능을 넘어 지역 사회의 문화적 허브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는 시카고 공립도서관 내 ‘한국 도서실’을 정식으로 설치한 것이다. 그는 주정부로부터 14만 달러 이상의 예산을 확보하고 수만 권의 한글 서적을 마련해 비치했다. 이는 미주 한인 이민사에서 공공 도서관을 통해 한인 정체성을 지켜낸 상징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시의원들을 직접 만나 예산을 확보하고 지역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했다. 이때 쌓은 행정 경험은 훗날 미 연방 의회를 상대로 이산가족 상봉 법안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이 사무총장이 2015년 10월 30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국회세미나에 참석했다.

한인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던 알바니 파크 도서관에서 그는 어느 순간부터 한인 어르신들의 눈물을 마주하게 됐다. 도서관을 찾은 1세대 한인들은 그의 손을 붙잡고 가슴속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관장님, 나 죽기 전에 북에 있는 가족 얼굴 한 번만 볼 수 없을까?”, “미국 시민권자가 되면 북에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다는데, 정말 방법이 없겠소?”

휴전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강한 반공 분위기 속에서 이북 출신이라는 배경을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달랐다. 그들은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은 1965년 이민법 개정으로 아시아 이민자들에게 문호를 열었다. 한국에서도 더 넓은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향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에게 미국은 과거를 뒤로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터전이었다.

이 사무총장은 깨달았다. 이들의 눈물은 개인의 슬픔을 넘어, 미국 시민으로서 보호받아야 할 보편적 인권의 문제라는 사실을.

▲마크 커크 의원과의 운명적 만남

2000년 3월, 이 사무총장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당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정치인 마크 커크(Mark Kirk)를 만나게 된다. 이 사무총장은 가방 가득 이산가족들의 사진과 절절한 사연을 담아 그를 찾았다.

이 사무총장은 미국에는 북한에 가족을 둔 10만 명이 넘는 시민권자들이 있지만, 미국 시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가족 상봉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호소했다.

마크 커크 연방하원의원과 함께한 자리에서, 뒤 왼쪽부터 미스 시카고 출신 글로리아, 이차희 사무총장, 하버드 경영대학원 출신 유진 정, 하버드 의과대학 출신 닥터 제이슨 안 등 DFUSA 관계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제이슨 안은 이 사무총장과 함께 재미 이산가족 문제를 알리기 위한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참여했다.

그의 말은 마크 커크의 마음을 움직였다. 커크는 아버지가 한국전 참전용사였고, 한국 입양아 동생과 함께 자란 배경으로 한인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는 당선 직후 의회에서 미주 한인 이산가족 문제를 처음으로 공식 제기했고, 이는 훗날 입법 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이 사무총장은 감정에만 호소하지 않았다. 도서관장으로서 쌓은 데이터 수집 능력과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이산가족 명단 작성’과 워싱턴 대상 로비 활동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산가족에 대한 공식 통계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그는 직접 설문조사를 실시해 2000년대 초 ‘미주 이산가족 10만 명’이라는 수치를 도출했다.

이 사무총장은 “남북한 당국 간 정치적 상봉에만 기대기보다, 미국 정부가 북한과의 외교 협상에서 미주 이산가족 상봉을 주요 의제로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와 워싱턴 D.C.를 오가는 고된 여정이 이어졌지만, 도서관에서 만난 어르신들의 간절한 눈빛이 그를 멈추지 않게 했다.

이 사무총장이 미 국무장관 콜린 파월과 만나 재미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암 투병에서도 멈추지 않은 여정

이차희 사무총장의 지난 25년은 시카고와 워싱턴 D.C.를 잇는 고된 마라톤이었다. 2008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서명을 받아낸 첫 번째 이산가족 상봉 지원 법안, 그리고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의 두 번째 서명으로 그의 노력은 이어졌다. 그는 미 행정부 수장이 바뀔 때마다 이산가족 문제가 잊히지 않도록 의회의 문턱이 닳도록 오갔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대통령의 서명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사건과 북한의 핵실험 등 급변하는 국제 정세는 번번이 상봉의 문턱에서 발걸음을 돌리게 했다.

2017년,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림프종 진단이었다. 6개월간의 항암 치료 중에도 그는 병실에서 이산가족 명단을 정리했다. “내가 여기서 멈추면, 우리 어르신들의 이름은 누가 불러주겠나”라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이차희 사무총장이 2022년 WINTV 제작진과 함께한 모습. WINTV는 3부작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 사무총장과 재미이산가족 문제를 조명했다.

▲개인의 만남보다 ‘모두의 권리’를 위해

이제 이산가족 1세대는 대부분 80~90대의 고령이다. 매년 적지 않은 이들이 가족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이차희 사무총장은 “이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외롭지 않다. 그가 25년간 묵묵히 닦아온 길 위로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의 2세, 3세대 젊은 한인들이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이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아픈 사연을 기록하고, 소셜미디어와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인도주의적 상봉을 호소하고 있다.

이차희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사무총장(사진 오른쪽)이 2025년 9월 16일 영 김 연방하원의원(사진 오른쪽 두번째)을 방문해 이산가족 상봉 법안 통과를 위한 지속적인 협력을 요청했다. 해당 법안은 지난해 12월 미 연방 의회를 통과했다.

이러한 노력은 최근 제도적 성과로 이어졌다. 지난 2025년 12월, 미 연방 의회에서 ‘한국계 미국인 이산가족 등록 법안’이 상·하원을 통과하며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이 사무총장은 “고령의 실향민들에게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인 만큼, 후속 절차가 신속히 진행돼 하루빨리 실제 상봉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걸어온 길은 한 개인의 여정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수많은 이산가족의 이야기다. 그가 뿌린 씨앗은 ‘재미 한인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결실을 향해 이어지고 있다. 이제 그 길 위에는 다음 세대의 발걸음도 함께하고 있다.

그 순간을 향해, 이차희 사무총장의 걸음은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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