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구원의 의미(구원은 과정)

3222

정성국 목사/로뎀교회 담임

 

구원은 과정이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당신은 구원받았는가?”라고 묻는다면 다음 세 가지 중에 무엇으로 대답할 것인가? (1) 나는 구원 받았다. (2) 나는 구원 받는 중이다. (3) 나는 구원받을 것이다. 진실한 신자에게는 세 가지 모두 해당한다. “나는 구원 받았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듭하게 하셔서 타락한 영혼에 새로운 생명을 주신 과거의 사건을 말한다. 신자는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 이를 확신하기는 해도 거듭나게 하신 때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사차원의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은 영원한 현재에서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백성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중생함으로 구원을 시작하셔도 구원이 즉시 완성되지는 않는다. 부패한 사람 속에 있는 죄성이 곧바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 사람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은 부패한 죄성과 계속해서 싸운다. 이는 마치 몸에 병균이 들어올 때 백신을 맞는 경우와 같다. 백신을 맞자마자 곧바로 병이 낫지는 않는다. 백신이 병균을 전멸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새 생명은 부패한 옛사람과 싸운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과정이다. 신자는 구원 받는 중이다.

언젠가 백신이 병균을 다 섬멸해서 몸이 회복될 때가 있듯이 구원이 완성될 때가 있다. 사람의 전 인격에 있는 죄성이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회복할 때가 있다. 이때 구원이 완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는 미래에 구원받을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구원은 완성된다. 그래서 구원은 “이미(already), 그러나 아직(not yet)”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성격을 띤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이 땅에 사는 모든 신자는 구원의 시작에서 구원의 완성으로 향하는 과정에 있다. 참다운 신자는 현재 두 왕국에 거하는 이중국적자이다. 신자는 사탄의 왕국에서 하나님의 왕국, 즉 천국으로 옮겨왔다. 천국 시민권자다. 그러나 사탄의 왕국을 완전히 탈출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한쪽 발은 사탄의 왕국에 걸쳐있고 또 다른 발만 천국에 왔다. 말하자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사탄의 통치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는 구원 받았고, 받고 있고, 받을 것이다.

천국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신자는 순종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히 영광 돌리지는 못한다. 영광 돌리는 중이고 완전한 영광을 향해 나아간다. 또한 참신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회복하는 중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신자가 부활하면 그때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한다. 그래서 구원은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구조 속에 있는 과정으로 현세적이면서 종말적이다.

구원은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의 측면이 있지만, 얼마만큼 받았느냐는 정도의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죄로부터의 자유라고 했고,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며,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서구사상에 물든 현대인들은 매사를 흑백으로 구분하기 좋아한다. 구원받았느냐 말았느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느냐 못했느냐, 천국 백성이 되었느냐 못되었냐 등 이분화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구원이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과정에 있음을 고려할 때 구원에는 정도의 문제가 있다. 구원받았다면 얼마만큼 받았느냐는 문제이다. 이는 곧 당신은 죄의 문제를 얼마만큼 해결했고, 하나님의 형상을 어느 정도 회복했으며, 어느 정도 천국 백성이 되었느냐는 문제다. 죄를 극복하면 극복할수록 구원은 그만큼 증가한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할수록 구원은 그만큼 증가한다. 역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않을수록 구원은 감소한다. 구원은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삶과 정비례하고 불순종과 죄와 반비례한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받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 자체가 구원이기 때문이다.