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가에서 언론 경영인, 신앙의 원로로…
식당·식품점·부동산·식품유통업 거친 1세대 경영인
미군 모병·한인회관·입양아 행사 등 공동체 섬겨
신앙의 길, 찬양과 선교 봉사로 이어져…
[편집자주] 시카고 한국일보와 WINTV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틀을 다진 1세대 한인들의 삶을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인물은 1968년 미국에 온 뒤 식당과 식품점, 부동산, 식품유통업을 거쳐 1977년 시카고 중앙일보 초대 사장을 맡았던 홍두영 사장이다. 사업과 언론 경영, 공동체 활동, 신앙 봉사를 통해 시카고 한인사회 성장기를 함께 걸어온 그의 발자취를 기록한다.
홍두영 사장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가장 먼저 새벽 어둠 속 서울 흑석동 골목길을 누비던 소년의 모습이 그려진다. 중앙대학교 뒤편,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가파른 고개를 오르내리며 하루 120부의 신문을 배달하던 시절이었다. 낮에는 생활 전선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서 책장을 넘기던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삶이었다. 훗날 그가 태평양을 건너 시카고에서 한글 신문을 찍어내는 언론 경영인이 될 줄은, 그 새벽의 소년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다. 그의 여정은 그렇게 힘겨운 생활의 현장에서 시작됐다.
1942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난 그의 유년기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맞닿아 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던 독립운동가였다. 일본 형사와의 대치로 지명수배가 내려지자 순사들이 집 안팎을 밤낮으로 감시했고, 결국 부친은 한밤중에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 일대로 피신했다.
가족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야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이어진 6·25 전쟁은 그의 가족에 또 한 번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전쟁 당시 그의 형은 참전 후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왔고, 전쟁이 쓸고 간 자리에는 지독한 가난이 남았다. 홍 사장은 가족을 돕기 위해 일찍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전쟁 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학생 때부터 일을 해야 했다”며 “새벽 신문 배달을 하며 남들보다 일찍 삶의 무게를 배웠다”고 회상했다. 이때 온몸으로 마주한 가난과 노동의 경험은 훗날 낯선 미국 땅에서 사업을 일구고 지역사회 활동에 나서는 밑바탕이 됐다.
◇ 여섯 장의 영어 노트와 미국행 준비
홍 사장이 미국행을 준비한 것은 군 제대 후였다. 그는 1963년부터 1966년까지 군 복무를 마친 뒤 더 넓은 기회를 찾아 유학을 결심했다. 대학원 진학이 일반적이던 시절이었지만, 미국 유학파 출신 주중남 박사를 만나며 학부 과정이라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1945년에 미국을 다녀온 주 박사는 대사관 인터뷰, 공항, 우체국 등 실전에서 필요한 생활 표현들을 가르쳐줬다. 홍 사장은 이 핵심 문장들이 담긴 여섯 장 분량의 노트를 통째로 외웠다. 그는 “당시 한국의 영어는 문법 중심이었지만, 주 박사로부터 미국에서 당장 써야 하는 실전 영어 회화를 배웠다”며 “그 덕분에 까다로운 대사관 인터뷰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철저한 준비 끝에 그는 1968년 마침내 미국 땅을 밟았다. 처음에는 캔자스대학교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일자리 기회가 더 많았던 시카고로 방향을 바꿨다.
1960년대 미국의 풍요로운 일상은 한국에서 온 초기 이민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특히 미국 마트의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통조림 자체가 흔하지 않았지만, 미국 마트에는 종류를 알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통조림이 진열돼 있었다. 홍 사장은 “초창기 한인들이 강아지 그림이 그려진 통조림을 소고기 통조림인 줄 알고 샀다가, 나중에 개 사료인 것을 알고 다 함께 한바탕 웃은 에피소드도 있었다”며 “그만큼 미국 생활의 일상도 새롭게 배워가는 과정이었다”고 회상했다.
시카고에 자리를 잡은 그는 루즈벨트대학교에 입학해 회계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실력을 갖추고도 주류 사회의 차별과 승진의 벽에 부딪히는 한인 선배들의 현실을 목격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대학에서 배운 회계학은 훗날 경영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지만, 그는 안정적인 직장 생활보다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사업가의 삶을 선택했다.
◇ 이민 초기 가정을 세운 또 하나의 축
홍 사장의 이민사는 아내 홍양식 여사의 헌신과 떼어놓을 수 없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 약혼한 사이였다. 홍 사장이 1968년 2월 먼저 미국에 왔고, 홍 여사는 같은 해 6월 시카고로 건너와 작은 한인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홍 여사는 한국에서 교육대학을 졸업한 재원이었다. 고국에서 보장된 교직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지만, 남편과 함께하기 위해 미국행을 선택했다. 출국 전에는 이발 기술과 키펀치(초기 컴퓨터 전산 업무) 기술을 배웠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홍 여사는 스탠다드오일(이후 아모코와 BP)에 입사했다. 키펀치 업무로 시작해 실력을 인정받았고, 나중에는 회장 등 고위 임원들의 주식 관리를 맡는 주요 보직까지 올랐다. 그는 이 회사에서 32년간 근무했다. 1960년대 말, 한인 여성이 언어와 문화가 낯선 미국 대기업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장기 근속했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1971년 큰딸이, 1976년에는 아들이 태어나면서 부부는 학업과 생계, 사업 준비를 함께 감당해야 했다. 홍 사장은 이 시절을 회상하며 “아내가 낯선 땅에서 자리를 잡고 가정을 든든하게 지켜줬기에, 내가 여러 사업에 도전할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부부의 사랑으로 자란 큰딸은 시카고대학교를 거쳐 일리노이대에서 약학박사(PharmD) 과정을 마친 뒤 미국 공공보건 분야에서 일하고 있으며, 아들은 일리노이대 어바나-샴페인을 졸업한 뒤 금융 분야로 진출했다. 홍 사장의 초청으로 부모와 형제자매들도 차례로 미국으로 이주했고, 지금은 가족 모임에 50여 명이 모일 만큼 대가족을 이루었다. 홍 사장은 이를 이민 생활 속에서 얻은 큰 감사로 여긴다.
◇ ‘짐스 그릴’에서 북부 서버브까지…
사업가 홍두영의 첫 무대는 식당이었다. 1971년 그는 미국 현지 식당인 ‘짐스 그릴(Jim’s Grill, 현재 조선옥 자리)’을 인수했다. 당시 한인 이민자가 미국인 손님을 상대로 현지 식당을 운영하는 것은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하는 과감한 도전이었다.
약 2년간 식당을 운영한 그는 1973년 초창기 한인식품점인 ‘만나당’을 인수했다. 당시 클락과 벨몬트 일대는 초기 시카고 이민자들의 삶의 터전이자 한인 상권의 심장부였다. 식품점 운영은 좋은 성과를 냈고, 홍 사장은 이를 통해 정착 기반을 다지는 한편 고국의 가족을 돕는 일도 이어갔다. 1973년에는 영주권도 취득했다.
사업은 부동산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32유닛 아파트를 매입하며 자산 규모를 넓혔다. 그의 생활 반경 변화는 한인사회의 이동 역사와도 맞물려 있다. 초기 한인들이 클락과 벨몬트에 모여 살다 로렌스와 피터슨으로 옮겨갈 때, 홍 사장은 이미 다음 흐름을 읽고 있었다. 그는 1976년 북부 노스브룩 인근에 땅을 사고 집을 짓기 시작해 1977년 이사했다.
홍 사장은 “당시 노스브룩에는 한인이 거의 없었고 주변은 온통 옥수수밭이었다“며 “지인들이 왜 멀리 농사지으러 들어가느냐고 농담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에는 앞선 안목이 담겨 있었다. 북부 서버브는 이후 한인들의 주요 생활권으로 자리 잡았다.
◇ 한인 청년 13명 미군 입대 도와…
홍 사장은 사업을 하면서도 주변의 한인 청년들을 살폈다. 1970년대 중반, 미국에 막 도착했지만, 영어와 학비 문제로 진로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홍 사장은 “처음 미국에 온 한인 청년들이 영어도 서툴고 학비도 부족해 어디서부터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에게 ‘미군 입대’라는 선택지를 안내했다. 당시 미군은 안정적인 생활 기반과 교육비 지원 혜택을 제공했기에 이민자 청년들에게는 기회의 발판이 될 수 있었다.
홍 사장은 청년들을 설득하고 모병관과 연결하며 입대를 도왔다. 그의 멘토링을 통해 미군에 입대해 새로운 인생 항로를 찾은 한인 청년은 13명에 달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75년 미군 모병사령관으로부터 공식 감사장을 받았다.
홍 사장은 “감사장보다 그 청년들이 각자의 길을 찾아 미국 사회에 자리 잡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큰 보람이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먼저 알게 된 길을 뒤따라오는 이들에게 기꺼이 열어주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한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이었다.
식품점과 부동산 운영, 그리고 지역사회 활동을 거치며 쌓아 올린 신뢰와 인맥은 홍 사장을 자연스럽게 또 다른 사회적 역할로 이끌었다. 1970년대 후반, 그는 언론 경영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맡게 된다.
◇ 건강한 언론 경쟁 시대
1970년대, 시카고 한인사회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한인 상점과 교회, 단체가 늘면서 이민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한글 매체의 역할도 커지고 있었다. 당시 시카고에는 1971년 창간된 본보 시카고 한국일보가 한인사회의 여론 형성과 정보 교류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중앙일보 한국 본사는 시카고 현지판 창간을 추진했다. 현지에서 직접 신문을 제작하고 인쇄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는 일이 핵심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현금 30만 달러 규모의 자본력과 지역사회의 신뢰, 실제 신문사를 운영할 수 있는 경영 능력이 필요했다. 1977년 미국 신규 주택 중간가격이 4만8,800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현금 30만 달러는 주택 여러 채 값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거론된 6명의 후보 가운데 이 조건을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인물은 홍두영 사장이었고, 그는 자금력과 지역사회 신뢰를 바탕으로 초대 사장에 최종 낙점됐다.
홍 사장은 한국 본사에서 약 3주간 신문 제작과 운영 과정을 익힌 뒤 시카고로 돌아와 준비에 들어갔다. 어빙팍과 엘스턴 인근에 사옥을 구입하고, 일본에서 모리사와 식자기 2대를 들여와 한글 편집 시스템을 구축했다. 자체 윤전기와 사진 제판, 접지 시설, 암실 등도 갖췄다. 그렇게 1977년, 시카고 중앙일보 현지판 창간호가 나왔고, 홍 사장은 초대 사장을 맡았다.
중앙일보의 등장은 선발 주자였던 한국일보 입장에서는 분명 경쟁의 시작이었다. 홍 사장은 “당시 본보 김용환 사장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였기에 후발 주자로 나서는 데 인간적인 미안함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두 언론사의 경쟁은 시카고 한인 언론과 상권을 함께 키운 계기가 됐다.
홍 사장은 당시 변화를 “예전에는 앉아서 광고를 받았다면, 경쟁이 생기고 나서는 서서 받고, 나중에는 모두가 뛰어다니며 광고를 받게 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언론사들이 적극적으로 한인 업소를 찾아가면서, 한인 비즈니스들도 신문 광고를 통해 자신들을 더 활발하게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언론의 책임도 강조했다. 홍 사장은 “말은 공중으로 흩어질 수 있지만, 글자가 돼서 신문에 나오면 힘이 크다”며 “좋은 글은 좋은 영향을 주지만, 잘못된 글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신문은 돈만 보고 움직이는 사업이 아니라, 이민사회 안에서 책임을 지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1980년 본사와의 경영권 조율 끝에 신문사를 인계했지만, 그가 마련한 제작 기반과 언론 경쟁은 시카고 한인사회에 더 넓은 정보와 광고의 장을 열었다.
◇ 연매출 1,000만 달러, 식품 유통으로 확장
홍 사장의 사업 여정은 계속됐다. 1990년 무렵에는 인도계가 운영하던 던킨 도넛 매장을 인수해 ‘스코키 도넛’으로 이름을 바꾸고 12년간 운영했다. 이른 새벽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 일이었지만, 그는 부지런함과 경영 감각으로 가게를 이끌었다.
이후 사업은 한인사회 성장에 발맞춰 식품 분야로 확장됐다. 1991년에는 ‘오천년 김치’를 설립하고, 한국 식품 전문 유통업체인 진한식품 시카고점을 인수했다. 이어 식당용 자재용품 업체도 세웠다. 한인 식당과 마켓이 늘어나던 시기, 한국 식품과 식당 자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일은 한인 상권의 성장과도 맞물려 있었다.
특히 진한식품은 그의 후반기 경영 이력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성장한 사업이었다. 홍 사장은 신용 중심의 경영으로 회사를 키웠고, 연매출 1,000만 달러를 돌파하는 중서부 지역 유통업체로 안착시켰다.
사업을 운영하며 직원들의 정착 문제에도 마음을 썼다. 홍 사장은 “미국에서 살아가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신분 문제였다”며 “직원들이 영주권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최선을 다해 도왔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의 회사를 통해 영주권 지원을 받은 직원은 10명이 넘는다.
그러나 그의 사업 여정에 성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6년부터 2008년 사이 추진했던 32유닛 콘도 건축 사업은 금융위기와 맞물리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주거래은행이던 앰코어뱅크(AMCORE Bank)가 문을 닫고 해리스은행(Harris N.A.)에 인수되면서 자금 조달 여건이 달라졌고, 사업은 끝내 마무리되지 못했다. 홍 사장은 이 과정에서 약 48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고 전했다.
큰 타격이었지만, 그는 그 시간을 원망이나 실패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홍 사장은 “사업은 절대 얄팍한 상술이나 요령으로 오래갈 수 없다”며 “계산은 정확해야 하고, 한 번 한 약속은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야 하며, 결국 사람을 얻는 것이 비즈니스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바탕에는 늘 성실과 책임이라는 원칙이 있었다.
◇ 공동체 기반을 다지고 신앙으로 맺은 결실
홍 사장의 발자취는 비즈니스 무대에만 머물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 심기영 당시 한인회장이 한인회관 마련을 추진할 때, 홍 사장은 건립위원회 실행이사이자 총무로 참여해 모금 활동을 도왔다. 이민 초기 한인회관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다. 동포들이 모이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공동체의 중심을 만들어가는 공간이었다. 홍 사장은 직함을 앞세우기보다 필요한 자리에서 움직이는 실행자에 가까웠다.
그의 봉사는 더 넓은 공동체로도 이어졌다. 홍 사장은 1979~1980년 라이온스클럽 회장으로 활동하며 손만성 운영위원장과 함께 한국 입양아와 가족들을 위한 행사를 마련했다. 수백 명이 참석한 이 행사에서 그는 한국 음식과 문화를 나누며 입양아 가족들에게 한국인의 정과 정체성을 전하고자 했다.
공동체를 향한 이런 섬김의 바탕에는 기독교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업 현장에서는 ‘홍두영 사장’으로 불렸지만, 교계와 후반부 삶을 설명할 때는 ‘홍두영 장로’라는 이름도 함께 따른다.
그는 “미국에 와서 예수님을 알게 됐고, 세례를 받은 뒤 50년 넘게 신앙 안에서 살아왔다”며 “신앙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부분”이라고 고백했다. 이러한 믿음은 찬양과 선교 봉사로 이어졌다. 그는 시카고장로성가단 창립 멤버로 참여했고, 초대 단장을 맡아 찬양 봉사의 길을 걸었다. 또한 미주한인장로선교회 활동에도 참여하며 신앙을 통한 섬김을 이어왔다. 그의 봉사는 큰 구호보다 꾸준한 참여와 책임으로 이어졌다.
◇ 성실한 하루들이 쌓여 기록이 된다
홍두영 사장의 삶은 어느 한 가지 직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새벽을 깨우던 신문 배달 소년이자 배움의 길을 멈추지 않은 유학생이었고, 식당과 식품점, 부동산, 식품유통업을 거친 경영인이었다. 또한 언론사 초대 사장으로서 한인 언론의 한 축을 세웠고, 방황하던 청년들의 앞길을 도운 이웃이자 한인 커뮤니티의 기반을 다진 공동체 일꾼이었으며, 찬양과 선교로 봉사한 신앙인이었다.
홍 사장은 지나온 이민 여정을 돌아보며 담담히 말했다.
“돌아보면 특별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때그때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했을 뿐입니다.”
그의 여정은 성실한 하루들이 겹겹이 쌓여 한 사람의 인생이 되고, 그 인생이 다시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록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발자취는 개척의 시간을 지나온 1세대의 증언이자, 다음 세대에게 남겨진 이정표로 기억될 것이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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