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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uly 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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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22. 김사직 전 와이즈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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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직 전 와이즈맨 회장과 아내 김정아 여사. <사진 윤연주 기자>

‘나는 누구인가’ 묻던 밤… 세대의 벽을 허물다
28년 공직 생활로 다진 이민자의 성실한 삶
한미장학재단·와이즈맨 통해 다음 세대 지원
서울대 중서부 지역 동창회 장학기금 모금, 후배 사랑 실천
한인문화원 제4대 회장으로 문화 기반 다져

[편집자주] 본보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틀을 다진 1세대 한인들의 삶을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인물은 시카고 한인 와이즈맨 클럽(Y’s Men’s Club) 제22대 회장을 지내며 한인사회 봉사와 2세 교육에 힘쓴 김사직 회장이다. 김 회장은 서울대학교 중서부 지역 총동창회 제30대 회장, 시카고 한인문화원 제4대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캘리포니아 주정부 조세형평국 시카고 오피스에서 28년간 공직 생활을 했다. 유학과 이민의 여정을 거쳐 한인사회 봉사자로 살아온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2010년 열린 시카고 한인 와이즈맨 클럽 신년파티. 시카고 한인 와이즈맨 클럽은 1971년 고 손원태 회장과 배영섭·이육린 선생 등 시카고 한인사회의 초기 지도자 28명이 뜻을 모아 창립한 단체다. 창립 멤버에는 의료인, 목회자, 엔지니어, 학자, 예술인, 보험·언론인, 회계사, 체육인, 변호사, 사회사업가 등 각 분야 인사들이 참여했다.

◇ 시카고 한인사회의 징검다리

인터뷰를 위해 본보를 찾은 김사직 회장은 오랜 세월 간직해 온 책자와 사진들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자료들 속에는 초기 시카고 한인사회의 얼굴들이 남아 있었다. 함께 모여 봉사를 준비하던 사람들, 자녀 세대를 걱정하던 부모들, 그리고 한인사회가 서로를 붙들며 길을 만들어가던 시간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김 회장은 “처음에는 인터뷰를 망설였지만, 초기 한인사회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와이즈맨의 활동을 이야기해 줄 사람이 이제 많지 않다는 안타까운 마음에 기억을 다시 더듬었다”고 전했다.

그가 꺼내놓은 기록의 출발점에는 한 이민 1세대가 지나온 삶의 여정이 있었다. 평안남도에서 서울로, 다시 미국 시카고로 이어진 그의 길은 전쟁과 유학, 공직 생활과 봉사를 거치며 시카고 한인사회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보성중·고등학교 재학 시절의 김사직 회장.

◇ 평안남도에서 서울까지

김사직 회장은 1941년 평안남도 박천에서 비단 공장을 운영하던 유복한 집안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해방되던 1945년 온 가족이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 원효로에 자리를 잡은 것도 잠시, 6·25전쟁의 포화는 집안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아버지가 사업을 접은 뒤 가정을 일으킨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동대문시장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며 생계를 짊어졌다.

김 회장은 “학창 시절 틈만 나면 어머니의 상점으로 달려가 내 몸집만 한 무거운 포목 밀대를 정리해 드리곤 했다”며 “어머니의 헌신과 높은 교육열 덕분에 형제들 모두가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보성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유도부 선수로도 활약했다. 체격이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대회마다 좋은 성적을 거뒀고, 훈련 속에서도 학업을 놓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졸업식에서 김사직 회장.(사진 왼쪽).

김 회장은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며 “당시 보성고 운동부 친구들이 모두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회상했다. 노력 끝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 쌍용시멘트에 입사해 무역 업무를 맡았다.

자리를 잡아가던 1968년에는 평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던 아내 김정아 여사였다. 사촌 누나의 소개로 시작된 만남은 1년 동안 이어졌고, 두 사람은 1969년 3월 백년가약을 맺었다.

1969년 신혼 시절의 김사직 회장과 김정아 여사. 김 여사는 오랜 이민 생활과 봉사의 길을 함께 걸어온 김 회장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였다.

◇ 낮에는 유학생, 밤에는 경비원

결혼 직후 김 회장에게 미국행 기회가 찾아왔다. 더 넓은 세상을 배우고자 1969년 10월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정착했다. 그곳에는 김정아 여사의 친언니 부부가 먼저 살고 있었고, 형부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천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김 회장은 이들의 도움으로 템플 대학교 경영학 석사(MBA) 과정에 입학했다.

학업과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일자리도 바로 구해야 했다. 유도 사범 자격증이 있었던 김 회장은 지역 태권도장에서 파트타임 사범으로 일했고, 이 경력은 훗날 영주권 신청에도 발판이 됐다.

한국에 남아 있던 김 여사도 남편과 합류하기 위해 과학기술처가 운영하는 컴퓨터 학원 6개월 과정을 이수한 뒤 본인 명의의 학생비자를 받았다. 그는 1970년 12월 첫째 딸을 품에 안고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4개월 만인 1971년 4월, 온 가족이 영주권을 취득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빠듯했다. 김 회장은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대형 식품점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했다. 건물을 순찰한 뒤에는 사무실에서 책을 펴고 밤샘 공부를 이어갔다.

김 회장은 “몸은 무척 고됐지만 학업을 마치는 데 큰 밑거름이 된 시간이었다”며 “야간 경비를 하며 혼자 있는 시간은 집중할 수 있는 공부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1973년 템플 대학교에서 MBA 학위를 받았고, 필라델피아 시절 막바지에는 둘째 아들도 태어났다.

◇ 28년 공직 생활과 믿음의 친구

1972년 필라델피아에 있던 김정아 여사의 언니 집 뒷마당에서 가족이 함께했다.

1973년 학위를 마친 김 회장은 이듬해 일리노이주 록포드의 바버콜맨 컴퍼니(Barber-Colman Company)에 회계사로 입사해 약 3년간 근무했다. 이후 1977년 캘리포니아 주정부 조세형평국(State of California Board of Equalization) 시카고 오피스 공채 시험에 합격해 28년간 근무한 뒤 은퇴했다.

그의 업무는 미 중서부 지역 기업과 공장들을 세무 감사하고, 캘리포니아 주정부에 납부해야 할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었다. 때로는 수십만 달러, 수백만 달러의 세금을 두고 회사 측 변호사들과 법적 논리를 주고받아야 했다.

김 회장은 “감사를 나갈 때마다 쉬운 일은 거의 없었다”며 “회사 측 변호사들과 세금 부과 근거를 두고 치열하게 논의하며 감사보고서를 작성해야 했기 때문에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고 돌아봤다.

쉽지 않은 공직 생활 속에서 김 회장에게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 있었다. 미국인 동료 제럴드 웹(Jerry Webb) 씨였다. 공인회계사였던 웹은 20~30쪽에 이르는 감사보고서를 작성할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김 회장은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제럴드가 곁에서 많이 도와줬다”며 “그는 단순한 직장 동료가 아니라 내 평생 잊지 못할 친구였다”고 말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웹 씨는 김 회장에게 삶으로 믿음을 보여준 사람이기도 했다. 김 회장은 “그 친구는 늘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며 “내게 믿음의 충고를 해주고 신앙의 뿌리가 되어준 고마운 친구였다”고 회상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 조세형평국 시카고 오피스 입사 직후의 김사직 회장. 그는 이곳에서 28년간 근무한 뒤 은퇴했다.

◇ 옥수수밭 샴버그에 세운 터전

김 회장이 안정적으로 공직 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아내 김정아 여사의 헌신이 있었다. 김 여사는 자녀 교육과 집안 살림을 맡으면서도 가정의 기반을 더 단단히 다지기 위해 직접 비즈니스에도 나섰다.

그는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매장을 3년 동안 운영했다. 김 여사는 “보기에는 깨끗하고 수월해 보였지만, 일요일도 없이 밤늦게까지 문을 열어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이후 시카고 다운타운 빌딩 안에서 드라이클리닝 드롭오프 스토어(Dry Cleaning Drop-off Store)를 운영했다.

김 여사는 “공무원인 남편의 월급만으로도 먹고살 수는 있었지만, 아이들 학비와 집 마련까지 생각하면 늘 마음의 부담이 있었다”며 “직접 비즈니스를 운영한 덕분에 아이들 사립대학 학비만큼은 대출 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부부는 엘진에 살다가 이후 샴버그의 새 주택단지에 집을 마련했다. 김 회장은 “우드필드 쇼핑몰이 차로 5분 거리에 있었지만, 당시 샴버그 일대는 옥수수밭이 많던 시절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한국인을 만나기조차 쉽지 않던 시절이라 길에서 한인 동포를 만나기만 해도 반가웠다”며 “집으로 초대해 밥 한 끼를 대접하며 정을 나누곤 했다”고 회상했다.

1988년에 열린 제1회 ‘부모와 자녀의 밤’ 행사. 부모와 자녀가 함께 춤추며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마련됐다.

◇ 와이즈맨, 세대의 벽을 허물다

시카고 생활이 안정되자 김 회장은 자연스럽게 한인사회 봉사로 눈을 돌렸다. 한미장학재단 중서부지부 총무로 활동했고, 1990년에는 아내와 함께 시카고 한인 와이즈맨 클럽에 가입했다. 그는 “와이즈맨에 들어간 것이 우리 부부가 본격적으로 함께한 봉사활동의 시작이었다”고 설명했다.

시카고 한인 와이즈맨 클럽은 1971년 고 손원태 회장과 배영섭·이육린 선생 등 시카고 한인사회의 초기 지도자 28명이 뜻을 모아 창립한 단체다. 창립 멤버에는 의료인, 목회자, 엔지니어, 학자, 예술인, 보험·언론인, 회계사, 체육인, 변호사, 사회사업가 등 각 분야 인사들이 참여했다.

국제 와이즈맨 클럽으로부터 미주 지역 최초로 공식 헌장(Charter)을 받은 모임으로, 청소년 선도와 장학금 전달 등 다양한 나눔을 실천해 왔다.

와이즈맨 클럽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세계시민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문화와 정체성을 한인사회와 미국 사회에 알리는 일이었다. 1980년대 초부터 시카고 남쪽 과학산업박물관에서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세계 각국의 고유 문화를 소재로 한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행사가 매년 열렸다. 클럽은 성탄절마다 한국 전통 풍물로 트리를 장식하고, 크리스마스이브에는 한복을 입고 고전무용과 한국 어린이 합창단 공연 등을 주관하며 한국 문화를 알렸다.

청소년 교육도 중요한 과제였다. 와이즈맨은 1977년부터 2세 교육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지식 교육을 넘어 주류사회 속 정체성과 부모·자녀 관계를 함께 다뤄야 한다고 보았다. 그 고민 속에서 1988년 ‘부모와 자녀의 밤’이 시작됐다.

김 회장이 제22대 회장을 맡았던 1993년 제6회 ‘부모와 자녀의 밤’ 행사에서는 한인 대학생 장유진, 김줄리, 태승연 씨가 ‘나는 누구인가(Who Am I)’를 주제로 발표와 토론을 했다. 이들은 미국 땅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아가며 겪어온 정체성의 혼란과 고민을 부모들 앞에 조심스럽게 풀어놓았다.

그 순간, 늘 숨 가쁘게 돌아가던 이민 생활 속에서 자식의 성공만을 바라보며 달려왔던 부모들의 시간이 잠시 멈춰 섰다. 객석에 앉은 이민 1세대 부모들은 숨을 죽인 채 자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친 이민 생활의 풍파를 막아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 여겼지만, 정작 무대 위 자녀들이 털어놓는 깊은 속내를 들으며 부모들은 비로소 아이들의 마음을 온전히 마주하게 됐다.

이어 이중문화 속에서 부모와 자녀 간의 깊은 이해와 존경의 필요성을 되짚는 강연과 자유토론이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마음을 나누는 시간도 마련됐다.

2010년 열린 시카고 한인 와이즈맨 클럽 “부모와 자녀의 밤” 행사에 김 회장 부부가 자녀들과 함께했다. 이날 행사에는 강연과 자유토론에 이어 부모와 자녀가 함께 춤추며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마련됐다.

김 회장은 “‘부모와 자녀의 밤’은 단순한 친목 행사가 아니었다”며 “부모 세대가 자녀들의 고민을 직접 듣고, 그들이 미국 사회에서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는 뜻깊은 자리였다”고 설명했다. 이 행사는 이후 제8회까지 이어지며 한인사회 안에서 세대 간의 벽을 허무는 대표적인 행사로 자리 잡았다.

아내 김정아 여사도 훗날 시카고 한인 와이즈맨 클럽 제38대와 39대 회장을 맡아 봉사했다. 클럽은 북한의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단체(CRAM WORLD WIDE INC)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으며, 장애인 프로그램을 돕는 복지 단체 ‘물댄동산’에도 정기적으로 후원하며 나눔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2012년 시카고 한인 와이즈맨 클럽 회장 이취임식에서 김정아 여사와 김현영 당시 신임 회장. 김 여사는 제38대와 39대 회장을 역임했다.

◇ 장학과 문화원으로 이어진 봉사

김 회장의 나눔은 와이즈맨 활동에만 머물지 않았다. 2011년 그는 서울대학교 중서부 지역 총동창회 제30대 회장을 맡았다. 회장으로서 가장 먼저 마음에 둔 일은 후배들을 위한 장학기금 마련이었다.

그는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며 “우리 세대가 어렵게 공부했으니, 다음 세대가 배움의 길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마음으로 김 회장은 세계적인 테너 이용훈 교수를 초청해 시카고 심포니 홀에서 독창회를 여는 장학기금 모금 행사를 기획했다. 동문들과 한인사회가 뜻을 모은 가운데 독창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됐고, 순이익금 13,200달러 전액은 모교 후배들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기부됐다. 독창회가 열린 2011년 9월 11일은 마침 한국의 추석 명절이기도 해, 당시 팻 퀸 일리노이 주지사가 ‘한국의 날’ 선포 상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한인사회 원로 박해달 회장의 역할이 컸다.

김 회장은 “큰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함께 마음을 모아준 동문들과 한인사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2011년 서울대학교 중서부 지역 총동창회 회장을 맡은 김사직 회장이 동창회 장학기금 모금 음악회를 마친 뒤, 시카고 우래옥에서 열린 뒤풀이 자리에 함께했다.

이후 시카고 한인문화원 제4대 회장직 요청이 왔을 때도 그는 한동안 망설였다. 그러나 문화원이 한인사회의 정체성과 문화를 지켜가는 중요한 공간이라는 생각에 다시 소매를 걷어붙였다. 김 회장은 샴버그 자택에서 윌링의 문화회관까지 2년 동안 매일 오가며 기반을 다지는 데 힘을 보탰다.

김정아 여사 역시 봉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시카고 한인여성회 골든클럽 부장으로 활동하며 2019년 ‘가족에게 쓴 사랑의 편지 모음집’을 발간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대면 모임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온라인으로 원고를 모았고, 여성회 창립 40주년 기념 수필집 ‘내 삶에 영향을 끼친 여성’을 펴냈다.

김 여사는 “가까운 가족일수록 사랑한다는 말을 마음속에만 두고 미루기 쉽다”며 “살아 있는 동안 서로에게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김사직 회장의 네 손자. 김 회장 부부는 손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바르게 성장해 가는 모습을 가장 큰 보람으로 꼽았다.

부부는 오랜 세월 이어온 나눔과 헌신을 인정받아 아시안 크로니클 USA(Asian Chronicle USA) 사회봉사상, 오바마 대통령 사회봉사 훈장 및 메달을 받았다. 또한 서울대학교 총장 공로패와 서울대 총동창회장 공로상패도 받았다.

오랜 봉사에 대한 사회적 인정도 있었지만, 부부가 가장 큰 보람으로 꼽는 것은 상이 아니었다. 네 명의 손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제 몫을 해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첫째 손자는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 방사선과 레지던트로 근무 중이고, 둘째 손자는 엔지니어로 활동하고 있다. 셋째 손자는 우주공학 박사 과정에 있으며, 넷째 손자는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있다.

김 회장은 “우리 1세대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고, 사회의 든든한 구성원으로 서 준 것이 저희 부부에게는 가장 큰 보람이자 행복”이라고 말했다.

김사직 회장 부부가 오랜 세월 이어온 나눔과 헌신을 인정받아 받은 공로상과 공로패. 사진 왼쪽부터 아시안 크로니클 USA(Asian Chronicle USA) 사회봉사상, 오바마 대통령 사회봉사 훈장 및 메달, 서울대학교 총장 공로패와 서울대 총동창회장 공로상패.

◇ 기록으로 남은 개척자의 시간

김 회장은 공직 생활과 한인사회 봉사, 장학 사업과 문화 활동을 지나오며 한 가지 마음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 다음 세대가 자신이 서 있는 뿌리를 알고, 부모 세대가 걸어온 길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가 오랜 세월 보관해 온 와이즈맨 책자와 오래된 자료들을 다시 꺼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낯선 미국 땅에 한인사회가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 한국인을 만나면 반가워 집으로 초대해 밥을 나누던 마음, 자녀들의 정체성 고민을 함께 듣고 나누던 시간, 장학금과 봉사로 다음 세대를 세우려 했던 노력이 그 기록 안에 담겨 있었다.

세월이 흘러 활동의 방식은 달라졌지만, 부부의 삶을 지탱해 온 마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 회장 부부는 2013년 창단된 부부합창단 등에 참여하며 신앙생활과 봉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 회장은 “예전처럼 바쁘게 뛰어다니지는 못해도, 우리가 받은 은혜를 조용히 나누는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반세기 넘는 세월을 이민자로, 부모로, 봉사자로 살아온 김 회장이 다음 세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길지 않았다. 아내 김정아 여사와 함께 낯선 땅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자녀를 키우며, 공동체를 섬겨온 세월 끝에 남은 고백은 ‘사랑과 감사’였다.

김 회장은 “망설이지 말고, 살아 있는 동안 서로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표현하라”고 조언했다.

그가 꺼내놓은 오래된 자료와 기억은 한 개인의 회고를 넘어, 시카고 한인사회가 서로를 붙들며 다음 세대를 세워온 시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일하며 유학 생활을 버틴 청년은, 훗날 한인사회 안에서 세대의 벽을 허무는 봉사자로 섰다.

김사직 회장이 남긴 발자취는 초기 이민자들의 삶이 단지 생계를 위한 분투만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 안에는 교육을 향한 열망, 공동체를 위한 책임,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징검다리가 되어준 이민 1세대의 조용한 헌신이 담겨 있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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